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중국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 학술회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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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중국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 학술회의 개최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0.11.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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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 1990년대 이후 고대사 만들기 프로젝트는 애국주의 강화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 중국에서는 신화상의 인물을 문헌 자료와 고고 유적을 활용하여 역사화하는 방식으로 중국 고대사를 신석기 시대까지 확장
- 황제, 염제, 요, 순, 우를 중심으로 애국주의와 결합된 중국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을 들여다본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2020년 동북아 역사·영토주간> 행사의 일환으로 10월 22일(목)에 <중국 애국주의와 고대사 만들기>를 주제로 재단 소회의실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중국은 과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이 약화됨에 따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 관련 연구와 애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 애국주의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국가주의, 사회주의, 중화민족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역사학은 중국 애국주의의 핵심 분야다.

중국은 신화상의 인물인 황제, 염제, 요, 순, 우를 신석기 혹은 청동기 유적과 연계시켜 역사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들 신화상의 인물이 고문헌자료와 고고유적과 연계되어 전설이 역사화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중국학계의 관련 연구지형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김인희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은 “중화민족 공동 조상의 탄생, 황제: 역사와 신화의 변용과 증폭의 과정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황제가 춘추 시대 말기 문헌에 등장한 이래 신화화와 역사화 과정을 반복해서 거치며 의미가 증폭되었으며, 현재는 애국주의 강화를 위해 역사화와 신화화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표했다. 특히, 중국학계 일각에서는 황제가 신석기 시대 국가를 건설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주나라 왕을 모델로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배현준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은 “중화문명의 뿌리를 찾는 시작점, 염제”라는 제목으로 황제와 함께 중국(중화) 문명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염제 관련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고,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이 서로 접목되어 역사적 실체로 구체화 되는 원리에 대해 발표했다.

심재훈 교수(단국대)는 “요순우의 본향 산시성(山西省), 그 오도된 역사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요, 순, 우의 본향으로 알려진 산시성에서 이들이 뿌리내리는 계기와 과정, 즉 “전설의 역사화”라는 역사 만들기의 흥미로운 한 궤적에 대해 발표했다.

이유표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은 “우와 하의 만남: 현재를 위한 ‘역사’”라는 제목으로 ‘역사와 전설’, ‘역사와 고고’, ‘역사와 애국주의’라는 틀 속에서, 소위 ‘중화제일왕조’인 하나라가 과거에 어떻게 설정되었고, 현재 어떻게 인식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 지에 대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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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발표자의 발표 내용 중 주요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 김인희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 “중화민족 공동 조상의 탄생, 황제: 역사와 신화의 변용과 증폭의 과정에 대한 고찰”

춘추 말기에서 전국 초기 황제는 문헌에 등장하는데 이 시기 황제는 주나라 왕을 모델로 하였다. 이후 황노학파에 의해 인문시조, 즉 신화화 과정을 거쳤으며 다시 한나라에 이르러 사마천에 의해 역사화되어 제왕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황제는 역사적 성격과 신화적 성격이 공존하며 전승하다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시기 한족의 혈연적인 조상으로 신화적 성격이 강화된다. 민국 시기 정치가들에 의해 제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봉건미신으로 탄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르러 황제에 대한 평가는 급반전 하였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와 경제 체제의 부조화를 중국 정부는 이데올로기 상징조작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등장한 것이 애국주의였고 황제는 애국주의 강화를 위해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황제는 두 가지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발달한 문명을 창조한 한 역사적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으로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전 이민의 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황제를 역사적 인물로 정립하기 위해 중국 신석기 유적들이 동원되었다. 결국 황제의 생존 시기는 기원전 6,000년의 페리강문화부터 기원전 2,000년의 치자문화까지 무려 4,000년을 포괄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제문화가 분포하는 지역은 허난성 일대의 페리강문화와 양샤오문화, 내몽골 일대의 훙산문화, 산둥성(山東省) 일대의 다원커우문화와 룽산문화, 창강 중류의 초문화, 간쑤성(甘肅省) 일대의 치자문화 등으로 중국 전체가 황제의 발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최초의 문헌인 <여형>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황제는 서주 초기 왕을 모델로 형성된 것이다. 황제는 역사가 신화화한 결과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은 서주 초기(B.C.11세기~B.C.10세)다. 이는 중국학계가 주장하는 신석기 시대와는 현격한 편차가 있다.

