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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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접하다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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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 조선사연구초(1929)
▲ 조선사연구초(1929)

마치 한 편의 논문처럼 서-본-결 구조를 갖추고 있는 이 글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사연구초》(1929)의 한 부분이다. 총 6편으로 구성된 책의 마지막 편이다.

단재 선생이 꼽은 조선 역사상 1천 년 이래 최대 사건은 다름 아닌 ‘서경 전쟁’, 즉 서경(평양)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던 서경파 세력이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유학파에게 패한 일이다.

‘아니, 역사적인 사건이 얼마나 많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서경 전쟁(이른바 묘청의 난)을 최대 사건으로 꼽는 거지?’라고 의아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이를 이해하려면 단재 선생이 책을 쓴 시기가 일제 치하였고 조선의 정치적 외교적 실책을 치열하게 반성하면서 그 원인을 찾고자 했다는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이 근세에 종교나 학술은 물론이고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 과정에서 유교가 지목되었고 유교가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은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서경 전쟁이 나온 것이다.

단재 선생의 분석은 이렇다. 화랑 전통, 불교, 유교가 세 기둥으로 나라를 떠받치고 있던 상황에서 화랑 전통 및 불교파와 유학파 사이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유교가 타교를 아우르지 못하고 심하게 배척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금나라를 칠 것인지, 전쟁을 피해 국토를 보존할 것인지도,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할지, 개경에 머물러야 할지도 계속 정쟁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성질 급한 묘청이 뜻을 함께했던 이들과의 합의도 없이 멋대로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유학파와 군사적 대립을 벌인 끝에 패배함으로써 유학파가 단독으로 나라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후 유학파의 수장 김부식은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속국의 위치에서 평화롭게 나라를 보존하자는 정책을 폈고 더 나아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기존의 화랑 및 불교 전통을 대폭 축소하는 역사 왜곡을 단행함으로써 결국 사대주의가 뿌리 깊게 박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경 전쟁이 고려 인종 13년, 서력으로는 1135년에 일어났으니 단재 선생이 말한 ‘조선 역사 1천년’은 918년 고려 건국부터 이 책을 쓴 1920년대까지가 될 것이다.

서경 전쟁의 결론이 달라졌다면, 그리하여 더 호방하고 자주적인 나라가 섰다면 민족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왕조 600년의 전통을 당연한 상수(常數)로 받아들여 왔기에 다른 길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 단재 신채호
▲ 단재 신채호

이 점에서 단재 선생의 주장은 한층 놀랍다. 전통 유교 교육을 받고 성균관에서 수학한 단재 선생은 지금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학에 젖어 있었을 텐데,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유학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컸을 텐데 이토록 통렬한 비판을 한 것이다. 오래 배우고 익혀 내 것이 되어버린 대상을 남의 것인 양 바라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외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한 민간단체에서 주최하는 대학생 독서토론대회의 운영진 겸 심사위원을 맡은 덕분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진행된 토론이었고 준비과정에서 걱정이 적잖았지만 다행히 큰 사고 없이 16강부터 결승까지 진행되었다. 16강과 8강이 진행되면서 문제로 대두된 것은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옹호하는 측과 비판하는 측으로 나뉘는 토론에서(비판과 옹호는 토론 직전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후자가 영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만 나오는 것 같은 단재 선생의 글을 대체 어떻게 비판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간 토론에서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는 유학 자체가 아닌, 유학의 왜곡된 흐름이었다고 주장한 비판 측을 옹호 측이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다. 듣고 있던 나도 설득되는 논의였다. 단재 선생은 유학파들의 지배 끝에 결국 나라를 외세에 빼앗기게 된 상황을 개탄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유학이 지닌 나름의 가치를 짚어내는 것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혼자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편이 훨씬 유익하고 많은 깨달음을 준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그 사실을 대학생들의 독서토론을 지켜보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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