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식에서 대발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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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식에서 대발견까지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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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학문의 깨달음, 어렵지 않다>에서 깨달음을 얻는 학문을 하려면 ‘문제의식’과 ‘집중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의식을 해결하려고 집중력을 발현하는 끈덕진 노력을 하면 깨달음이 온다고 했다.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이런 말이 공리공론일 수 있다. 깨달음이 허세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문제의식은 번뇌망상과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해결하려는 것이 문제의식의 한 본보기이다. 문제의식은 대상이 있으므로 분명하고, 번뇌망상은 소종래를 몰라 불분명하다. 문제의식은 미해결의 과제를 상속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을 수용하기도 해서,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지니는 것이 예사이다. 번뇌망상은 남들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나의 고민에 지나지 않아 역사성도 사회성도 없는 것 같다.

학문하는 사람이 번뇌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문제의식을 갖추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한층 분명하게 하려고, 논의를 진전시킨다. 문제의식은 개인적인 관심사를 넘어선 공동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맡아서 해결하려고 애쓰는 의식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욱 진전된 정의이다. 문제가 되는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해야,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문제의식을 제대로 갖춘다. 

막연한 일반론은 이쯤 끝내고,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하고 연구를 실제로 해서 큰 성과를 이룬 사례를 고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본보기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어. 내가 한 연구에서 든다. 논의가 주관에 치우쳤다거나 국문학의 사례가 너무 특수하다고 나무라지 말고, 핍진한 체험을 함께하면서 “나는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생각하기 바란다.  

국문학의 유산에 가사(歌辭)라는 것들이 많이 있어 연구를 해야 한다. 개별적인 작품을 하나씩 고찰하면 할 일을 다 한다고 여기지 말고, “가사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풀어야 한다. “가사는 시(詩)이기는 한데 서정시는 아니니, 정체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면 의문이 좀 더 분명해지지만, 해답이 그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국문학계의 선학들이 이런 의문을 풀려고 “가사는 문필이다”, “가사는 수필이다”라고 대답한 것이 모두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학계의 초년병 시절에 내가 나섰다. 미해결의 과제를 분명하게 가다듬어, “시조와 가사가 다른 점을, 서정과 대등한 수준의 미지수 x를 풀어서 말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을 이렇게 가다듬으니, 번뇌망상과 다른 문제의식이 분명해졌다.

이에 관해 집중력을 가지고 끈덕지게 추궁하다가, 어느 날 한 소식이 들려왔다. 엉뚱한 것 같은 발상에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있었다. “시조와 가사는 한쪽이 세계의 자아화이고, 다른 쪽은 자아의 세계화이다.” 둘을 관련시켜 같고 다른 점을 상호 조명해야, 둘 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 같고 다른 점이 이렇다고 했다. 그렇다. 이것이 해답이다. 여기까지가 돈오(頓悟)이다.

돈오한 바를 점수(漸修)해 정착시키려면, 세계의 자아화를 서정이라고 하는 것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용어가 필요했다. 이 용어를 ‘교술’(敎述)이라고 하고 논문을 쓸 때에는. 외국의 전례를 참고하고 언급하면서 다소 복잡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 작업은 마음에 들지 않아 거듭 수정하고 다듬었다. 그러나 돈오한 것은 계속 그대로 빛난다. 돈오를 구체화한 이론은 독창이고, 세계 어디에도 전례가 없다.

그러자 문제의식이 확대되고 이론 창조가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정과 교술의 상호조명에서 얻은 성과를 확대해 문학 갈래에 관한 수많은 논란을 정리하는 확실한 이론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만 해도 과분하다고 할 수 있는데, “문학 갈래의 이론을 분명하게 한 것을 근거로 삼고, 소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 헤매고 있는 세계 학계의 한심한 작태를 청산하는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지니는 데 나아갔다.

문제를 한 단계씩 해결해나간 과정을 여기서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 책을 여럿 보면 그 내역을 알 수 있다고 하면 너무나도 무책임하다.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에서 한 작업의 개요를 최소한으로 간추려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자아와 세계가 상호 우위에 입각한 대결인 소설이 나타난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이다. 그때 상하ㆍ남녀가 경쟁하면서 합작해 소설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세계 어디서나 기본적으로 같으면서, 문명의 전통이나 사회적 여건에 따른 차이점도 있다.

(2) 중세까지 위세를 떨치던 문학 갈래를 안에 들어와 뒤집고는 정체를 숨기고 위장된 신분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표현 형식을 차용한 것이, 소설이 생겨나면서 사용한 공통된 작전이다. 동서 양쪽에서 전(傳)과 고백록이 사람의 행실을 평가하는 권능을 행사하고 있어, 동아시아에서는 ‘가짜 전’, 유럽에서는 ‘가짜 고백록’이라고 하는 소설이 나타난 것이 같으면서 다르다. 다른 문명권에서 이런 일이 일제히 일어나, 광범위한 비교가 필요하다. 

(3)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변혁을 먼저 진전시킨 동아시아의 소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근대화를 이룩한 유럽이 선두에 나서서, 후진이 선진이 되고 선진이 후진이 되었다. 선후진의 역전이 다시 일어나, 유럽에서는 죽어가는 소설을 제3세계에서 살려내는 과업을 아프리카에서 모범이 되게 수행한다.  

이것은 생극론의 철학을 구현하는 소설이론이다. 변증법과 맞서는 토론을 여러모로 전개하면서, 여러 문명권, 많은 나라의 소설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 변증법에서는 소설은 사회갈등을 근대 시민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해결하려고 하므로, 유럽에서 먼저 만들어내 세계 전역에 수출한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근시안적이고 편파적이라고 나무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행세를 한다는 다른 여러 이론도 논파의 대상으로 삼고, 누적된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19세기까지의 물리학을 무효로 만드는 20세기 물리학의 혁명 같은 것을 다른 쪽에서도 성취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이를 입증하기 위한 긴 말을 하지는 않는다. 문제의식 해결을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하면 돈오가 누적되어 대 발견에 이르는 것을 알아주면 여기서 할 일은 다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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