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이라는 이름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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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이라는 이름의 병
  • 신정현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0.1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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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시사 에세이]

우리들의 일상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건 그저 남의 일일 거야!’라는 안이한 생각, 일에 빠져 건강을 잃는 것, 적당한 타협으로 불의를 가볍게 여기는 것, 이런저런 핑계로 부적절한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것, 갑자기 찾아온 역병의 창궐, 알코올이나 마약과 같은 기호 식품에 중독되는 것, 생각과 감정을 빼앗고 투명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전체주의 권력에 대한 공포--어느 하나도 우리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것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은 선악이나, 진위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어떤 무엇에 집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체제에 대한 집착, 평등이나 자유와 같은 권리에 대한 집착, 자본주의와 사유재산권과 같은 경제제도에 대한 집착--이러한 집착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헤어 나오지 못할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과 자본주의에 대한 집착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 심리학자인 로버트 나제미(Robert Elias Najemy)는 그의 책 『행복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Happiness: Understanding Our Selves, 1985)에서 이 물음에 대하여 ‘무언가에 대한 집착은 집착 그 자체가 문제’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집착이란 본질적으로 자기파괴적인 충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제미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자기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주둥이가 좁은 병 하나가 나무에 매달려 있고, 바나나 하나와 약간의 땅콩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병 속의 바나나를 발견하고, 아주 영리하게 손을 오므려 가까스로 병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바나나를 잡으려고 요리조리 손가락을 움직인다. 바나나를 먹기 위해 손을 빼려 하지만, 손은 빠져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손으로 바나나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빼려고 애를 써도 손은 빠져 나오지 않는다. 원숭이는 사냥꾼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서, 손을 빼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허사다. 바나나를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꾼의 덫에 걸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 뻔하지만, 병과 병 속에 든 바나나가 고통의 원인임이 분명하지만, 원숭이는 바나나를 놓고 손을 빼 자유를 찾아야지 하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한다. 

나제미의 일화(逸話)에서 이야기 속 원숭이가 바나나에 대해 너무나 큰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라면 행복의 원천이 되는 바나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원숭이는 주둥이가 좁은 병 속에서 바나나를 잡고 있는 손을 펴 자유를 얻기보다 그것을 움켜잡은 채 끌려가 포획되는 쪽을 택한다. 집착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집착이라는 이름의 병을 앓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 자유와 평등에 대한 집착, 자본주의와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집착.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집착이라는 행복을 무너뜨리는 힘을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의 일상에서 민주주의나 자유나 평등이나 자본주의와 같은 가치들은, 원숭이에게 바나나가 행복의 원천인 것처럼, 일상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가치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선악이나, 진위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집착할 때, 주둥이가 좁은 병에 담긴 바나나처럼, 우리들의 생존과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천만한 독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과 자본주의 같은 본질적 가치들은 언제 우리들의 행복을 파괴하는 ‘주둥이가 좁은 병에 들어있는 바나나’가 되는 것일까?

