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정말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가? 개신교 우파의 혐오주의 해석을 반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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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정말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가? 개신교 우파의 혐오주의 해석을 반박하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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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성서와 동성애: 혐오와 억측을 넘어, 성서 다시 읽기 | 김진호 지음 | 오월의봄 | 190쪽

‘반동성애’를 외치는 목소리는 성소수자 인권 보장이 외쳐지는 곳곳에서 동시에 들려오곤 한다. 누군가의 성정체성을 반대할 수 있다는 주장 자체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러한 주장이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스피커가 다름 아닌 종교계라는 사실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반동성애’를 외치는 이들은 몇몇 성서 구절을 근거로 혐오주의를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종교적 신념’으로 존재를 반대하겠다는 칼날을 들이민다. 그러한 칼날이 휘둘러지는 곳에 언제나 ‘하느님’과 ‘천국’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찬반’의 문제로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적 편견에 개신교가 깊이 개입해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반동성애’ 운동이 가능했던 데는 개신교 우파 목회자들의 혐오주의적 성서 해석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주의적 해석의 설교가 반복되며 집회나 시위 등 신자들의 실질적인 ‘반동성애’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서는 정말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마치 그것은 당연한 전제처럼 가정된 채, 성소수자를 종교적 신념으로 ‘배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라는 기이한 선택지만 남은 듯했다. 이러한 논의는 비종교인, 비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성서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서는 동성애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성정체성이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아마도 가장 정확한 해석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개신교 우파가 인용하는 성서 구절도 〈레위기〉 20장 13절, 〈사사기〉 19장 22절, 〈로마서〉 1장 26절, 〈고린도전서〉 6장 9절 정도에 국한된다. 겨우 3~4개 텍스트가 전부인 것이다. 이마저도 남성과 남성의 성관계만이 언급되고 있으며, 저자는 이때에도 동성애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본다. 당대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맥락 등을 고려해 해석한다면 그 구절에는 동성애 비판이 아닌 다른 데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반동성애’를 외치는 개신교 우파가 근거로 삼는 3~4개 성서 구절들을 철저히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여성과 여성의 동성애를 비롯해 다른 성소수자들을 언급하거나 ‘반대’하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 ‘남성과 남성의 성관계’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 비판은 결코 ‘동성애’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반동성애’의 근거가 되는 성서 구절을 역사적 개연성을 좇으며 정치사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해석에 반기를 들며, ‘반동성애’로 해석되는 구절들을 치밀하게 다시 살핀다.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을 논하기 전에, 전제를 의심하는 질문을 건너뛰지 않기 위해서다. ‘성서에서는 정말 동성애를 반대하는가?’ 이 질문은 또한, 종교 여부를 떠나 ‘존재를 반대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 동성애 반대 입장 차 뚜렷
▲ 동성애 반대 입장 차 뚜렷

저자의 논의는 개신교 우파의 정치적 의도와 ‘반동성애’의 연결 고리를 분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개신교 우파의 ‘반동성애’ 운동과 평행하는,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의 등장과 정치적 ‘신상품’으로서 기능하는 성소수자 인권의 대두다.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목사들의 “논리가 막무가내로 퍼부어대는 비난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것이 ‘관용’의 태도와 충돌한다는 것을 인식한 이들이다.

저자는 ‘포용’의 원리와 소비자본주의의 영향이 공존하는 현재의 상황을 우려하며, 결국 그 때문에 포용이냐 배제냐 하는 분리주의적 질문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성다수자 대 성소수자라는 이분법을 넘어,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무수한 편견과 차별의 메커니즘 자체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공’에 집중했던 증오의 정치는 이제 ‘반동성애’라는 새로운 혐오를 내세우고 있다. 극우주의 개신교 정치 세력이 기존의 극우정당과 연합하지 않을 수 있는 주요한 명분이자, 종교적 신념으로 자기기만이 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반동성애’는 개신교 우파의 정치 세력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없었다면, ‘반동성애’ 또한 정치 세력화의 수단으로 선택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찰과 반박 이후는 무엇일까. 저자는 동성애 문제를 넘어 퀴어 문제로 나아가는, 퀴어적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괴한’ ‘비정상적인’이라는 혐오와 배제의 뜻이 담긴 원래의 의미를 전복해 정체성의 용어로 사용되는 ‘퀴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가르는 편견과 차별의 메커니즘을 사유하고, 여기에 중점을 둔 실천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부조리를 교정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퀴어를 위한’ 시각이라면, 부조리한 세계 너머의 세계를 꿈꾸게 하는 것은 ‘퀴어의’ 시각이다.

동성애 혐오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을 넘어 성다수자 대 성소수자라는 이분법을 벗어나는 것, 포용도 관용도 아닌 편견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질문하는 것. 혐오의 무기가 된 성서를 다시 읽는 출발점도, 반박과 분석 이후를 고민하는 출발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퀴어한 존재가 신의 축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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