황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여형>편을 중국 학계에서는 황제 연구에 활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유용한 기억은 강화하고 유용하지 않은 기억은 망각하는 방식으로 황제의 역사가 만들어져 왔음을 말한다. 유용하지 않은 기억의 구조적 망각 속에 황제는 중국 신석기 시기 인물이 되었으며, 중국 도처가 그의 활동지가 되었다. 황제는 너무나 긴 시간, 너무나 많은 공간에 출현함으로써 스스로 역사가 아님을 증명하게 되었다. 결국 과욕은 화를 불러 황제는 실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낳았다. 

▲ 중국이 허난성 정저우시 황허(黃河)변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염황상'. 신화 속 인물인 염제와 황제를 역사적 실존 인물로 둔갑시켰다. /김인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중국이 허난성 정저우시 황허(黃河)변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염황상'. 신화 속 인물인 염제와 황제를 역사적 실존 인물로 둔갑시켰다. /김인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학문적으로 황제의 역사를 증명함과 동시에 황제를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정립하는 집단기억 강화작업도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집단기억은 정체성이 다른 성원들이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추상적 신념을 제공한다.

현재 중국 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과 마찰, 경제적으로 빈부격차, 정치적으로 사상대립, 56개 민족의 통합 등은 정치적 안위와 연결된 현실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 통치자들은 황제를 공통의 조상으로 하는 족원기억을 중화민족이라 지칭되는 새로운 군체가 믿게 하고자 하였다. 황제에 대한 숭배는 경계의 바깥에 있는 야만을 배척하고 중화민족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여 통치에 유리한 기반을 제공한다.

하나의 조상의 후손이라는 집단기억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정부 주도 각종 공공 기념물이 세워졌으며 성대한 의례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황하변에 염화거상이 세워질 때 먀오족을 비롯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은 우리는 “중화민족이기는 하지만 염황의 후손은 아니다”라고 반발하였다. 결국 중국 정부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줘루현에 황제, 염제, 치우를 중화민족의 공통 조상으로 모시는 중화삼조당을 건립하였다.

현재 황제는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역사적 실존도 학문적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황제를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만들어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한 중국 정부의 정책은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 배현준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 “중화문명의 뿌리를 찾는 시작점, 염제”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일컫듯이 중국 역시 자신들을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일컫고 있다. 이 염제와 황제는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삼황오제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 혹은 집단을 말하는데, 과거에는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이들을 실제로 존재한 인물 또는 집단으로 구체화하는 경향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중국은 전설 속의 나라로 여겨졌던 하나라와 상나라를 고고학 조사를 통해 발견된 다량의 갑골문과 관련 유적지를 근거로 이미 실존했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하상주로 대표되는 소위 ‘국가 단계’ 이전에 존재하였던 중화민족의 근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근간을 이루는 인물 또는 집단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2018년 ‘중화문명탐원공정’이 공식적으로 완료되면서 중화 5000년의 역사를 인정하고 중국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공격적인 실체화를 진행하고 있다.

국가 단계로 여겨지는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는 기본적으로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보다 앞선 시기인 삼황오제 시기는 신석기시대가 될 것이며, 신석기시대의 문화양상이 이미 발달된 문명화 단계에 진입했다면 삼황오제를 단순히 전설 속의 만들어진 허구라고 마냥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 중국학계의 기본 인식이다.

삼황오제의 삼황과 오제에 해당하는 인물 또는 집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삼황은 복희-수인-신농(염제), 오제는 황제-전욱-제곡-당요-우순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중 고고학적으로 문명화의 전제가 되는 불평등사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단계가 염제와 황제 시기인 것이다. 황제 시기는 이미 소위 ‘중국 문명’이 형성되었다면 염제 시기는 문명 형성의 기원이 되는 시기이다. 때문에 염제와 황제가 존재했던 시기를 중국 문명 형성기의 관건이 되는 시기로 보고 ‘염황시대’ 또는 ‘염황문화’ 등 고유명사처럼 사용한다. 동시에 민간에서는 이들과 관련된 사당과 무덤을 건설하고 조상숭배의 제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한편, 중국 문명의 형성과정과 조상숭배 사상은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중화민족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민족이 얽혀 살아가는 중국사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제가 된다.  

