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문제의식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마르크스의 고유한 생명정치
상태바
푸코의 문제의식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마르크스의 고유한 생명정치
  • 도서출판 오월의봄
  • 승인 2020.11.08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 읽기]

■ 깊이 읽기_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를』 (자크 비데 지음,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164쪽, 2020.08)

프랑스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자크 비데의 이 책은 2016년 프랑스에서 전개된 ‘노동법 개악 투쟁’이라는 정세 속에서 집필되었다. 이 책의 강력한 참조점이 된 노동법을 둘러싼 일련의 투쟁은 프랑스 좌파 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의 원리를 본격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맥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비데는 ‘노동법 투쟁’의 핵심 쟁점인 ‘노동시간’ 개념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그동안 종종 대척점에 놓여왔던 두 철학자 마르크스와 푸코의 관계를 그 뿌리부터 재구성한다.

‘노동법 개악’과 ‘좌파-신자유주의’적 전회

프랑스의 2016년은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의 주도로 ‘노동법 개혁’이 실행된 해였다. 사회당 소속이었던 올랑드 대통령은 10퍼센트가 넘는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자 기업 친화적인 노동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노동계와 다수의 시민들이 시위와 총파업을 벌이며 ‘개정안 철회’를 촉구했지만, 정부는 개정안을 강행했다.

프랑스는 양차대전 이후의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전통으로 인해 어느 정도 ‘혼합경제’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었으나,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 이후부터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신자유주의를 수용해오던 참이었다. 올랑드 정부는 그런 ‘좌파-신자유주의적 전회’를 본격화한 셈이다. 올랑드 대통령의 뒤를 이어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역시 사회 전체의 신자유주의화를 가열차게 밀어붙이고 있다.

‘생명정치’: 푸코를 경유해 마르크스로 되돌아가기

비데는 이 ‘노동법 개혁’이라는 사건을 실마리로 삼아 마르크스와 푸코라는 두 사상가에게 접근한다. 비데는 마르크스의 《자본》 1권 3편 〈노동일〉 장에서 ‘생명정치’의 문제의식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에게 푸코 개념을 떠올리도록 한다. 푸코는 자신이 ‘생명정치’라고 명명한 개념에서 18세기 이래 인구통계학과 공중보건, 사회적 예방, 사회적 정상성 등의 목표들을 체계적으로 전담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하나의 국가-정치적 실천을 특정한 바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생명 보호를 위해 “죽게 할 수 있는 권리”만을 행사하지 않는다. 국가는 사회의 생물학적 조직 안으로 직접 개입해 들어오고, 생명의 행위자가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다룬 공장은 이전의 거대 산업체를 넘어 오늘날 국가 전체의 수준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본의 생명정치는 더 이상 시장의 추상적 법칙이 아니라, 국가장치들이 실행하는 하나의 진정한 정치인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적 메커니즘과 그 경향, 즉 부의 생산과 이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할 뿐, ‘생명에 대한 관리’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에게 푸코의 것과 유사한 ‘생명정치(학)’가 존재한다는 비데의 주장은 일견 자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면밀하게 분석하는 노동일, 즉 노동시간은 직접적으로 노동자의 신체 및 생명과 연결되는 문제로, 계급투쟁의 핵심 의제를 형성한다. 비데는 마르크스가 일찍이 이 노동시간과 결부된 (노동자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간파하고 있었음에 주목하며 그의 《자본》 1권을 다시금 소환한다.

노동시간, ‘정상적’ 삶을 위한 권리

《자본》의 결정적인 한 장(‘노동일’에 관한 장)에서 마르크스는 1840~1850년 무렵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기 위한 영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분석한다. 당시 노동조합은 ‘10시간 노동법안’과 ‘보편선거권을 위한 헌장’을 내걸었으며, 10시간 노동법은 1847년 정식으로 공포되기에 이른다. 이 두 가지 요구는 노동자들이 과연 ‘정상적 삶’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질문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명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누가 ‘정상적’ 삶을 위한 공통의 법을 만들 것인지 확인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에게서 핵심이 되는 ‘노동시간’이라는 질문은 단지 ‘경제적 효율성’과 관련된 문제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비데가 보기에 이 ‘노동시간’은 ‘(노동자들에게) 체험된 삶’과 ‘정치적 대립’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촉발한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고유한 ‘노동의 생명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때문이다. 비데는 마르크스의 정치학이 삶에 대한 정치, 즉 하나의 생명정치(학)로서 ‘경제학 비판’과 한 몸을 이룬다고 진단한다.