@ 출처=나무위키
@ 출처=나무위키

민주주의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국민이 자신들의 삶에서 자유와 평등과 건강과 안녕과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대표자를 뽑아 그 대표자들에게 권력 행사의 기본권을 이양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권력을 대리로 행사하게 하는 정치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극히 추상적인 정치적 이상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은 대표자들이 그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해 그들에게 권력을 이양해준 국민을 꼭두각시로 부릴 때,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나타난 어떤 정치제도보다 나쁜 최악의 정치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뽑힌 대표자들이 때로는 요설로, 때로는 우롱으로, 국민을 ‘생각하기를 멈춘 무뇌화된 대중’(unthinking mass)으로 만들고, 그들로부터 소위 말하는 ‘기꺼운 민주적 동의’를 얻어, 민주주의를 가장한 전대미문의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Enlightenment, 1968)을 썼던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그의 책에서 ‘자본주의의 모순과 갈등이 해소되는 변증법적 변화를 통해 역사가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는 마르크스의 ‘긍정의 변증법’(positive dialectic)을 뒤집어, ‘계몽정신’(enlightenment)--합리, 이성,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정신--에 선험적으로 내재된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어 20세기의 역사가 야만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는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ctic)으로 역사의 퇴행을 설명했다. 즉, 역사가 인간의 이성에 내재하는 상반되는 두 힘—문명을 건설하는 힘과 문명을 파괴하여 야만으로 되돌리는 힘--의 변증법적 대립과 갈등으로 이성의 건설적 힘이 마비되고 자유로운 주체가 소멸되어 야만의 상태로 퇴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에 의하면, ‘이성의 역설’로 일어난 역사의 퇴행은 가장 먼저 ‘대의민주주의’(parliamentary democracy)의 역설에서 나타났다. 현대인들이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양도하여 수립한 "의회민주주의"가 타락한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비호하면서 자기들만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이익을 쫓는 파렴치한 소수의 권력집단을 구축했고, 그 소수의 권력집단이 라디오, TV, SNS, 신문, 광고, 상품, 교육 등을 통해 대중들의 무의식을 유린하는 메시지들을 쏟아내, 대중들이 판단력과 주체성을 잃고 획일화되어 무리 속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생각이 마비된 무지렁이 군중’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국민을 무지렁이로 만들고, 국민의 무지가 정당한 권위를 무력화함으로써 폭력적인 권위를 낳은 것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스탈린 같은 인물들의 포악한 전체주의가 시민들의 ‘기꺼운 민주적 동의’를 얻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출처=https://www.facebook.com/RobertEliasNajemy/
@ 출처=https://www.facebook.com/RobertEliasNajemy/

민주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이 국민을 무지렁이로 만들어 일상의 삶에서 정당한 권위를 구축해 폭력적인 권위를 옹립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들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도 많은 경우 역설을 일으켜 개인과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먼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개인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할 궁극적인 권리일까? 아니면, 그 권리를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남용하면,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타자들에게 치명적인 부자유와 고통을 유발하게 되는 제한적인 권리일까?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가 부르짖는 ‘자유’에는 ‘추구해야 할 자유’와 ‘도망쳐야 할 자유’와 ‘잘못 도망치면 자신과 공동체에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는 자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추구해야 할 자유’에 속할 것이다. 책임과 의무는 개의치 않고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욕망만을 채우려 하는 자유는 수많은 타자들에게 부자유의 고통을 안겨주는 자유로서 ‘도망쳐야 할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자유 가운데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가장 위험한 자유는, 에릭 프롬(Eric Fromm)이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에서 설파한 대로, ‘그것으로부터 잘못 도망치면,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가 역겨워 그 자유를 내팽개치고 도망치면, 자신과 공동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하게 되는 자유’이다. 프롬에 의하면, ‘현대의 물질지상주의적 민주주의 문명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공동체 속 개인을 자아 속에 깊이 침잠하게 해 모래알처럼 흩어진 외톨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공동체 속 개인은, 견딜 수 없는 무료함과 외로움 속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할 수 없어, 자신의 ‘자유로운 인생’을 몽땅 털어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전체주의 파시스트들에게 바쳤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지만, 민주주의와 같은 자유를 생성하는 사회적 장치가 자유와 함께 ‘견딜 수 없는 고독감’(the feeling of isolation)을 낳는다면, 그는 끝없이 밀려드는 고독감을 이기기 위해 파시스트들이 만든 ‘폭력적인 무리’ 속에 자신을 던져버리고, 자신이 ‘무리 속의 일원’이 되었다는 연대감을 얻으면서, 그 알량한 연대감에서 수많은 타자들에게 단말마적 고통을 주는 가학적 쾌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자유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는 ‘무리 속의 일원이라는 연대감’을 얻기 위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자유’로부터 도망쳐, 우리들의 소중한 자유를 전체주의적 폭력을 추구하는 무리들에게 바치고 있지는 않는가?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천만한 집착은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이나 자유에의 집착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아마 평등에의 집착이 그 하나일 것이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도대체 이 세상 어느 구석에 평등이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평등권’이란, ‘자유를 누릴 권리’나 ‘행복추구권’과 같은 다른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오직 우리들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권리이다. 정말 저주받은 운명이지만, 자연의 법칙은 잉여이고, 원초적인 불평등은 존재의 부정할 수 없는 근본원리이다. 자연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얻으려면, 수많은 ‘열등한 것들’을 가려내고 솎아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회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구할 때에는, 이모저모를 짚고, 따지고, 비교해서 결정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인간 사회에서 ‘평등’이란 어찌하여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 되고, 어찌하여 그토록 중요한 가치가 되는가?