▲ 앙소문화 무덤과 유물. 현재 중국학계에서 염제와 관련시키는 고고학문화는 신석기시대 후기의 앙소문화(仰昭文化)이다.  /배현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앙소문화 무덤과 유물. 현재 중국학계에서 염제와 관련시키는 고고학문화는 신석기시대 후기의 앙소문화(仰昭文化)이다. /배현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염제와 황제는 형제관계이고 이 둘은 중화민족의 시조로 여겨진다. 염제는 신농과 결합되어 삼황시대를 대표하게 되고, 황제는 그 다음 시대인 오제시대를 대표한다. 문헌 속에서 염제의 실제 출현이 전국시대 이후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염제로 대표되는 부족은 전국시대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실재했지만, 문헌에 늦게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학계에서는 염제 관련된 기록이 허구일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훨씬 과거부터 사람들의 기억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허구로만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염제에 대한 일말의 실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고고학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염제 관련 문헌에서 보이는 농업으로 대표되는 사회와 신석기 후기의 사회가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새롭게 발견되는 고고학 자료들과 연구결과는 중국문명이 생각보다 이른 시기부터 출현했을 가능성을 보다 높여주고 있다. 과거 중국의 역사를 청동기시대의 하나라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던 관점이 신석기시대의 황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변화하여 5000년 중화문명이 실재하였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그 보다 이른 염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중화문명의 역사가 훨씬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곧 중국인의 자긍심으로 이어져, 중국 내 다양한 민족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 유용하게 사용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최근 ‘중화문명근계연구(中華文明根系硏究)’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한다. 염제의 역사화를 통해 그 동안 오제시대보다 더 신화시대로 여겨졌던 삼황시대의 역사화에 대한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염제 이전 시기에서 중화문명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즉, 염제가 중화문명의 뿌리 찾기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고 중국 내에서 염제의 역사화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일조하고 있다. 최근 시진핑은 유래없이 중국고고학의 강조하기도 하였다.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을 비롯한 국외 학계의 동의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 심재훈 교수(단국대): “요순우의 본향 산시성(山西省), 그 오도된 역사 만들기”

중국처럼 고대 이래의 문헌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은 거의 없다. 더욱이 20세기 이래 지속적으로 추가되고 있는 甲骨文과 金文, 楚簡 등의 출토문헌 역시 그 전례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풍부한 자료는 한편으로 그 고대사 서술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고대 이래 전승된 문헌 기록들의 전설적 속성이 초래할 수 있는 과도한 역사 만들기라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최초로 본격적으로 인식한 이들은 淸代 고증학의 세례를 받은 이른바 疑古派 혹은 古史辨派였다. 20세기 전반 顧頡剛을 비롯한 疑古派의 눈에 비친 堯舜禹는 신화전설상의 존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중국의 방대한 고고학 성과는 지나친 疑古 사조에 대한 반발과 함께 信古 경향을 대세로 자리매김하며 堯舜禹의 역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기원전 13~11세기 商 후기의 갑골문에는 전통시대 중국학자들이 堯의 나라로 굳건히 믿었던 唐 혹은 昜이 山西省 서남부의 정치체로서 나타난다. 戰國시대 이전의 자료에서 그 唐(昜)과 堯의 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갑골문보다 700~800년 이후의 楚簡 문헌에는 堯舜의 禪讓 故事와 함께 唐堯의 존재가 부각되어 나타난다. 갑골문과 楚簡의 唐을 동일시 할 수 있을지 여부와 상관없이 楚簡 문헌에서 이 唐堯와 山西省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 연관성을 전하는 최초의 자료는 楚簡과 마찬가지로 전국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左傳』이다. ‘昭公 元年’의 한 故事에서 춘추시대 山西省 서남부 晉의 지역은 唐堯까지 소급될 여지뿐만 아니라 夏나라와의 연관성까지 지니는 지역으로 거듭난다.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지닐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記言 위주의 楚簡 故事와 마찬가지로 『左傳』의 주종을 이루는 記言 故事 역시 그 유사역사적 작위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근래에 늘어나고 있는 楚簡의 故事類 문헌들을 통해 전국시대 다양한 역사 만들기의 양상을 감지한다. 물론 淸華簡 『繫年』이나 『楚居』, 『良臣』과 같은 記事 중심의 楚簡 문헌들이나 『左傳』에도 수록된 도덕적, 교훈적 요소가 결여된 상세하고 일면 지루하기까지 한 記事들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닐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전국시대 유행하여 역사류 문헌의 주종을 이루는 記言 위주의 逸話들은 대체로 그 이전까지 전승된 상고시대의 정치체나 그 통치자들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뼈대로 다양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덧붙여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러한 교훈적 유사역사 일화들은 전국시대 이래로 반복적으로 변용되며 활용되었는데, 역시 교훈적 측면을 중시하다 보니 그 역사적 사실성 여부는 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漢代 이래 經典이 중시되고 正史 서술이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이러한 일화의 중요성이 감소되기는 했지만, 고대 이래 전래된 일화의 상당수가 이미 정확한 역사 지식의 토대로 수용되어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左傳』 ‘昭公 元年’의 이야기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山西省과 堯(舜)禹를 연관시키는 계기를 제공했지만, 그마저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수용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전한시대의 지리를 다룬 『漢書』 「地理志」는 『左傳』에 언급된 晉의 시조 唐叔虞와 唐堯의 오도된 연관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체현된 장에 대해서는 唐叔虞의 分封地와는 전혀 무관한 太原 지역으로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堯와 관련하여 山西省의 두 지역만을 주목했을 뿐, 『左傳』에 나타난 夏와의 관련성을 차용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山西省과 舜禹의 관계 역시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다. 당시 45개 縣의 역사 역시 대체로 춘추시대 이전으로 소급되지 않는다.

