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절이나 서러운 여성 유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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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절이나 서러운 여성 유배인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11.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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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⑫_여성 유배인

여러 유형의 유배

조선시대 유배형은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유폐시키는 형벌이다. 중간에 풀려나는 경우도 많았지만 원래 종신형이었으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벌이었다. 흔히 양반 관리들만 유배를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오해이다. 평민, 노비들도 유배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 직권으로 형사범을 유배형에 처할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다. 먼저 중앙 고위관료를 지방에 안치(安置)시키는 형태이다. 둘째, 대역죄를 지은 죄인을 처형하고, 그 가족들을 연좌시켜서 유배 보내는 것이다. 셋째,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법에 따라 도형(徒刑), 유형(流刑)에 처하는 경우이다. 넷째, 노비 등 천인(賤人)과 각종 잡범들을 관찰사가 직접 유배 보내는 사례도 있다.

▲ 위리안치. 집을 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 외부와의 통행을 차단하는 것으로 유배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처분이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 위리안치. 집을 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 외부와의 통행을 차단하는 것으로 유배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처분이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어느 경우든 간에 조정에서 해배(解配) 명령에 내려와 번복될 가능성이 없는 한 일단 유배형에 처해지면 앞길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에 빠진 것과 진배없었다. 무려 십팔년간의 귀양살이를 경험한 다산 또한 귀양살이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몸소 체험했다. 그가 강진 유배지에서 쓴 시에는 “조금 궁하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크게 궁하면 동정하는 사람이 없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극도로 절박한 상황에 몰린 자신에 대해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는 것을 자조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남자는 그나마 나았으니, 여성 유배인은 상상 이상의 훨씬 고달픈 설움에 직면해야했다.

점고(點考) 절차와 유배지에서 겪는 수모

여자의 몸으로 유배를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성 유배인은 대체로 앞서 다산이 언급한 유배 유형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한다. 즉 집안사람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죄인의 가족이란 이유로 하루아침에 연좌되어 유배당하는 형태이다. 이 경우 사족(士族)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한 채 유배 오는 경우도 있지만, 관비(官婢)가 되어 유배지 고을에서 노역을 해야하는 사례가 더 많았다. 자연히 이들에 대한 유배지에서의 능멸과 학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유배죄수들은 한 달에 두 차례에 걸쳐 관아에 들어가 고을의 점고(點考)를 받아야 했다. 점고는 이들이 배소(配所)를 이탈하지 않고 잘 있는지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수단이었다. 고을 수령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치르고 난 후 아전 등 모든 관속들에 대해 점고를 했는데, 이 때 고을로 유배 온 이들도 함께 점고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유배죄수들은 가족을 떠나 멀리 귀양 온 신세이니 수령이 측은해하는 마음을 먹도록 권고하였는데, 여성 유배인들에게는 특별히 더 신경쓸 것을 강조하였다. 즉 사족 부인이 처음 귀양 오면 얼굴을 가리고 관아 뜰에 들어오도록 할 것이며 이 때 수령은 아예 방문을 닫고 보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며, 점고가 끝나면 관비를 차출해서 그녀가 거처하는 집까지 호송하도록 주문한다. 또 그 부인이 사는 마을에는 남자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 점고한 후에는 관아로 부르지 않고 관비를 파견하여 보살피도록 하며, 명절에는 쌀과 고기를 보내 잘 예우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 제주에 있는 정난주 묘소 입구. 1801년에 남편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후 그녀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겨우 두 살의 아들 정명현은 추자도로 나누어 귀양 보내졌다.
▲ 제주에 있는 정난주 묘소 입구. 1801년에 남편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후 그녀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겨우 두 살의 아들 정명현은 추자도로 나누어 귀양 보내졌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산이 조언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당시 부녀자들이 비(婢)가 되어 유배올 경우 고을 수령들이 점고를 빙자해서 미색(美色)을 엿보며 딴 마음을 품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6세기 어숙권(魚叔權)이 쓴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가족 전체가 변방으로 이주하는 전가사변(全家徙邊)에 처해질 경우 가장이 죽게 되면 남은 가족들이 낭패를 겪는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이 죽어 장사를 치르자마자 남은 가족들 가운데 부녀자를 차지하기 위해 관청의 백정(白丁)이나 관노(官奴)가 서로 다투었다. 고을 수령은 이들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녀자를 위협하여 시집가도록 강요하곤 했다. 유배온 여성이 유배지에서 과부로서 수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전 칼럼에서 한번 살펴본 적이 있는 다산의 글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에 나오는 인동장씨 집안의 모녀에게 닥친 불행이 바로 여성 유배인들이 겪게 되는 최악의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정조 승하 직후 정조 독살설을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인동의 장현경(張玄慶)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결국 장현경은 도주하고, 장현경의 두 딸과 아들 하나만 신지도로 귀양 보냈다. 그러던 1809년(순조 9) 가을에 그곳 진(鎭)이 군졸 하나가 큰딸에 흑심을 품고 매일 희롱하였다. 견디다 못한 큰딸이 바다에 투신하고 이를 구하려던 장현경의 부인도 함께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사건은 작은 딸에 의해 관에 신고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끝내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이 슬픈 사건은 부녀자로 유배되면 어떤 억울한 일을 겪게 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냉대와 멸시로 힘겨운 유배생활

유배지에서의 고충은 앞서 본 주기적인 점고를 받아야 하는 일 외에도 많았는데, 특히 경제적 문제가 유배온 이들을 괴롭혔다. 대개 유배지 고을에서 유배인을 먹여 살릴 책임이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대우는 지역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따라서 고을에서의 지원이 여의치 못할 경우 때로는 고향집에서 제공하는 물품으로 생활하기도 하였고, 심한 경우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특히 광해군 때 제주에 귀양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어머니 노씨는 유배지 수령의 조롱과 학대로 매우 굴욕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남편 김제남(金悌男)이 역모 사건에 휘말려 처형된 지 5년 뒤인 1618년(광해군 10)에 제주로 유배되었다. 노씨부인 일행은 육로로 남쪽으로 내려온 후 해남을 출발하여 보길도, 추자도를 거쳐 조천관(朝天館)으로 제주에 들어왔다. 부부인(府夫人) 마님에서 졸지에 유배죄인이 된 노씨는 제주도에 유배온 최초의 여성 유배인이었다.

