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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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11.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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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제 20강>_ 박승찬 가톨릭대 교수의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주제 4. 서양 고전과 그 역사적 의미 – 기독교’ 제 20강 박승찬 교수(가톨릭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박승찬 교수는 그리스도교 정전들이 “서양 문명의 두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융합 안에서 형성되었다”라고 하며 “그리스도교 정전이 확정된 시기의 문화적 배경과 형성 과정, 그 안에서 이루어진 역동적인 변화에 집중”하여 살펴본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이 “진리 추구와 인간성 함양이라는 목표에서는 일치했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과 방법에서는 차이가 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긴장 관계가 발생했고, 이후 다양한 단계를 거쳐” 점차 융합되어갔다는 관점에서 성경의 정경화 과정을 그려 보인다. 그를 통해 이어지는 중세 시대의 철학이 “다른 어떤 시기에도 볼 수 없던 ‘세계의 질서’에 대한 확신”을 특징으로 하면서 “성경을 토대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공동체의 목표로 추구했다고 이야기한다.

▲ 지난 9월 19일, 박승찬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9월 19일, 박승찬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2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그리스도교의 정전으로서 압도적 위치를 지니고 있는 ‘성경’과 이로부터 파생된 작품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형성되고 발전해 나온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교 정전들은 서양 문명의 두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융합 안에서 형성되었다. 본 강연에서는 그리스도교 정전이 확정된 시기의 문화적 배경과 형성 과정, 그 안에서 이루어진 역동적인 변화에 집중해보겠다. 이어지는 ‘중세’ 시기에는 성경을 토대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공동체의 목표로 추구되었다.

1.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첫 만남

그리스도교 태동 당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로마는 자신들에게 점령된 그리스의 높은 문화와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당시 주류이던 ‘그리스 로마 문화’의 만남은, 서로 다른 고등 문화의 만남이 그랬듯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인생관, 자연관을 비롯하여 종교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고대 철학의 영향을 받아오던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것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이 동등한 신의 자녀’라는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파하여 로마 제국 전역에 불길처럼 빠르게 퍼져갔다. 이에 비해 일차적으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기를 원했던 고대 철학은 이렇게 분명한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런데 헬레니즘 시대에 철학은 한편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론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삶에 대한 실천적 진리를 제공하고 이와 동시에 인간성을 함양해가는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은 진리 추구와 인간성 함양이라는 목표에서는 일치했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과 방법에서는 차이가 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긴장 관계가 발생했고, 이후 다양한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융합되어갔다.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첫 충돌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의 하층민과 여성들을 거쳐 귀족층에게까지 퍼져나가자 정치가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본래 속죄, 구원,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실제로 신에게로 걸어가야 할 길을 실천적인 진리로 제시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대의 사상 체계와 경합을 벌이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철학 체계는 아니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급속하게 퍼져 성장하면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정치가와 지식층에서도 혐오와 적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스 호교론자

일방적인 그리스 로마 문화의 공세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호교론자(護敎論者)’로 불리는 학자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전문적인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철학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지배적인 철학, 즉 그리스 철학에 이론적으로 의지했다. 그리하여 성경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내용을 명시적으로 밝히기 위한 논증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의 정전들로부터 빌려 온 개념과 범주를 사용했다.

이 호교론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4)다. 유스티누스는 물질세계를 벗어난 존재에 관한 플라톤주의의 학설을 높이 평가하여 그 존재를 신과 동일시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와 플라톤 철학은 사후의 상벌에 관해서도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씨앗을 품고 있었고, 그 씨앗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완전히 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참된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몰랐을지라도 그리스도 교도라고 불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유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리스적 지혜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수야말로 그 지혜를 완성한 자라 주장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추구·설명하려 했던 진리가 예수를 통해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플라톤주의자들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 가르친 일자(一者)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성부와 동일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호교론자라고 불리는 2세기와 3세기 초의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과 철학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었던 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계시를 위한 하나의 준비였다. 이렇듯 호교론자들에 의해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도교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2. 성경의 정경화 과정