후한시대 이후 山西省의 다른 지역과 堯舜禹의 관련성이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했고, 위진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를 거치며 山西省 서남부와 太原 일대는 堯舜禹 관련 사적이 부각되며 祠廟나 陵墓까지 조성되었다, 唐代 편찬된 『元和郡縣志』와 北宋代의 『太平寰宇記』에 그 확산 양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미 山西省의 10여 지역 이상이 堯舜禹의 사적지로 확정되었으며, 그러한 관련성이 추가된 지역에는 이를 뒷받침하듯 새롭게 창출된 관련 故事가 동반하기도 했다.


明末 『(萬曆)山西通志』에도 그 확산이 지속되지만 淸代의 『(雍正)山西通志』에는 山西省 거의 전역에 堯舜禹의 祠廟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동안 거의 불모지대였던 山西省 동남부와 북부까지도 堯舜禹의 祠廟가 이식되었다. 이러한 확산에 堯舜禹의 陵墓와 역시 새롭게 창출된 관련 故事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60~70곳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雍正代 山西省의 堯舜禹 祠廟는 그 지역을 堯舜禹의 본향으로 확정시켰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 다룬 山西省에서 堯舜禹 사적의 창출과 확산은 고대 어느 시점에 새롭게 창작되었을 정합성이 결여된 이야기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수용되어 반복적으로 확대재생산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통시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堯舜禹 관련 역사를 서술했겠지만, 이 연구에서는 그 근거가 오인에서 초래된 것임을 역설했다. 사실상 역사적으로 소급 가능한 山西省의 첫 번째 군주일 가능성이 큰 晉의 始祖 唐叔虞에 관한 이야기가 堯舜禹의 그것과 달리 山西省에서 확대재생산 되지 못한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左傳에서 비롯되어 『(雍正)山西通志』까지 확대되어가는 山西省에서 堯舜禹의 역사 만들기는 “누층적으로 조성된 古史”라는 顧頡剛의 학설이 고대사 연구의 보편적 지침임을 입증한다. 信古의 강화로 중국에서 그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顧頡剛이 아직도 강조하는 듯한 “사료의 입체적 검토”는 고대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 모두 새겨야 할 경고임이 분명하다.


▶ 이유표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 “‘우’와 ‘하’의 만남: 현재를 위한 ‘역사’”

현재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이후 사회주의가 사회적 통제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후, 역사학을 ‘애국주의’ 교육의 핵심 분야로 인식, 이를 통해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바로 ‘애국주의’가 현재 중국 ‘역사’ 교육과 연구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학문적 범주 내에서 해석 불가능한 개념어지만, 중국은 이를 학문적 범주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夏’를 둘러싼 ‘전설과 역사’, ‘고고와 역사’, 그리고 ‘애국주의와 역사’, 이 복합적인 키워드를 그동안 ‘夏’와 관련된 연구사에 비춰봤을 때, 通時的으로 적용할 수 있지만, 각각 특색이 두드러지는 시기를 중심으로 범주화 할 수도 있다. 먼저 ‘전설과 역사’, ‘고고와 역사’는 1959년 二里頭 유적의 발견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에 각각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다시 말해, 二里頭 유적 발견 이전에는 전래문헌에 기록된 ‘禹’와 ‘夏’가 전설인지 아니면 역사인지를 둘러싼 ‘전설과 역사’ 논쟁이 주를 이뤘고, 그 이후에는 二里頭 유적으로 ‘夏’나라의 실재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지, 곧 고고자료로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논쟁이 전개된 것이다.

