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 『포스트모던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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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 『포스트모던 해석학』
  • 이윤일 가톨릭관동대·철학
  • 승인 2020.11.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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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포스트모던 해석학: 정보 시대에서의 사실과 해석』 (존 카푸토 지음, 이윤일 옮김, 도서출판b, 351쪽, 2020.09)

                                      
이 책은 존 카푸토(John D. Caputo, 1940-)의 최근 저작 『Hermeneutics: Fact and Interpretation in the Age of Information』, A Pelican Books, 2018)을 옮긴 것이다. 원제는 『해석학: 정보 시대에서의 사실과 해석』이지만 본문의 내용을 감안하여 책명을 『포스트모던 해석학』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존 카푸토가 현대 해석학의 특징을 ‘포스트모던 해석학’이라는 명칭으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푸토가 그런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 John D. Caputo_ Hermeneutics Fact and Interpretation in the Age of Information
▲ John D. Caputo_ Hermeneutics Fact and Interpretation in the Age of Information

현대 유럽 대륙 철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서 현상학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해석학이다. 잘 알다시피 원래 해석학은 성서 해석학, 문헌 해석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슐라이어마허에게 와서 해석 방법 일반에 관한 이론으로 확립되었다. 그 뒤에 해석학을 굳건한 철학적 방법론으로서 정초한 철학자는 빌헬름 딜타이이다. 딜타이의 해석학은 19세기 말 위기에 처한 철학의 자기 정체 확인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근대에 들어 철학의 권위를 뒤흔드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그때까지 자연 철학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철학의 한 분야가 뉴턴 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분가한 사건이다. 자연에 관한 연구는 이제 자연과학자들의 몫으로 넘어갔으며, 철학은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정신의 영역을 움켜잡고 자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자연과학이 분가에 만족하지 않은 채, 정신의 영역을 자기들의 학문 영역으로 편입시키려고 끈질기게 도전해 왔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역사, 예술과 같은 인문과학 또는 정신과학의 문제까지도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을 낳았던 것이다. 철학은 이에 맞서서, 철학을 자연 과학과 대립되는 정신과학으로 규정하고,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자연 과학의 방법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해석학의 완성자 딜타이는 이런 배경하에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대립시킨 후,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생활을 이해한다.”라고 선언한다. 정신과학을 수행하는 방법론이 바로 해석학이라는 것이다. 그 후 인문학자들은 당당하게 자기들의 학문 영역을 옹호할 수 있게 되었다. ‘봐라, 인문학에도 자연과학 못지않은 방법이 있다. 우리도 진리와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은 다르다’라고. 자연과학은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반면, 인문학에서 우리는 예술 작품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적 이해에 도달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전통 해석학의 방향을 바꾼 여러 가지 상황이 출현한다. 우선, 일부 현대 철학자들은 모든 이해의 행위는 인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강단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이미 하나의 해석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이들은 자연과학이 선호하는 방법이 오히려 진리를 찾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수 있으며, 방법보다는 해석이 더 유연하고 독창적인 과정임을 밝히려고 한다. 20세기 중반에 전개된, 과학지상주의에 대한 철학자들의 공격을 상기해보라. 과학적 변화와 지식의 성장은 선형적인 진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급작스러운 패러다임의 변화와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쿤의 주장, 이론-관찰 이분법에 대한 핸슨과 포이어아벤트의 반발 등은, 과학 작업에도 상당히 많은 해석적 기술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론적 가설을 제안하는 것, 증거를 해석하는 것, 방법으로 처리되지 않는 변칙을 다루는 것에는 이미 우리의 선이해와 해석적 관심이 애당초부터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순수한 객관성이나 순수한 사실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카푸토는 해석학의 이러한 시대적 변천 과정을 숙지하고 포스트모던 해석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해석학은 모든 것이 해석의 문제라는 이론이다. 이때 해석에는 종착점은 없으며 해석은 끝까지 간다. 다른 해석들을 없애버리는 최종 해석은 있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적 해석학적 상황은 인생에 대한 끝없는 질문 가능성, 우리 삶의 끝없는 해석 가능성을 전제한다.
둘째, 포스트모던 해석학은 해석의 외연이 인문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미친다고 본다. 그 외연의 확장은 이미 『존재와 시간』으로 대표되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해석학은 독백이나 비판이 아니라 대화를 탐구 모델로 삼는다. 그중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은 가장 탁월한 대화의 해석학이다.
셋째, 포스트모던 해석학은 데리다 류의 해체주의도 해석학의 한 변형으로 받아들인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우리의 모든 신념과 실천이 끝없이 재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도 해석은 끝이 없이 수행된다. 다만 데리다의 해체는 해석을 더 깊이 밀고 나가 고지식하게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엄밀성을 지향한다.
넷째, 포스트모던 해석학은 근본(radical, 급진) 해석학이다. 근본 해석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던 해석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등한시하거나 배제해왔던 국외자, 외부인, 주변부의 관점을 중시하고.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탈중심화되어 있고, 다초점적인 포스트모던 문화적 상황을 해석해내는 데 탁월한 준거로 이용된다.         
카푸토는 이 책 전반부에서 하이데거, 가다머, 데리다, 로티, 바티모 등을 포스트모던 해석학의 핵심인물로 소개한 후(1~6장), 후반부에서는 이 포스트모던 해석학적 사유가 의학, 간호학, 공학, 교육학, 법학, 신학 등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7~11장)를 명쾌한 언어로 풀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해당 분야 종사자들에게 해석학적 사유의 적실성을 일깨우는 알뜰한 지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독서 여행이 되시기를!


이윤일 가톨릭관동대·철학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양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의미, 진리와 세계』, 『논리로 생각하기 논리로 말하기』, 『현대의 철학자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콰인과 분석철학』, 『철학적 논리학』, 『인간의 얼굴을 한 윤리학』, 『마이클 더밋의 언어철학』,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 『예술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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