호교론자들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친숙했던 그리스 철학의 정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지혜를 찾게 되었을까?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거쳐서 진리의 기준이 되는 정전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성령의 영감을 받아 신의 말씀을 기록한 책’, 즉 아무 수식어 없이 ‘책(biblia)’이라는 단어로 불린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저자를 특정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의 정전들과 달리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뿌리로부터 자라나왔는데, 유대교의 정전인 구약성경을 모두 자신의 핵심 근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정경이 확정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기원전 900년경부터 전승되어오던 다섯 가지 책인 소위 ‘모세 5경(Torah)’은 기원전 450년 에즈라(Ezra, BC 480~440) 시대 때 가장 중요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놀랍게도 요즘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예언서들은 기원전 2세기가 되어서야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셉투아진타(Septuaginta)’, 즉 70인역(LXX)이 번역된 사건이다.

70인역은 단순히 언어의 번역뿐만 아니라 어떤 책들이 정경으로서 번역될 가치가 있는가를 결정하는 작업과 함께 이루어졌다. 결국 그리스어로 번역된 46권의 책들은 ‘알렉산드리아 정경’이라고 불리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성장한 초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책들을 자신의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로마 제국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년) 이후, 정체성에 대한 위기를 겪던 유대인들은 단순히 관습에 의해서 읽어오던 구약성경들을 정경으로 확정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기원 후 90년경 팔레스티나의 얌니야(Jamnia)에서 종교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남아 있는 것들만이 정경으로 채택되었다(‘열왕기 상’, ‘열왕기 하’ 등을 통합으로 계산하면 24권, 분리해서 세면 39권). 후대 사람들은 이 성경을 ‘팔레스티나 정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정경’과 ‘팔레스티나 정경’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겨났다. 그리스어 번역본은 있는데 히브리어로 된 원본이 없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에 따라 이 책들을 ‘제2경전’이라고 부르며, 그리스어판 ‘알렉산드리아 정경’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원천,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팔레스티나 정경’만을 인정했다. 이렇게 되면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경에 차이가 나게 되었다. 개신교에서는 구약의 경우 히브리어로 된 팔레스티나 정경을 따르기에 39권만을 인정한 반면, 가톨릭에서는 그리스어로 된 알렉산드리아 정경을 따르므로 46권을 구약성경이라고 인정했다. 신약은 27권으로 양측이 동일하게 인정했기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더하면 ‘46+27’ 해서 73권, 개신교에서는 ‘39+27’ 해서 66권의 성경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3.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그리스 철학 수용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철학자와 수사학자는 자신들의 이성으로 얻은 지혜를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교를 위해 사용하려 했다. 이렇게 그리스 철학에 호의적인 학자들이 주로 활동한 곳은 70인역이 탄생했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였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의 종합을 위해 노력했다. 이 학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단지 이데아 세계의 모상이라는 플라톤주의의 세계관에 따라 성서의 말씀 뒤에 숨어 있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그리스의 서사시를 해석하기 위해 세속 학교에서 사용하는 주해 방법들을 성경 연구에 도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이 학파의 대표자 중 하나인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9?)는 철학자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진리는 부분적으로 신적인 지혜를 나누어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철학은 선한 신의 섭리에 따라 주어진 선물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이 어떤 유용한 목적을 위하여 창조한 자연 이성을 사용하는 예언자였다. 즉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를 철학과의 관계에서 보고 신학의 체계화와 그 전개에 있어서 사변적인 이성을 사용하려고 했던 최초의 그리스도교 학자였다.

오리게네스(Origenes)

일단 세속적인 교육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도입되자,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더욱 큰 조화와 협력을 위한 길이 열렸다.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가운데서 저작과 학식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었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철학을 철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학을 위해 사용하려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당시의 철학적인 문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심화하려 했다. 그가 사용한 비유 “신에게로 향한 영혼의 상승”, 즉 그의 상승 신학은 영혼이 신 안에 있는 자신의 근원으로 다시 올라간다는 것으로 플라톤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다.