‘애국주의와 역사’는 학문적 범주에서 다룰 것은 아니나, 80년대 蘇秉琦의 ‘구계유형론(區系類型論)’, 費孝通의 ‘중화민족의 다원 일체 구조(中華民族多元一體格局)’, 그리고 90년대 이르러 李學勤의 ‘의고시대를 걸어 나오며(走出疑古時代)’라는 담론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어느새 학문적 범주 속으로 치고 들어오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夏商周斷代工程’(1996-2000)이다. 중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하’나라의 연대를 대략 기원전 2070에서 기원전 1600년으로 확정 짓고, 그에 상응하는 고고문화를 登封 王城崗 유적, 新密 新砦 유적, 偃師 二里頭 유적으로 설정하였다. 어떻게 보면 ‘고고와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학계의 이설을 반영하지 않은 채, 교과서와 박물관 등 교육 현장에 그대로 반영한 것은 결코 학문적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애국주의’라는 틀 속에서 ‘禹’와 ‘夏’를 이해하려고 할까? ‘禹’와 ‘夏’는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할까?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禹’, ‘夏’를 둘러싼 여러 개념어를, 곧 역사, 전설, 고고, 애국주의를 ‘역사’라는 개념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역사와 전설’을 통해 ‘우’와 ‘하’의 전승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역사화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어서 ‘애국주의와 역사’에서는 ‘夏文化’로서의 二里頭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려 하는 중국의 움직임과 중국 정부의 고고학에 대한 관심 등을 살펴보았다.

첫째, ‘禹’는 원래 周族의 신화적 혹은 전설적인 치수 영웅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春秋 시기에 이르러 九州 劃定의 고사가 더해졌고, 전국시기에 이르러 ‘黃帝’에서 ‘鯀’, ‘禹’로 이어지는 계보가 완성되었고, 이와 동시에 ‘堯舜禹’로 이어지는 禪讓, ‘大同’과 ‘小康’의 이상적 세계관 등이 결합되었다.

둘째, ‘夏’는 西周 시기에 처음 나타나는데, 사라 알란은 周가 商을 멸망시킨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夏’를 설정했다고 주장했다. 본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禹’의 전승이 ‘夏’와 결합된 까닭에 대해, 천하의 홍수를 불식시키고 구주를 획정한 禹의 영웅성이 周가 설정한 ‘夏’와 맞물리면서,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인 ‘夏’로 설정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다.

셋째, 二里頭 유적은 고대 중국 도시 계획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井’자형 도로망과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른바 ‘宮城’구역,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 잡은 청동기, 녹송석, 도기, 골기 공방과 종교 시설 등은 당시 二里頭에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전문적인 직업군이 있었고, 상업은 물론 이들에게 공통적인 종교 신앙도 존재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고, 또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공 권력을 지닌 지배 계층의 군림 또한 예측해 볼 수 있다. 

넷째, 고고학은 막연하고 건조한 역사적 상상력에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고고학의 만남은 우리가 역사로 구성된 ‘史實’에서 과거의 ‘事實’로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孫慶偉가 주장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다만, 二里頭를 연구하는데, ‘夏文化’라는 틀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연구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상존한다.
다섯째, 전거했듯이 二里頭 유적의 우수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에서는 二里頭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데, 관련 연구자로서 환영할 일이다. 또 중국은 ‘考古中國: 夏文化硏究’(2020-2024) 프로젝트를 통해 지원 사격을 아끼지 않고 있다. 다만, 세계유산 등재 또한 二里頭 유적의 객관적인 우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이 아닌, ‘夏文化’의 틀 속에서, 이른바 ‘중화문명’의 우수성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정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를 종합해 보면, 각기 다르게 전승되던 ‘禹’와 ‘夏’가 만난 것은 당시 현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周가 商을 멸망시킨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商이 ‘夏’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설정했고, 또 ‘夏’를 개창한 군주로, 선양 시대의 마지막 임금이자 치수의 영웅인 ‘禹’가 선택되었다. 그러다 근대이후 ‘夏’의 실존에 대한 의심이 거세지자, ‘二里頭’를 대표로 하는 고고유적이 선택되어 ‘夏’의 실재를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른바 ‘중화민족’의 단결력과 민족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역사학과 고고학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역사 연구를 위한 국가의 지원은 반가운 일이다. 역사라는 학문은 과거를 거울삼아 현대를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국가로서도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필요에 의해 ‘역사’가 재단된다면, 이는 역사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으로 결국 왜곡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전설 속의 ‘禹’가 실존 인물인지 여부를 떠나, 또 ‘夏’나라가 실존했는지 여부를 떠나, 중국 고대 문명의 유구성과 우수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현재 고고학이 서양에서 발생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이를 중국에 맞추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는 지적 또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중국이 추구하는 세계화 추세에 맞춰 조율을 하면서, 순수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면 좋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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