팬데믹 시대, 종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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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 종교의 역할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0.1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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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전남대 종교문화연구소 '팬데믹 시대 종교의 역할' 학술대회 개최

전남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소장 송오식 교수)는 지난 13일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2호관에서 광주전남기독교수연합회와 공동으로 팬데믹 시대에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맞고 있는 현 시점에서 종교의 역할, ‘기독교의 대응과 과제를 중심으로’라는 부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인류의 역사와 감염병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한때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하고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야기하기도 했다. 연초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 상황은 한 해가 저물어가는 현재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다. 학교와 직장, 가정 등 모든 면에서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상이 반복되면서 이제 ‘언컨택트’와 ‘뉴노멀’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19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운데 종교계 특히 기독교도 여러 방향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현장 예배를 생명처럼 여겼던 교회는 한때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하면서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예배의 본질론에 대한 논의로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해외에 나가 있던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급거 귀국하면서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팬데믹 시대 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행사를 하지만 특히 기독교의 대응과 과제를 중심으로 범위를 좁혔다. 감염병의 창궐이 그 동안 현장예배를 중시 여겼던 기독교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향후 교회의 존립 기반마저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된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팬데믹 시대 예배와 선교의 방향, 로마시대 전염병과 기독교인의 대처, 경제위기와 크리스찬 등의 주제발표로 진행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팬데믹시대의 예배(김명실 영남신대 교수), 팬데믹 시대 선교적 대응방안(정봉현 전남대 교수), 로마시대 전염병과 기독교인의 대처(이상규 고신대 명예교수), 팬데믹 시대 경제위기와 크리스찬(김재연 일본 홋카이도 도북클리닉 박사) 등의 주제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살펴보고, 향후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담론을 전개했다. 각 발표자의 주요 발표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 ‘팬데믹 시대 예배’ - 김명실 교수(영남신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covid19 팬데믹이 끝난 후 온라인 예배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오프라인 예배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들이 있다. 어쩌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실행해온 예배 전통을 따르지 않고 물리적 교회에도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세계 기독교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있다.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 중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예배인가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 나라와 그 교회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를 가동해야 한다. 이 두 방식이 모두 동원되는 ‘올라인’ 방식으로 적극적 소통을 꾀해야 할 때이다.

만일 온라인 교회로 옮겨간 사람들이 다시 오프라인 교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그것은 시대와 매체의 변화가 가져다준 도전의 본질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팬데믹 속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회중이 큰 어려움 없이 온라인 예배를 실행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온라인 예배가 갖는 특징과 장점들을 오프라인 예배도 갖추어 새로운 차원의 오프라인 예배를 준비해두지 않으면 온라인으로 옮겨간 자들을 다시 불러내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온라인 예배의 실행이 뛰어나다고 해도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잘 준비된 오프라인 예배가 주는 기쁨과 감동을 대신할 수 없다.

설교중심의 지식이나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에서 벗어나 모든 회중이 함께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예배 성령의 자리를 인지하고 남겨두는 예배로 발전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상징하는 예배예술을 활용하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창의적 언어와 메타포를 개발하여 다감각적이고 유기적인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접속이 끊어지면 존재하지 않는 가상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 거룩한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 ‘로마시대 전염병과 기독교인의 대처’ - 이상규 명예교수(고신대)

기원 후 첫 300여 년 간 그레꼬-로만 사회는 영아 유기 혹은 영아 살해는 당연시 되었고, 낙태는 관습화되어 있어 인간생명 존중 사상을 결여하고 있었고, 타인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질병이나 역병, 죽음에 대해서도 운명으로 받아들여 도피를 최상의 조치로 이해했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와 더불어 영아 유기를 반대한 유일한 집단이었고, 낙태와 살인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특히 로마시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역병은 엄청난 인구 유실을 가져온 팬데믹이었는데, 당시 이교도들은 도피를 유일한 선택으로 이해하여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유기하고 도피했으나 기독교 공동체는 도피를 최선의 선택으로 보지 많고 이들을 돌보고 간호해 주었다.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격감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종교적 이행이 나타나 기독교 성공의 한 요인이었음을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그 처한 상황에서 사랑의 시혜자이자 도반(道伴)의 보호자였음을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아우렐리우스나 데시우드 치하에서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수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의 다종교적 다신교적 환경에서 기독교에로의 종교적 이행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로마시대 역병은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에드워드 보크(E. R. Boak, 1888-1962)와 같은 역사가들은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였고,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도 감소하였다고 말한다. 또 도시와 농촌 등 행정 지원 부족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이 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자연재해나 역병이 역사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런 큰 변화의 와중에서 기독교는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소망을 주었던 것이다. 현세적이든 내세적이든 상관없이.