한편, 오리게네스는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플라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조화시키려는 욕망과 성경을 우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열정으로 인해 후대에 확정된 정통적인 신앙과 일치되지 않는 몇 가지 내용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많은 제자와 적대자들이 자신의 이상을 토대로 그리스도교를 탐구할 수 있도록 신학의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바로 그가 채용한 철학적인 관념들이 그리스도교적인 배경과 테두리 안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리스도교 최초의 위대한 체계적 사상가로 평가될 수 있다.

4. 신앙을 위한 그리스 철학 거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정전들을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는 과정이 항상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매우 강력한 체계를 지닌 다양한 정전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바로 다양한 ‘이단(異端)’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그리스도교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밖에서 유래한 사상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왜곡시키거나 과장하게 된 것으로 간주된다. 영지(靈智, gnosis)는 그리스어로 ‘지식’을 뜻하지만, 영지주의에서는 영혼과 물질의 발생과 본성, 그 운명에 대한 구원론적인 지식을 뜻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의 계시로부터 구속자를 통해서 전달된 이런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에 버금가는 강력한 이단으로는 마니교(Manicheism)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난 마니(Mani, 216?~276)를 시조로 하는 이 이단은 불교, 배화교, 그리스도교 등에서 발견되는 요인들을 혼합하여 극단적인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마니교는 세상의 선은 선한 신에게서 유래하고 악은 악한 신에게서 유래한다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다. 시조인 마니는 악한 신의 세력이 극도로 커졌을 때 악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선한 신의 사자들이 출현하며, 사자들 중에서는 붓다, 예수 등이 유명한데 그중 가장 훌륭한 자가 자신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단은 신앙을 무분별하게 철학화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요소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단이 발생하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이들이 등장했다. 특히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열정적으로 신앙을 지켜온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철학이란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 악마가 발명한 것이므로 그리스 철학의 어떠한 매개 작용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 철학의 저서들을 결코 ‘정전’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5. 보편 공의회를 통한 그리스도교 정전의 확정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처음으로 공인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경배에 대한 자유를 얻었고 로마 제국 전체에 퍼져나갔다. 더 나아가 392년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 사상은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그리스 로마 문화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했다.

신약성경 정경의 확립

초기 그리스도교는 아직 신약성경을 알지 못하고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을 듣고 미사를 드렸다. 오순절의 교회 설립 이후 30여 년이 지나서 예수의 생애와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사라져가자 이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개별 공동체의 특성이 담긴 4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와 사도행전이 집필되었다.

영지주의를 비롯한 일련의 이단이 등장함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을 담은 정경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2세기 말,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교부들이 정경의 기준을 마련했는데, 역사적으로 사도 또는 사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기록한 책인가, 영적으로 그 감화력이 사도들의 것과 동일한 참된 교리인가, 교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는가 등 세 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오리게네스는 이 기준에 따라 정경과 위경을 구분했다. 367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신약성경 27권이 모두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397년 카르타고 종교 회의에서는 27권 전체와 성경 목차가 확정되었다.

확정은 이렇게 늦어졌지만, 신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책들은 교회 회의의 인준으로 정경화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성경으로 읽어온 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정경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거친 것”이었다.

보편 공의회를 통한 정통 신앙 고백의 확정

정통 교리가 정립되는 과정에서도, 그리스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된 오류들이 등장했다. 그리스도교 내에서 가장 강력한 이단 논쟁을 야기한 것은 아리우스(Arius, 260?~336)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원리를 이용하여 불명료하게 남아 있던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을 명백히 해석하고자 했다. 아리우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일자 개념을 그대로 성부에게 적용하여, 성부만이 모든 것의 근원이며 시작도 없고, 창조되지 않고, 따라서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한 분의 신이라고 주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자는 태어났으며, “성자가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명백히 피조물 자리에 놓여야 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수용한 철학적 체계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우스와 관련된 논쟁이 격해지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의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이급 신이 아니라, 참 하느님이며, 결코 피조물이 아니다. 서서히 니케아 신경의 중요성과 정통성이 인정되자, 이번에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불붙었다. 성령이 거룩한 신적인 위격에 들어가는 것을 부인하는 성령 적대론자를 반박하기 위해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 즉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라는 친구 및 형제 관계로 절친하던 세 학자는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삼위일체론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시도한 이들은 오리게네스를 이어받으며 당대의 학문적 지식들을 종합하여 받아들였다. 이로써, 신에 대한 지식, 교양 교육, 그리스도교 인간론 등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마지막 보편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인 삼위일체, 즉 하나의 실체에 세 위격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 위격이라고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교의 형식과 그것을 수용한 새로운 그리스 로마 문화는 알렉산드리아학파 등의 공헌에 힘입은 대화를 통해 양자 모두가 변화했다. 어느 편도 그들의 영혼을 잃지 않았으며 대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중세 철학이 나타난 것이다.

