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비판이론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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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비판이론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 배세진 파리 7대학·정치철학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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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사상의 좌반구: 새로운 비판이론의 지도 그리기』 (라즈미그 쾨셰양 지음, 이은정 옮김, 현실문화, 536쪽, 2020.09)

필자는 감수와 해제를 맡게 됨으로써 이 탁월한 저서의 한국어 번역본의 0번째 독자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이 책을 꼼꼼히 읽고 그에 대한 논평을 하면서 필자가 발견하게 된 이 책의 가치를 도식적으로 제시하자면 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 책은 1850년경 마르크스주의의 탄생 이후 비판이론의 굴곡진 역사를 외재적이면서도, 그러니까 지식사회학의 관점에서 해당 지식의 객관적 역사를 상당히 넓은 흐름 속에서 부감적으로 성찰하면서도, 동시에 내재적으로, 그러니까 이 역사 내에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비판이론‘들’을 그 이론 자체의 자격으로 분석한다. <<사상의 좌반구>>는 이론이 놓여있는 맥락에 대한 분석들이 흔히들 빠지곤 하는 이론에 대한 속류화의 함정을 피해 가면서도 동시에 이론 자체에 대한 연구들이 흔히들 빠지곤 하는 이론에 대한 물신화의 함정 또한 피해간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훈련을 통해 사회과학의 사고방식을 체화해야 함과 동시에 인문학 텍스트를 정확히 읽는 훈련을 통해 인문학의 내적 논리 또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 두 조건을 정확히 충족하는 몇 안 되는 연구자 중 한 명인 것으로 필자는 평가한다.

두 번째, 앞서의 첫 번째 강점으로 인해 이 책은 비판이론의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무엇 무엇의 교과서라 함은 해당 학문의 역사적 맥락과 동시에 그 해당 학문의 이론적 내용 또한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첫 번째 강점이 이 책을 비판이론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한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쾨셰양의 저서는 스스로를 비판이론의 교과서로 정립함으로써 비판이론과 사회운동의 마주침(루이 알튀세르적 의미에서)을 우리가 다시 한번 시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쾨셰양이 자신의 저서에서 정치하게 설명했지만, 비판이론은, 마르크스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주듯, 태생적으로 사회운동과 제도로서의 학계 사이에서 탄생했다(이것이 사회운동을 하나의 제도로 보지 않는 것은 전혀 아님을 노파심에 지적하고자 하는데, 쾨셰양이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는 에티엔 발리바르는 사회운동과 제도, 봉기와 구성 사이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러나 본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정치 정세들로 인해 비판이론은 제도로서의 학계라는 ‘참호’에 들어가 ‘진지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지식인들은 대학이라는 지식의 ‘공장’에 일종의 ‘위장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쾨셰양이 의미심장하게도 책 전체의 제사로 인용한 페리 앤더슨의 글에서 언급되듯, ‘패배’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지는 않지만, 필자가 저자의 텍스트를 과잉 번역해 해제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러한 패배가 사실 비판이론에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는 점이다. 사회운동과 제도로서의 학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원죄’ 때문에 비판이론은 주류 학문으로부터 ‘당신’은 과학이 아니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끊임없이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전 속에서 많은 비판이론가들은 현실의 모순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그리고 이 의식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아 주류보다 더 열심히 과학성을 담보하고자 각 분과 학문이 요구하는 테크닉을 체화하고 엄밀성을 증진시키면서, 이제는 주류 학문이 비판이론을 버젓이 참고문헌에 넣게 될 정도로까지 주류 학문이 요구하는 과학성의 기준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쾨셰양이 비판하듯 이제 비판이론은 과학성을 취한 덕에 사회운동과 어떻게 다시 마주쳐야 하는지의 난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쾨셰양의 저서가 가지는 세 번째 가치는, 비판이론의 이 모든 혼란스러운 역사를 교과서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는) 이론 내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다시 한번 비판이론이 제도로서의 학계 바깥으로 나가 사회운동과 마주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주류 학문이 요구하는 과학성에 미달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주류 학문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상태로 머무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길을 떠나야만 하는데, 이전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퇴보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가 되기 위해서 이 출발은 하나의 ‘재’출발이어야만 한다.

필자는 0번째 독자로서 이 책을 접하고 저자와 역자, 그리고 이런 양서를 출판하기로 결정한 출판사에 깊이 감사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 내용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선 정세적 의미를, 그러니까 (푸코적 의미에서의) 현재성 혹은 현실태를 강하게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를 거쳐(한국 혹은 동아시아의 경우라면 1997년의 위기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당선과 2020년의 코로나19 위기로, (어느 지식인의 통찰을 표절하자면) 우리는 ‘드디어’ 장기 20세기(조반니 아리기적 의미에서)의 종말, 그 지연된 종말을 목도하게 된다.

▲ 저자_라즈미그 쾨셰양(Razmig Keucheyan)
라즈미그 쾨셰양(Razmig Keucheyan)

그 누구도 이 장기 20세기가 이러한 식으로 너무나도 허무하게 바이러스에 의해 끝장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세계는 우리 지성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 지성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종교도 아니고 생태적 재앙으로 장기 20세기는 이제서야 자신의 지연된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우리는 결국 장기 21세기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는 점에 필자는 (근거 없이) 많은 의미를 둔다. 한국 또한 세계 어느 나라들과도 마찬가지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생태적 재앙과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낸 계급, 국민, 인종, 성(이라는 네 가지 동일성 혹은 정체성)에서의 모순들을 직시하지 않고 퇴보할 것인가, 아니면 이 모순들을 직시하고 이를 ‘오히려 인식하기’(발리바르가 스피노자를 따라 말하듯) 위해 용기를 낼 것인가.

미셸 푸코는 지식과 진리를 구분했다. 알랭 바디우 또한 푸코와 비스듬한 의미에서 지식과 진리를 구분했다. 필자는 주류 학문이 지식이라면 비판이론은 진실이라고 부당 전제한다. 물론 필자는 푸코의 사상을 따르기 때문에 이 ‘진실’이 ‘진리’는 아니라는 점에 흔쾌히 동의한다. 하지만 필자는 최소한 지금의 정세에서 비판이론은 주류 학문이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없는 진실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주하기 너무 고통스러운 진실, 게다가 주류 학문과의 쟁론 덕에 지식의 ‘시련’ 즉 ‘테스트’를 거친 진실을 말이다. 쾨셰양의 저서는 우리가 이 고통스러운 진실과 마주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는, 교과서의 외양을 한 무기를 2020년의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이제 이 현실과 싸워나가는 것은 대학이라는 제도 바깥으로 결국 나가야만 할 연구자들의, 그리고 이 연구자들과 함께할 독자들의 몫이다.


배세진 파리 7대학·정치철학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의 재구성: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논의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파리7대학 사회과학대학의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같은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정치철학 전공으로 미셸 푸코와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연구』, 알튀세르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검은 소』, 제라르 뒤메닐·에마뉘엘 르노·미카엘 뢰비의 『마르크스주의 100단어』, 자크 비데의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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