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정치적 검열 멈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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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정치적 검열 멈춰야
  •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 승인 2020.11.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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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여성가족부가 선정하여 일부 초등학교, 한부모 가족 등에 배포한 ‘나다움’(나다움을 찾는 어린이 책 교육문화사업) 도서가 국회에서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했다고 지적당하면서 배포한 책을 회수하는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다. 사업을 함께 하던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논란이 일자 사업에서 아예 빠지겠다고 밝혔다.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포항남‧울릉)은 8월 25일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 4권의 책이 조기 성애화와 동성애 미화 등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는 이 책들을 포함해 총 7종의 책을 회수하기로 곧바로 결정했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페르 홀름 크누센 지음)는 1971년 덴마크에서 발간하여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 상을 받은 유아 성교육 책이다. 아이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것이 지적 사항이다. 회수 대상 도서 중에는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가 추천한 ‘우리 가족 인권 선언’ 시리즈도 들어 있다. 이 목록의 선정에는 도서위원회와 자문위원회에 총 13명의 각계 전문가가 참여했고, ‘성인지 감수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아 세부적으로 ‘인물의 개성이 성별 고정 관념으로 결정되지는 않나요?’ 등 26가지 질문에 결격 사유가 없는 책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도서 온라인 커뮤니티 등 맘카페를 중심으로 이 책들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초 문제 제기를 한 보수 성향 단체들(펜앤드마이크TV, 개신교 보수 단체인 나쁜교육에분노한전국학부모연합)이 가세해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김병욱 의원의 국회 발언 이후 하루 만에 졸속 수습안으로 내세운 것이 문제 도서의 ‘회수’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덴마크 초등학교 교재에 실린 내용인데, 50년이 지난 오늘날 보건과 금욕 중심의 학교 성교육을 여전히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김병욱 의원의 지역구 여성 단체인 포항여성회는 “시대착오적인 성 개념을 즉각 철회하고, 여성가족부는 ‘나다움 어린이 책’ 사업을 소신 있게 추진하라”고 성명서를 냈다. 출판사들의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도 정부는 도서 회수를 취소하고 즉각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여성가족부의 ‘나다움’ 어린이 책 사업은 모든 사람이 성별, 연령, 장애 유무, 성적 지향, 인종, 종교 등에 상관없이 인권을 누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에서 문제를 삼은 책들 역시 이미 오래전부터 시중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책들이며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거나 시민 독서단체인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추천 도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책을 통해 성별 고정 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 아닌 ‘나다움’을 배우고 찾아가도록 돕겠다는 취지의 이 사업은 2018년 12월 여성가족부, 롯데지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함께 맺은 업무협약에 따라 추진되어왔다.

우리나라의 학교 성교육은 수십 년 전과 다름없이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학교 현장의 목소리다. 아이들은 변했는데 학교만 그대로라는 것이다. 2007년에는 보수 개신교 단체들이 생식기가 묘사된 보건 교과서의 삽화 등을 문제 삼으면서 내용 수정을 거친 적도 있다. 그리고 보수 단체들은 학교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비치 도서를 문제 삼은 적도 있다. 사회 일각의 과도한 주관적 재단도 문제다. 이번에 회수가 결정된 책 중에는 『나는 토펭이!』란 책이 있다. 토끼와 펭귄 사이에서 태어난 토펭이가 따돌림을 당하지만, 토끼와 펭귄의 장점을 살려 늑대를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다문화 시대에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을 깨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보수 시민단체는 “수간을 정상적으로 생각하게 한다”며 상식 이하의 문제 제기를 했다.  

출판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 지식을 나누는 수단이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가결한 권리인 것은 특정한 이념이나 주관성에 따라 특정한 생각이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중국처럼 모든 책을 출판 전에 검열하는 나라도 있지만, 어떤 책의 학교나 도서관 비치 여부를 특정인들의 주장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독자 일반의 필요성에 따른 책의 자유로운 유통을 가로막고 학교와 도서관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여성가족부도 사업을 위한 책 선정에 민간 위원들을 선임했으면 그 결과를 존중하고 외부 압력에 대응할 정도의 맷집은 있어야 한다. 이러니 부처 폐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책 수행이 중요한가, 아니면 특정 이해 집단의 의견이 더 중요한가. 이번 사건은 국제적 수준에 한참 미달인 한국의 성인지 감수성 정책의 한계와 정부 도서 선정 정책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지난 10월 2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배현진 의원(국민의힘)이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 ‘BOOK(北) 읽는 풍경’ 전시회에 출품된 국내 도서에 대해 ‘북한 미화, 찬양’ 운운한 것도 마찬가지다. 배 의원이 문제 삼은 『남북통일 팩트 체크 Q&A 30선』은 어린이의 시선으로 북한을 살피고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는 내용의 초등학생용 교양서다. 책 내용 전체를 살피지 않고 특정 부분을 편집해 문제를 삼은 것이다. 때문에 어린이 책을 색깔론과 정쟁 수단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책에 대한 가치 판단은 독서 시장에서 독자들에 의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특정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나서서 양서와 악서를 구분해 주기를 바라는 국민은 없다. 정치인이 검열관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출판의 자유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정치인은 산적한 민생 현안이나 제대로 챙기기를 바란다. 책과 관련해 정치인이 할 일이 있다면 함께 읽을 만한 좋은 책을 SNS 등으로 소개하는 일이다. 책을 몰아내는 정치가 아니라 책을 끌어들이는 정치를 하라.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로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겸 출판정책연구회장, 일본출판학회 정회원이다. 대학에서 출판문화론 등을 강의한다.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화체육관광부 규제개혁위원, 서울도서관 네트워크 위원장, 경기도 지역서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출판산업사』를 썼고, 옮긴 책으로 『서점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책』, 『책의 소리를 들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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