6. 신의 [초월적] 질서에 따라 바라본 세계와 인간

중세 철학을 포괄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어떤 시기에도 볼 수 없던 ‘세계의 질서’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스도교는 물질도 신에게서 창조되었다고 믿음으로써 정신적인 요소는 물론 물질적인 요소까지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통합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보았지만, 신과 다른 피조물들의 중간자적인 존재라고 여겼다. 그러나 중세인들에게는 신 앞에 서야 할 개인들의 구원이 중요했다. 따라서 중세인은 진정한 행복은 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완성되며, 자신들은 모든 피조물을 신의 뜻대로 관리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인간 사회를 관장하는 법률의 타당성도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자연법에 근거하고 있을 때만 인정되었다. 이러한 자연법은 신적 이성과 동일시되는 영원법 안에 자신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 더 나아가 국가 권력도 정의를 실현하려는 신의 뜻에 따라 권력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상에서 신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중세인이 지니고 있던 통일된 세계관과 질서에 대한 추구가 반드시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는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 보편과 개체의 중요성, 신 존재 증명의 가능성, 윤리 기준으로서의 지성과 의지의 문제 등을 살펴보면, 중세는 결코 획일화된  세계가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생각이 뚜렷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다채로운 세계였다.

이러한 다양성은 동시대에 벌어진 토론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변화 안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가 만난 교부 철학기에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다양한 이론이 난무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가 종합한 중세 철학의 거대한 사상 체계는 본격적인 꽃을 피우기 위해 8세기까지의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카를 대제(Carolus Magnus)의 문예 부흥과 다양한 학교의 설립으로 스콜라 철학에서 나타난 지성의 봄은 문법학과 논리학의 발전, 다양한 학문 방법론의 개발을 통해 본격적인 발전을 준비했다.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통해 맞게 된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13세기)는 가장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지적인 여름에 비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14세기 들어 시작된 자연재해와 인간이 저지른 무질서들로 말미암아 찬란했던 중세 전성기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고대하는 가을로 접어들고 말았다.

7.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중세의 정전들

서양 중세를 거치면서 이미 정경으로 확정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73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활용한 다양한 저술들이 새로운 정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본격적인 중세 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현세에 관심을 보이는 그리스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를 성경에 나오는 초월적인 관점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해 보였던 것이 바로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였다.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그리스도교를 성공적으로 융합한 것으로 인정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의 다양한 저술은 중세 기간 내내 정전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밖에도 스토아학파의 세속을 떠나는 금욕 정신,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윤리 사상은 그리스도교와 잘 융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수용 과정은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과 다양한 작품들에 잘 나타나 있다. 스콜라 철학의 태동기에는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자연의 구분론』,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저술한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을 비롯한 다양한 신학 작품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정전의 지위에 올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리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교부들이 볼 때 단편적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은 지나치게 생명력이 없었고, 그의 윤리학은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제한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역할은 12세기부터 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란 번역 운동을 통해서 완전히 변화되었다.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은 정전으로 인정받았다. 13세기 융성기를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이라는 서구 지성사의 금자탑을 세웠지만, 그 외에도 대 알베르투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 등의 작품들은 막대한 영향력을 지녔다.

이렇듯 유대교로부터 발전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인의 철학이라는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서 중세 철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함께 사람들은 얻을 수 있는 모든 진리를 포괄하려는 야심을 지니게 되었고, 이런 야심이 이후의 중세 철학, 특히 13세기에 꽃을 피울 스콜라 철학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어떤 철학을 수용해서 성경을 설명하는지는 차이가 있지만, 중세 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과제는 역시 ‘신앙과 이성의 조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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