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허리를 안고 달리며 저 낮은 운문호 물빛을 보다 공암리 동구에서 뛰어내리듯 달음박질친다. 길 가에 산수유가 붉다. 스치자 푸른 잎 사이로 산란되는 빨강. 설한의 단단한 빨강에만 익숙한 눈이 갈 빛 속 투명한 빨강에 따스해진다. 마을은 호수로 흘러드는 개천을 따라 길쭉하게 자리한다. 35가구 70여 주민이 산단다. 공암리 대다수의 자연마을과 경작지는 운문호 속에 잠겨 있고, 잠기지 않거나 떠나지 않은 이들만이 이곳에 산다. 그들은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표고버섯을 키운다.
공암리 복지회관 앞에 주차장이 넓다. 곁에는 몇몇 운동기구와 유리창을 단 모정이 고요하다. 땅은 천을 따라 시나브로 내려간다. 천이 굽이지는 자리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허리를 굽혀 물을 바라본다. 그러다 풍덩 잠기겠다. 누군가 나무의 허리를 단단히 묶어 당겨놓았으니 걱정은 없겠다. 동굴처럼 텅 빈 둥치 속에 양초 하나가 서 있다. 천 건너 맞은편 거연정(居然亭) 편액을 단 정자가 있다. 20세기 초반 백운거사(白雲居士) 윤현기(尹玄基)라는 이의 정자로 알려져 있다. 거연정은 운문댐 축조 당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조사되었지만 결국 시기를 놓쳐 무너졌다. 현재의 거연정은 복원한 것이다.
정자는 오브제 같다. 앞에는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두 그루 전나무가 창처럼 곧다. 뒤 바위벽에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글씨가, 그 오른쪽에는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산은 높고 물은 길며’, ‘구름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개천의 바윗돌에는 활수원(活水源), 경(敬), 아천석(我泉石) 가이합(可以合) 등의 글씨가 있다는데 찾지 못하였다. 백운거사는 주자(朱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을 상기한 것이 틀림없다. 나와 샘과 돌이 한 몸으로 여기에 있다는 것.
멀리 운문호가 슬몃 보인다. 천이 호수로 흘러드는 자리에 수양버들 한 그루가 흐드러져 있다. 산처럼 아득하다. 호숫가 언덕에는 박공지붕의 건물 하나가 어린 대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현대 한국 화단의 거장인 소산(小山) 박대성(朴大成) 화백의 고향집이라 한다. 창고 같은 집 외벽이 군데군데 녹슬었다. 몇 채의 표고버섯 하우스를 지나면 폭신한 멍석길이 시작되고 곧 호수 가장자리의 산책길로 이어진다.
포르르 포르르 낙엽비 내린다. 나선형으로 낙하하는 윤회의 몸짓들. 가을 깊은 숲이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숨어서 울고 하늘에는 두 마리 새가 대기를 베는 부메랑 소리를 내며 난다. 그들은 종대 또는 횡대의 열을 기막히게 유지하면서, 색색의 연기를 내뿜으며 비행 쇼를 하는 전투기처럼 난다. 전투적인 연애짓이다. 그 아래 넓은 운문호(雲門湖)는 민감하고 새침하게 누워 있다. 그늘진 수면에는 진주알 같은 빛이 반짝인다. 그리고 저 멀리 호수에 턱을 괴고 엎드린 긴 벽이 천중의 빛 아래 희부옇게 보인다. 그것은 창백한 뺨과 하얀 목덜미만 드러낸 채 가을을 뒤집어쓰고 있다. 예부터 용의 머리라 불려온, 거위의 둥그런 머리 같기도 한, 공암풍벽(孔巖楓碧)이다.
용의 정수리에 날씬한 몸통만 한 바위구멍이 있다 한다. 그것이 공암이다. 두암(竇巖)이라고도 한다. 구멍은 바닥까지 뚫려 있다고 하는데 그 끝을 모른다고 해서 옛 지리지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굴이다. 공암에 돌을 던지면 낭낭(朗朗)한 소리가 한참이나 들린단다. 풍벽은 ‘단풍나무가 벽을 이룬다’는 뜻이다. 벼랑의 가을 이름이다. 여름 이름은 창벽(蒼壁)이라 한다. 푸른 벽이다. 데크길은 오솔길로 이어지면서 점점 공암풍벽과 가까워진다. 운문호가 생기면서 공암풍벽은 접근이 차단되었다가 데크길을 놓으면서 다시 개방되었다.
아주 옛날에는 산자락을 따라 실오라기 같은 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수헌 이중경(李重慶)은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에 ‘길이 바위틈으로 가로질러 통하는데 틈의 깊이는 백 척이나 되고 또 백보정도 뻗쳤는데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밀양과 청도로 부터 경주까지 귀하신 분들이 이곳을 경유한다. 동남쪽은 기이한 골짜기가 층층이 겹쳐있고 구름과 안개가 서로 섞이며 서북쪽도 그러하다’고 썼다. 귀하신분들은 이곳에 많은 각자를 남겼다. 그 중 한분이 서애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이다. 그는 1627년 경 청도 군수로 있으면서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높은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뭇 새들이 높이 날다 때때로 등을 드러내고 뭇 봉우리 줄지어 서서 모두 고개를 숙이네.’
전망대에 닿는다. 낙석을 주의하라는 석벽에 ‘풍호대(風乎臺)’ 글씨가 뚜렷하다. 좌측에 시문(詩文)이 있으나 흐리다. 이 주변에는 풍호대와 곡천대(曲川臺)라는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수몰로 인해 모두 없어졌다. 저 물속에 공암면사무소가 있고 집들이 있고 사기그릇을 만들었던 가마도 있다. 물 속의 마을은 언제나 좀 처연하다. 길은 호반을 지나 석벽 사이로 이어질 테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실오라기 같은 길은 낙엽에 지워졌고 가을은 공암 처럼 깊으니, 들면 되돌아 나지 못할 것만 같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