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샤르가프의 통렬한 자기 성찰적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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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샤르가프의 통렬한 자기 성찰적 글쓰기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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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 | 에르빈 샤르가프 지음 | 이현웅 옮김 | 달팽이출판 | 368쪽

1949년 이른 시기에 ‘샤르가프의 법칙’을 발표해 오늘날 분자생물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내는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에르빈 샤르가프(1905~2002)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생화학의 확립과 분자생물학의 탄생이라는 극적인 시기를 살아온 샤르가프의 전기적 에세이다. 20세기 초, 아직도 세기말의 자취가 남아 있는 빈에서의 어린 시절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현실의 암울함을 상쇄시키던 10대의 생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고답적인 소년에서 화학자로서 연구의 길을 걷는 데 이르는 시대상의 변화, 오스트리아의 빈, 독일의 베를린, 프랑스 파리, 그리고 미국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삶에 대한 증언 등을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DNA의 염기 조성을 밝히는 과정과 핵산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샤르가프와 왓슨과 크릭 등 수많은 과학자와의 만남과 교류를 회상하며, 과학의 제도화라는 현상과 과학 전문가 집단의 비대화, 생명과학의 위험성을 샤르카프 특유의 예리한 비판 정신과 깊은 통찰력으로 적시한다.

▲ 에르빈 샤르가프(Erwin Chargaff)
▲ 에르빈 샤르가프(Erwin Chargaff)

1935년부터 컬럼비아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40여 년간 연구와 교육에 종사한 샤르가프는 1974년대 퇴임 뒤에도 아흔을 넘긴 긴 생애 동안 유전자 조작 등 현대과학의 상업성과 거대화를 비판하는 많은 에세이를 집필했다. 풍부한 인문교양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저술은 현대과학이 가져온 인간 존엄성의 심각한 훼손에 대한 공포와 분노의 산물이다. 또한 과학자로서 자신 역시 공범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회한의 기록이기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논쟁적이었다. 그는 “귀찮은 사람” “이단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 부른 사람들도, 핵심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날카로운 위트를 지닌 총명한 문학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의 학문은 광범위해 과학은 물론 고전작품과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문화의 모든 양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과학은 성과를 내기에 급급해 그 과정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 목적 또한 매우 불순하거나 비인간적인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샤르가프는 이 책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두 단어만 들어도 극심한 공포감과 함께 인류 본성의 종말을 보는듯한 묵시록적 세계관과 다르지 않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그는 오늘날 과학이 끊임없이 '죽음의 과학'으로 질주하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으로서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에 직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작은 과학’은 사라지고, 권위적인 정부기구가 운영하는 거대과학으로 옮겨가며 무한 경쟁의 상업주의에 빠져든다. 생명과학 또한 끝모를 위험한 모험을 계속하고 있다. 20세기 초, ‘작은 과학’에서 공부한 샤르가프는 이 책에서 현대과학의 이러한 위기감에 대해 격렬히 비판하고 있다. 자칭 과학계의 아웃사이더이며 비판적 회의론자인 그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묵시록적 비전은 우리에게 과학의 미래와 인간의 공생 윤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끝으로 이 책의 매력중 하나는 저자 샤르가프라는 인간 그 자체다. 그는 번역서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독서를 위해 15개 언어를 공부했다. 끊임없이 고전을 탐독했으며 문학과 음악, 미술을 사랑했다. 이 책은 그러한 폭넓은 인문 교양을 갖춘 샤르가프의 깊은 자기 성찰적 사색을 담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언어(와 문학)의 분방한 확대를 보이고, 마치 문예 장르의 책처럼 착각하게 하는 ‘비평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이 책 전반에 풍기는 그의 높은 지조는 많은 유사한 책이 그렇듯이, 크고 작은 업적을 쌓은 대학교수이며 과학자의 너그러움과 겸손을 가장한 자기만족의 안일한 성격과는 전혀 무관한, 굳이 말하자면 수준 높은 문학적 성취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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