@ 출처=MisesWire Korea(https://mises.org/ko/wire)
@ 출처=MisesWire Korea(https://mises.org/ko/wire)

평등의 개념은 ‘인간으로 태어난 자, 그 누구라도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계몽주의 시대의 당위적 가정에서 우리들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권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자유에 대한 권리와 함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의 개념은 ‘인간이면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법과 규범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적 최고 가치일 뿐, 많은 경우 ‘자연은 환경에 적합한 자만을 살아남게 한다’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natural selection)과 곳곳에서 충돌한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연의 선택 법칙’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과 윤리와 규범을 무력화하거나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자연의 선택 법칙’은 언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과 윤리와 규범들을 무력화하거나 작동을 멈추게 하는가? 첫째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과 규범이 ‘기계적 평등’을 지향할 때, ‘인간의 법’들은 기형의 평등을 만들어 엄청난 불평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둘째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인간의 법’들은 ‘자연의 선택 법칙’ 앞에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기계적 평등’에 집착하면서, 우리 사회는 ‘사회적 계층이동’(social mobility)이 멈춘 좀비(zombie)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명성황후 암살 사건을 보면서도,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평등의 법칙’이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평등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까지 평등의 법칙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가장 좋은 예는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입시의 평준화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왜 ‘기계적 평등’이라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계층이동’이라던가, ‘수월성의 성취를 통한 민족의 생존’과 같은 교육 본연의 목적을 희생해야 하는가? 반세기에 걸친 평준화 정책으로 경제적 약자들이 공교육을 통해 창의성과 수월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경제적 강자들은 고도로 발달된 사교육 시장에서 ‘영재 교육’을 받아 일류대학에 진학해, 사회적 지위와 부를 독점하게 되었다. 사회적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약자들이 창의성과 수월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욱 섬뜩한 것은 민족 전체가 창의성과 수월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게 되어, 머지않은 미래에 국가경쟁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1597년의 명언은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리이다. 그러나 모든 앎이 똑 같은 힘을 낳는 것은 아니다. 앎에도 계급이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나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에서 보듯이 역사를 창조하는 강력한 힘은 최고의 창의성과 최고의 수월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최고의 창의성과 최고의 수월성은 공동체 전체의 역량을 최대한 결집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가 1991년부터 5년여에 걸쳐 쓴 공상과학 연작 소설 『개미의 제국』(Empire of Ants)에서 수월성의 성취에 대한 빛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베르베르는 30여 년 동안 개미사회를 관찰해온 결과를 바탕으로 한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서—그것이 개미사회이든, 인간사회이든--수월성을 계발하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가를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베르베르의 통찰에 의하면, ‘사회를 이루어 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해가는 모든 군집체는 수월성을 지닌 20%의 창의성에 의해 그 역사가 발전하고, 나머지 80%의 구성원들은 사회를 유지하는 세력을 이룬다. 그리고 그 20%를 제거하고 나면 나머지 80% 가운데에서 또 다른 20%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기능을 맡지만, 그것은 보다 수월성이 높은 20%의 최우수 집단을 제거하지 않은 사회와 경쟁할 때 필연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현재 우리는 “평등”이라는 사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월성의 계발을 통한 민족의 생존’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유린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존재의 생리를 등한시한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가까운 미래에 참담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신정현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대학교(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1987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The Stylistics of Survival in the Poetry of Robert Lowell”,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문학」, 「서구문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미국시」, 「스페인어권 문학과 미국문학의 충돌과 상호작용」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는 『The Trap of History: Understanding Korean Short Stories』, 『현대 미국문학론』(공저),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 『서양 문학 산책: 20세기 명작』 1, 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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