▶ ‘팬데믹시대 경제위기와 크리스챤’ - Dr. YOSHIDA AKIRA(김재연·일본 도북클리닉)

2001년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에서 예견된 바와 같이, 기존의 소유, 크기의 개념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교회의 크기는 성도 수에서 접속자의 수로 재편되고 있다. 성도들은 온라인 예배에 이미 적응되었으며, 현장 예배 병행 시 현장 참여도가 기대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 자체 온라인 예배가 어려운 지역교회가 함께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지역교회와의 연합과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교회의 미네르바화도 코로나19가 가져온 기회이자 인사이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교회에 대응시키면, 입문교육과 예배, 헌금 등은 정체성을 공유한 교회에서 진행하되, 각 성도는 소명을 받은 전문성이 있는 사역 현장에서 개별적으로 헌신하게 하고 개인화, 개별화, 전문화, 디지털화, 자율화를 적용하게 한다. 한 곳의 사역 현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목표 달성 시 이동케 하며, 각 사역에 필요한 경비는 개인 부담 또는 해당 교회와 함께 부담하게 한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은 여호수아 정복시대의 길갈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군대 용어로 보면 교회를 집결지로, 보수 및 보급을 받고 출정준비를 하는 곳으로 역할을 변경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교육 체계에서 사역과 체험, 간증을 공유하는 장소로의 변모가 요구된다. 또한 흩어지는 교회로 패러다임이 변경되어야 한다. 이는 초대교회를 모형으로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새로운 모습이 아닌 원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대형 교회의 건물 소유 형태를 탈피하여 디지털화된 플랫폼 구축이 시급하다.

교회의 기존 패러다임인 보편성에서 전문성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 교회는 예배공동체이자 사역공동체였다. 한곳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는 보편성, 수월성, 편리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대형 교회가 여러 분야에서 유리하였고, 성도의 수와 건물의 규모가 강조되었다. 따라서 전문적인 영역의 교회는 성도 수의 확보가 어려워 탄생이 어려웠다. 대형교회는 익명의 성도 양산, 신도의 수평적 이동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Winner takes all 시스템에서 나눔의 실천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서 지향하여야 하는 교회의 패러다임은 전문성이다. 정체성과 전문성을 두 기둥으로 하여 예배와 사역이 분리되어야 한다. 한곳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고 교회에서의 체류시간도 짧아졌다. 이러한 위기 시대에는 성도 숫자가 아니라 전문영역 동역자의 수가 중요하며, 전문성을 가진 이머징 처치의 등장 및 여건이 조성되었다. 반면, 전문성을 갖지 못한 소형 교회의 어려움은 확대되고, 신구 세대 간의 괴리와 디지털 격차의 확대 가능성을 가져왔다. 이는 시니어 전문교회와 같은 새로운 사역의 기회가 된다. 또한 익명의 성도의 참여의 계기가 될 수 있으며, Winner takes it all 시스템에서 Everybody can be a top dog 시스템으로 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전문인 사역을 위한 전문적 교회로의 전환 필요성이 증대되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정체성이 작동하는 교회가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새로운 콜라보레이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전문교회 및 정체성이 같은 교회 간 연합이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양전문교회, 선교전문교회, 비즈니스사역전문교회가 연합하여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사역할 수 있다. 사우디전문교회, 이란선교전문교회, 요르단선교전문교회가 지역선교와 이슬람선교에 연합할 수 있다. 디지털이 강한 교회와 아날로그적 개별화가 강한 교회가 모여 사역에 있어 콜라보레이션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역의 연합 가운데 컨퍼런스콜과 같은 보다 발전된 컨퍼런스 예배의 등장이 가능해질 수 있다.