‘노동일’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로 하여금 ‘노동하는 삶’에 관한 하나의 정치이론을 구성하도록 하는 본질적인 발견이다. “마르크스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 즉 ‘우리가 맺은 계약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만 하다 죽게 되는 [‘정상적 삶’이 불가능한] 그러한 계약을 맺은 것인가 아니면 ‘정상적 삶’에 대한 계약을 맺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게 만든다.”

2016년 프랑스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
2016년 프랑스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

노동자,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신체’에 관하여

즉 노동시간 투쟁은 ‘정상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를 획득하려는 투쟁이다. 마르크스는 공장의 전제정이 노동자들의 신체에 행사하는 폭력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노동시간 혹은 노동일을 제한하는 노동법에 주목한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푸코가 1973년의 강연 “진실과 법률적 형태들”에서 제시한 테제이기도 하다. 해당 강의에서 푸코는 “유일하게 신체에 행사되는 권력으로서의 규율권력, 더 나아가 이러한 신체들의 집합인 인구에 실행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에 대한 사고”가 마르크스의 《자본》 1권 〈노동일〉 장에서도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범박한 해석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가 (법으로 대표되는) 정치와 경제 사이의, 그러니까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의 단순한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푸코의 사상을 단순하게 대립시킬 수 없으며, 이 두 사상 사이에는 일종의 ‘선택적 친화성’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자본》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은 노동자가 자본가와 맺는 그 계약이 근본적으로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거짓된 계약’이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노동하면 할수록 점차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들 신체에 주목하며 드러내려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노동자의 신체가 마모되고 그 생명이 소진되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노동자들에게서 단 몇 초, 몇 분의 시간이라도 더 강탈하려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보여주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분 단위 시간을 슬쩍함’으로써 하루의 노동 시간을 늘리는, 그리고 노동자의 모든 땀구멍을 기계의 리듬에 따라 채워넣는” 공장의 실천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본원적 축적의 폭력 그리고 일회용-노동자들

폭력은 비단 공장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애초 자본주의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역사적 과정(사실상의 폭력) 속에서 탄생했다. 본원적 축적에서는 본래 한 명의 ‘생산자’였던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에서 떼어놓기 위해 (특히 농민들을 그들 경작지에서 떼어놓기 위해) 전쟁에 가까운 폭력이 동원되었다. “결국 이는 노동자 혹은 농민을 죽이는 장치로서의 교수대에 비유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정치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본은 자신의 필요에 비해 잉여적인 ‘상대적 과잉인구’를 처리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다양한 ‘산업예비군’을 발견해낸다. 이들은 자본 그 자신의 테크놀로지 변화의 리듬에 따라 마음껏 활용하고 또 버릴 수 있는 ‘일회용 노동자’로 다뤄진다. 자본은 가능한 한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을 유지하며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논리만을 따를 뿐, 임노동자들의 재생산을 책임질 의무는 전혀 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산업 생산체 중심의 주위 전체에서 뛰고 있는 생명정치의 맥박”이다.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생명력[즉 노동력]을 길어 올림과 동시에 더 이상 이윤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 이 생명력을 쓰레기처럼 내다버리는 장소인 자연환경에 기생하는 기생식물처럼 발전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명 형태들’을 없애버리거나, 그것을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활용한다. 마르크스가 묘사하는 이 일련의 폭력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진실’로 확인되고 있는 바이다.

‘노동의 권리’를 ‘이윤의 편의’로 환산하는 시대,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 읽기

“특히 노동자의 모든 땀구멍을 기계의 리듬에 따라 채워넣는 실천은 조립 공정 노동의 바로 전 단계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기업이 채택하는 스트레스 가득한 현재의 장치들을 예고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장치들을 로마나 신대륙의 노예제처럼 ‘가장 저발전된’ 형태들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본의 본성’으로 이해된 자본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지평”으로 옮겨놓는다.