▲ 제주의 조천관 터.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 항구로 사신과 유배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도 제주에 올 때 여기를 경유했다고 전한다.
▲ 제주의 조천관 터.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 항구로 사신과 유배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도 제주에 올 때 여기를 경유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제주목사 양확(梁濩)은 집권세력인 대북파의 눈에 들기 위해 노씨부인에게 매몰차게 대하며 학대했다. 노씨가 해야 할 힘든 관역(官役)은 집 주인의 아내가 대신해주었으나, 양확이 노씨에게 줄 식량도 제대로 주지 않아 생계가 막막해진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막걸리를 빚어 연명해야했다. 그녀가 빚은 술은 술맛이 아주 좋았던 듯한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목사 양확이 매번 술에 취하면 대비어미가 파는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지금의 ‘모주’가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노씨가 판 술을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 즉 대비모주(大妃母酒)라 부르다가 나중에 그냥 ‘모주’라 했다는 것이다.

인생지사(人生之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5년 뒤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노씨의 굴욕적인 유배생활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대신 그녀를 괴롭힌 목사 양확은 뇌물을 챙기는 등 탐학을 일삼았다 해서 목이 베이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사실 앞의 노씨부인의 경우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영조 때 남편인 충청도 진잠현감 이만동(李萬東)이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간 이만동의 처와 세 자녀의 삶을 추적해보자. 이만동은 반란 당시 청주의 적병(賊兵)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되어 국청(鞫廳)에서 형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후 이만동의 부인 우계임(禹桂壬)과 아들 태연(泰延), 두 딸 미순(美順)·종순(終順)이 함께 경상도 단성의 관노와 관비로 정속되었다. 1729년(영조 5) 유배 당시 우계임의 나이는 마흔 한 살이었으며, 아들 태연은 열 셋, 두 딸은 각각 여덟 살, 다섯 살의 어린 나이였다. 단성호적에 따르면 비록 이들이 유배올 당시 집안일을 해줄 비(婢)를 한 명 데려왔지만, 삼십 년이 넘도록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단성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아들 태연과 두 딸의 가계도 족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우계임 가족의 사례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양반 가족의 불운한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제도로 유배간 유섬이 이야기

앞서 본 것처럼 여성으로서 유배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통 고생스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다산 정약용의 말을 들어보자. 그에 다르면 역모 사건 등에 연좌된 경우 집안이 완전히 몰락하다 보니 처녀로 귀양와서 백발이 이마를 덮도록 머리를 땋아 늘인 채 환갑이 다 되도록 문을 닫고 홀로 거처하는 여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19세기에 거제도로 유배간 유섬이(柳暹伊)가 바로 이런 사례이다.

거제도 유배여성 유섬이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으로 물려 전주에서 능지처사형에 처해져 순교한 유항검(柳恒儉)의 딸이었다. 유항검의 처, 장남, 차남 등 가족 대부분은 그와 함께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여섯 살, 세 살의 두 아들 유왈석(柳曰錫)과 유왈문(柳曰文)은 각각 흑산도, 신지도의 관노가 되었고, 아홉 살의 유섬이는 거제도 관비가 되었다.

▲ 유섬이 묘 입구. 유섬이 묘소는 2014년 5월에 발견되었으며 현재 거제성당에서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묘 주변 정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유섬이 묘. 앞의 ‘유처자묘(柳處子墓)’라 새겨진 비석은 그녀가 사망한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두 동생과도 생이별한 유섬이의 기구한 삶은 어떠했을까? 최근 거제도에 귀양온 이 유섬이의 생활을 추론할 수 있는 기록이 교회사 연구자인 하성래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것은 유섬이가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 거제부사를 지낸 하겸락(河兼洛)의 문집 『사헌유집(思軒遺集)』에 담겨있다. 부사 하겸락이 남긴 유섬이의 거제도에서의 행적을 보면, 처음 유섬이가 섬에 유배왔을 때 읍에 사는 노파가 유섬이를 수양딸로 삼아 기르며 바느질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녀는 평생을 다른 사람과 말하거나 웃지 않고 발길이 문밖을 나가지 않고 날마다 바느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관노 무리가 감히 그녀를 관비로 대하지 못했다. 또 남편을 얻게 되어 자식을 낳게 되면 그들도 자신처럼 노비가 되어 고초를 겪을 것이라 여기고 모든 중매를 거절하였고, 순결을 지키기 위해 항상 한 자 길이의 칼을 지니고 다니다가 71세의 나이로 1863년(철종 14)에 사망했다고 한다.

다산은 유배온 부녀자 가운데 꽃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절개를 지키며 산 여성들이 많다고 지적하며 그녀들의 삶을 담은 ‘홍사(紅史)’, 즉 여성사 이야기책을 한 부 지을 계획을 가졌다고 밝혔다. 만약 다산이 의도한 대로 책을 남겼다면 평생 동정(童貞)을 지키며 당찬 여성의 삶을 산 거제도의 유섬이 이야기가 그 한 페이지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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