전문 컨텐츠가 강화되면 강소교회가 탄생할 수 있다. 각종 교육 컨텐츠, 찬양 컨텐츠, 간증 컨텐츠, 전문 사역 영역의 컨텐츠를 확보한 교회의 경쟁력, 특정 국가, 종족에 대한 선교 정보와 선교사역 컨텐츠, Z세대에 대한 사역 컨텐츠를 보유한 교회들이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교회의 전문화는 온오프라인 상에서의 글로벌화 촉진의 기회가 된다. 보유한 컨텐츠를 각종 방언으로 송출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면 국경 없는 디지털 세계를 미리 선점하는 교회가 글로벌 선교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영어는 필수이며 중국어, 일어, 아랍어, 스페인어, 브라질어 등 제 2, 3 외국어와 아시아계 소수민족언어까지 새로운 사역의 기회를 여는 열쇠를 확보하여야 한다.

▶ ‘전염병과 초기 한국 개신교, 1885-1919’ - 옥성득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 이전까지의 콜레라 유행, 러일전쟁 기간의 콜레라 유행, 통감부 시기의 콜레라 유행, 1910-11년 만주 흑사병 유행, 그리고 1918-19년 무오 독감 유행에 따른 한국 사회상과 각 시기에 개신교의 반응과 사역을 살펴보았다.

첫째, 1895년부터 1902년까지 콜레라 유행과 개신교의 관계이다. 동학전쟁과 청일전쟁에 이어 을미년 콜레라가 발생하면서 중화주의와 전통 종교의 지배력이 무너지고 서구 문명이 한반도에 몰려오자, 기독교 문명론을 앞세운 개신교는 정부의 콜레라 방역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전후에 본격적인 선교 착수기에 접어들었다. 개신교는 선교병원으로 전환된 제중원을 통해 정부와 협력하면서 전염병 방역에 나서면서, 새문안교회 교인들로 ‘적십자 콜레라대’를 조직하여 환자 구호와 시체 운반에 나섰다. 역병과 기근의 해 1902년에는 서울과 서북지역 도시에서 성장한 개신교회 교인들은 세균론을 수용, 전파하는 동시에 사망할 경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개신교 의료진은 대한제국 정부와 적극 협력하였다.

둘째, 1904-05년 러일전쟁 기간부터 통감부 시절 콜레라와 개신교의 관계이다. 이때 한국인들은 서양 의학의 세균론과 일본 통감부의 위생 정치를 수용했다. 개신교회는 평양의 ‘콜레라 적십자대’ 활동에서 보듯이 서북 지역에서 방역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일본은 적십자사 병원을 통해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서 의료 과학의 우위를 드러내면서, 한반도에서 의료 헤게모니 경쟁에 나섰다. 개신교의 전염병 사역과 신설한 세브란스병원은 한국 정부와 민중의 우호성을 얻었지만, 새로운 경쟁자인 일본 적십자사의 전쟁 구호 의료와 통감부가 1906년에 설립한 대한의원의 위생 경찰 통제와의 경쟁에서 점차 개인 환자 치료 사역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통감부 시기 일본 제국의 경찰 위생 제도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개신교 의료는 공중위생이나 전염병 사역에서 단절되었다.

셋째, 1911년 만주 흑사병은 총독부의 군사 경찰 위생을 통한 한국인의 몸 통제는 물론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 사건’을 통해 서북 지역 개신교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으로 발전했다. 1910년대는 정부와 개신교가 갈등하면서, 개신교 의료는 총독부의원과 자혜병원 체제와 경쟁할 수 없는 단계로 전락했다. 그 결과 1920년대에 의료 선교 신학이 전도의 수단에서 사랑의 실천이라는 의료 선교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넷째, 1918-19년 무오독감과 개신교의 반응이다. 개신교는 팬데믹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이나 정책이 없이 침묵했다. 1885년 개신교 의료 선교 개시 이후 1919년까지 35년 동안 개신교는 초기에는 조선 (대한제국) 정부와 협력하며, 적극적인 방역 공중위생 사업에 참여하고 세균론을 보급했으나, 통감부의 경찰 위생과는 일정 경쟁 관계에 접어들어 위생보건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총독부는 만주 흑사병 이후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백오인사건으로 개신교 민족주의의 탄압에 진입했다. 1918년 무오독감 유행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공공 의료 측면에서 팬테믹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거나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서북지역에서 민족주의와 만나 삼일운동 주역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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