비데는 마르크스가 간파했던 진실이 오늘날 아시아나 중남미 개발도상국 하청 노동자들이 겪는 노동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됨을 본다. 노동시간 단축을 외치는 법률들이 사실상 무의미해진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비데가 마르크스의 ‘노동시간’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 시대, “무제한적 시간의 재택 노동으로 변형된 IT 노동, 규정된 시간보다는 규정된 과업에 따라 맺는 노동 계약”은 사실상 ‘법적 노동시간’을 사실상 무효화한다. 현재 신자유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노동의 권리’를 ‘이윤의 편의’로 환원해버리는 다양한 법제화에 영감을 불어넣는 중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노동시간’은 더욱더 포기할 수 없는 쟁점이 된다. 노동일 제한을 무효화하고 신체를 무제한적으로 소진하도록 하는 이 반-혁명은 “노동일을 법적으로 제한했던 과정 자체의 혁명적 본성”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우리는 어떻게 마르크스와 푸코를 읽어야 할까? ‘노동의 권리’가 모조리 ‘이윤의 편의’로 환원되는 이 시대에 마르크스와 푸코에게서 어떤 진실을 낚을 수 있을까? 비데가 제안하는 독해법은 ‘마르크스와 푸코의 관계’를 재설정해 마르크스의 《자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두 철학자 모두에 대한 훨씬 더 촘촘하고 비판적인 탐구를 요한다.

▲ Marx 와 Foucault
▲ Marx 와 Foucault

마르크스와 푸코를 대립시키는 기존의 해석은 흔히, ‘유명론적 인간학’에 준거한 푸코가 하나의 중요한 쟁점으로 걸려 있는 ‘생명’을 (마르크스와 달리) ‘개인성’의 측면에서 파악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반대로 마르크스의 강점은 ‘계급관계’라는 본질 속에서 사회 질서를 해독했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대립 구도는 사실상 별 근거가 없는데,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푸코의 질문을 활용해 “마르크스의 이론적 작업장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푸코가 정확히 파악했듯, 계급 간의 대립이란 실제로 ‘독특한 인격들’ 사이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행위하고 노동하며 말하고 지배하며 저항하는 것은 계급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일 따름이다. 근대적 의미의 계약을 통과할 수 있는 이들은 계급이 아니라 바로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계급 대립에서 ‘적대하는 두 계급’이 아닌 ‘독특한 인격들’의 형상에 주목했던 푸코의 통찰이 유효한 건 그래서이다. 만일 ‘노동자’와 ‘자본가’를 (개인이 아닌) 하나의 계급으로 표상하면, ‘지배’는 순수하게 ‘비인격적인 것’으로 치환되고 만다. 이런 구도는 개인들이 그저 사회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자격으로서만 서로 대립하는 것일 뿐, 이상적으로는 모든 개인이 국가사회 안에서 평등하다고 상상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하나의 계급적 조건은 그 계급에 속하는 여러 개인들을 얼마든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존재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하지만 노동자가 한 명의 ‘독특한 개인’으로서 발화하게 될 때, 그의 목소리는 바로 그 계급적 추상을 깨버리며, 지배의 비인격성 또한 제거한다.

더 나아가 푸코를 참조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특유의 호명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일한 지배계급의 두 가지 극에서 발생한다는 사실 또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비데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근대성의 핵심인 원초적 호명, 즉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인지하는 원초적 호명을 식별해낸다. 근대 노동자의 이 자유는 “노동자가 자신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하지만 이 주인이라는 형상은 언제나 ‘소유에 의한 주인’과 ‘조직에 의한 주인’으로 이중화되어 있다. 시장의 편에서 호명은 노동자에게 언제나 탈출 가능성과 자유를 제시하는 반면, 조직의 편에서 호명은 명령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푸코는 바로 그 조직의 역량(기업 내에 존재하는 권위, 역량을 부여받은 관리자의 힘)을 마르크스와 다르게, 또한 매우 생산적인 방식으로 탐구했던 이였다. 다시 말해 푸코의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인민 계급이 행하는 정치적 투쟁의 복잡성을 진정 깨닫게 된다. “구별되면서도 동일한 하나의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자본가와 관리자-역량자라는 두 사회적 힘들”에 맞서야 하는 그 투쟁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푸코를 경유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뜨거운 지점이며, 푸코의 문제의식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마르크스의 고유한 생명정치, 즉 “위로부터의 명령에 반대하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요청하는 생명정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