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
상태바
허윤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0.11.08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영택의 그림이야기]
▲ 허윤희_꽃, 종이에 아크릴릭, 2020
▲ 허윤희_꽃, 종이에 아크릴릭, 2020

허윤희의 근작은 모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주목이고 애도에 해당하다. 수직으로 직립한 도시의 건물들과 북극 빙하들이 함께 녹아 무너지는 장면을 그린 목탄 드로잉과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꽃을 정면에서 응시해서 그린 그림이 그것이다.

이 두 작품 모두에는 지구온난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해 초래하는 절멸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가 스며들어 있다. 목탄화는 작가 신체의 흔적, 시간이 상당히 격렬하게 얼룩져있다. 수없이 그리고 지우기를 거듭한 과정이 축적되어 솟아오르는 화면은 작가가 지닌 여러 단상들, 물음과 성찰로 비벼져 있다. 반면 화면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꽃은 하나의 머리로 다가온다. 그것은 힘껏 발아한 제 머리를 대책 없이 보여주면서 자신의 핵, 중심, 옴파로스를 그대로 벌려놓는다. 꽃의 주위에는 이른바 영기와도 같은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꽃의 머리에 근접해서 온전히, 정성껏 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을 저마다 다른 고유한 누군가의 얼굴처럼 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것은 천진하고 소박하며 더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형상과 색채를 꾸밈없이 구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목탄 드로잉 작업은 자연에서 추출한 재료를 통해 자연의 희생을, 그 사라짐을 역설적으로 다시 보여준다. 동시에 목탄드로잉은 시간의 소멸 과정과 행위의 덧없음을 누적시킨다. 이 고임은 지나간 우리들의 생애 같아서 감출 수도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있으면서도 없는 상태로 겹쳐있다. 그 모든 층을 다 드러내는 것이 또한 목탄드로잉이다. 아울러 이 목탄화는 작가의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단상을 그려내는데 있어서도 효과적인 편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급속히 녹아 흐르는 북극 빙하와 그로 인해 우리들 삶의 근거도 박탈되리라는 불안과 공포를 거의 지워지고 흐려진 자취로만, 먼지와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현상으로만 안겨준다.

아크릴로 그린 꽃 그림은 이전의 ‘나뭇잎 일기’ (2008~2019)작업의 연장선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거의 매일 자신이 수습한 낙엽, 잎사귀 하나하나를 공들여 그리고 이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적었다. 이는 <나뭇잎 일기>(궁리, 2018)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소소하지만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한 생명체에 대한 경외의 시선과 함께 일상의 의미를 새삼스레 숙고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일상의 삶과 그림 그리는 일의 경계가 지워지고 삶과 미술의 구분도 사라지면서 이루어진 이 작업은 일상에서 느리게 걷고 소요하면서 비로소 발견한 것들, 그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일, 그리고 이를 공들여 그로 인해 떠도는 단상을 지극한 마음으로 기술하는 일이 두루 얽혀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라지는 것, 죽은 것을 환생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미지를 빌어 그것의 존재성을 불멸의 것으로 대치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이미지의 근원에 자리한 욕망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뭇잎 일기 그림과 최근 꽃을 그린 그림을 통해 사라지는 것, 생명의 주기, 그리고 살아있음에 대한 복잡한 작가의 여러 단상을 은밀히 만난다. 작가는 『녹색평론』 잡지를 통해 자연과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였고 식물 답사를 통해 멸종되어 가는 식물과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심은 작가의 독일유학기의 작업에서도 어느 정도 검출된다. 나뭇잎일기 작업을 통해 이것이 보다 심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미술에서 자연/식물은 동·서양 모두에서 항구적으로 다루어진 소재, 주제였다고 본다. 특히 동북아시아문화권은 전통적으로 자연(식물성)이 핵심적인 서화(미술)의 주제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식물성에의 천착과 그 의미망은 급속히 망실되었다. 근대는 자연,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환경을 재편시켰다. 도시는 그 공간에서 사는 이들에게 계절의 변화와 무관한 작업 활동을 강요했는데 이는 계절의 리듬과 대지에 종속된 농부의 노동과는 상이한 삶/노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땅에 맡겨진 존재의 느린 성장, 불확실성, 참을성, 기다림을 낯설게 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세계에서 대지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 모든 것을 숫자로 대체하는 디지털 세계는 몸의 현실적 느낌을 탈각시키고 인간화, 주체화를 소멸시키며 결국 땅을 사라지게 한다. 사실 존재는 이야기고 역사이자 기억이며 그래서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인식이 아니라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한병철은 “세상의 디지털화에 직면하여 세상을 다시 낭만화하고, 땅을, 땅이 시를 다시 찾아내고, 땅에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되찾아주어야 할 것”(『땅의 예찬』, 2018)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식물/정원에 주목한다. 우리 인간은 꽃이 피는 거의 유일한 행성인 지구에서 산다는 것, 그러한 ‘행성의식’이 필요하며 따라서 우리는 그 꽃을 피우는 땅의 마법, 신비, 수수께끼에 경탄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현실성을 빼앗고 그저 작은 창으로만 한정시키는 디지털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고 현실감각을 찾기 위해 우리는 다시 자연으로, 식물로, 정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은 물론 새롭지 않다.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인들, 우리 조상들은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및 삶의 이치를 무엇보다도 ‘식물성의 세계’를 통해 깨달았다. 동양인들의 시유구조의 근간이 바로 식물이었고 그림의 소재 역시 식물을 그리는 일이었으며 인간은 궁극적으로 식물/식물성이 되고자 열망했다고 본다. 자연 현상을 깊이 체득하고 경험하며 그 생명의 이치를 깨달아 인간의 영역 안으로 밀어 넣고자 했던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서로 유기적 관련 속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견해가 바로 생태적 사고다. ‘생태’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활하는 상태, 즉 어떠한 존재가 유기적이고 포괄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상태이자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생태는 몸과 욕망의 문제이며 몸과 욕망의 상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태론의 시각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면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관계의 그물 안에서 제 몫을 다하며 서로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윤희의 그간의 작업들은 자연, 식물이라는 타자를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나뭇잎일기’와 ‘사라져가는 얼굴들’ 시리즈가 나로서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그림들이다. 드로잉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그리기와 자기 몸을 적극적으로 투사하며 이루어지는 작가의 작업은 자신이 지닌 자연과 식물에 대한 사유를 그리기를 통해 구현하려는 지난한 몸짓으로도 보인다. 표상(재현)을 벗어나려는 생명을, 매순간 살아 숨 쉬는 그것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그리기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자연은 생명과 생명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기에 그렇다. 우리의 생명과 영성에 공기를 공급해주며 아름다움을 비로소 자각하게 해주는 그 식물, 자연에게 생긴 일을 잊지 않으려는 작은 몸짓이자 발언이기도 하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