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이념 너머로 '차별과 폭력'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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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이념 너머로 '차별과 폭력' 바라보기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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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진보는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 |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400쪽

기본적으로 우리는 차별을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은 사람들의 나쁜 심성이나,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인권에 대한 의식이나 감수성 부족, 기득권층의 주도적 지배 등에 원인이 있으므로, 사회가 진보적으로 바뀐다면 차별은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즉 그것은 법과 제도로써, 그리고 합리와 이성에 근거한 계몽으로써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그런 시도의 대표적인 예다.

저자에 따르면, 차별에는 ‘좁은 의미의 차별’과 ‘넓은 의미의 차별’이 있다. 전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차별이나 동성애 차별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차별금지법 같은 제도로써 규제하고 개선해갈 수 있다. 문제는 후자다. 이는 “사회에서 여러 이유로 ‘정당하다’고 인정되거나 묵인되거나 심지어 생산되는 차별이다.”

예컨대, 회사가 되도록 우수한 인재를 뽑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학력 및 능력에 따른 차별을 만들어낸다. 부모들이 되도록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려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러면서 학력의 격차가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 집을 살 때 가능한 한 주변 환경이 좋고 미래에 가격이 상승하리라 여겨지는 곳의 주택을 사는 것도 누구나에게 권장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이 합쳐져 부동산가격의 격차가 생기고 차별적 갈등도 발생한다. 이런 문제들은 인권에 기대는 식으로 비판하고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을 차별이라 이해하며, 그런 것들은 쉽게 ‘나쁜 차별’로 분류된다. 하지만 앞서의 차별들은 오히려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이것은 도덕적 원칙이나 이념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한 차별을 없애는 일의 어려움은 ‘적극적 우대조치’의 한계에서도 드러난다. 기회의 차원에서 차별을 받는 소수집단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또는 따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적극적 우대조치다. 이 조치는 차별을 시정하는 좋은 제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소수에게 더 기회를 준다고 할 때 어떻게 그 소수에게 그 기회를 ‘공평하게’ 배분하느냐”는 문제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주로 대도시의 학생들이 ‘SKY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농어촌을 대상으로 적극적 우대조치를 도입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도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하게 될 것이다. 시험 성적에 의한 기존 제도의 폐해를 조정하기 위한 조치를 실행하려고 하는데, 다시 농어촌 지역에서도 성적 우수 학생에게만 기회를 주는 셈이 된다. 여성이나 장애인이나 다른 소수집단이 대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약자와 소수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일이 다시 그 가운데에서 능력 있는 사람과 강자를 우대하는 일이 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다. 능력주의로 인한 차별을 해소하는 과정에서도 능력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건 능력주의가 사회구조의 일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회의 ‘팩트’ 자체가 이미 차별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넓은 의미의 차별(혹은 사회가 정당화하는 차별)을 풀기 어렵게 한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인 ‘팩트 폭력(팩폭)’도 이런 관점에서 분석될 수 있다. ‘팩폭’이란 “넌 뚱뚱해” “넌 못생겼어”처럼 상대가 아파할 만한 사실을 대놓고 말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폭력이 되는 건 그 ‘팩트’가 이미 폭력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환경이나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지방대생이라거나 수시로 입학했다는 것은 그냥 객관적 사실일 뿐이지만, 성적 위계 구조의 아래에 놓이는 현실의 맥락에서 ‘지잡대’니 ‘수시충’이니 하는 표현으로 팩폭을 당하게 된다. 누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하는 사실도 비슷하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팩폭이 늘어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들에도 폭력성이 점점 더 많이 스며들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집요하게 차별의 문제를 좇는다. 혐오 표현, 팩트 폭력, 학력경쟁, 차별금지법, 공정성 논란, 급진 여성주의자에 의한 트랜스젠더 차별, 능력주의 평가 시스템 등의 문제를 철학적·사회학적으로 분석·성찰하며, 그 안에서 차별과 폭력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 있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진보적 방향의 정책을 꾸준히 추구한다고 해서, 또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갖추고 ‘의식 있게’ 행동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해결책이 궁금해질 법하지만, 저자는 성급한 대안 제시에는 선을 긋는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 시스템도 차별과 폭력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섣부른 대안보다는 차별과 폭력의 다양한 양상을 마주하고 또 마주한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떤 실천 태도를 가져야 할지는 그 후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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