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시대를 가로질러 현대인의 삶을 조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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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시대를 가로질러 현대인의 삶을 조망하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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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인간의 내밀한 역사: 과거와의 대화는 어떻게 현재의 삶을 확장하는가 | 시어도어 젤딘 지음, 김태우 옮김 | 어크로스 | 736쪽

옥스퍼드의 역사학 석학 시어도어 젤딘은 독창적인 역사 연구로 역사학계에 우뚝한 발자취를 남긴 역사가이자 사상가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는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2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고독, 사랑, 공포, 호기심, 연민, 우울, 대화법, 섹스와 요리법, 이성애와 동성애, 운명 등 독특한 주제를 중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류의 경험’을 고찰한다. 이 책은 각 장의 전반부를 각계각층의 프랑스 여성들과의 인터뷰로 열어젖힌다. 가정부, 순경, 농부, 간호사, 세무 조사관, 의사, 시장, 화가, 언론인, 실업자 등에서부터 심지어는 부랑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속해 있고, 또 우리 주변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들이 번민하고 소망하는 주제들, 무기력, 사랑, 욕망, 외로움, 우정, 권력, 존경심 등을 중심으로 인류가 이런 주제들에 어떻게 대처해왔는지를 살핀다.

1장에서 독자들은 “내 인생은 실패했다”라고 결론짓는 쉰한 살의 쥘리에트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정부였고 그녀도 평생 가정부 일을 해왔으며 자식들 또한 그와 흡사한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삶이 바뀔 수는 없었을까? 만약 바뀔 수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미래에 대한 새로운 삶의 비전은 과거를 새롭게 봄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저자는 인류사 전체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다. 쥘리에트의 불행 이면에서 젤딘은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하거나 혹은 그렇게 취급되어온 모든 사람들을 본다. 자기 삶을 소유하지 못하고,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며, 남들의 의지에 따라 생이 결정되어온 사람들의 역사를 본다. 젤딘은 여기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노예제의 역사를 살피기 시작한다. 노예제 폐지가 삶에 대한 체념을 종식시킨 것은 아니었다. 젤딘은 자유란 단지 법으로 보호되는 권리의 문제만은 아니며, 오늘날 희망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전망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고 역설한다.

▲ 시어도어 젤딘(Theodore Zeldin)
▲ 시어도어 젤딘(Theodore Zeldin)

젤딘의 해법은 현미경과 망원경 둘 다를 통해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현미경을 통해서는 생활 속에서 가장 밀접하게 마주치는 세부적인 것들을 보고, 망원경을 통해서는 원거리에서 큰 문제들을 조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앞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선택권이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젤딘은 특히 그동안 역사의 결론처럼 받아들여지던 생각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며 인간 사이의 갈등은 해소할 수 없다는 해묵은 오해에 도전한다. 그는 오늘날 존재하는 반목이 역사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며, 미래의 결론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주목을 얻지 못했던 생각들, 인류가 여성과 남성 사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 계층과 인종 사이에 놓인 벽을 뛰어넘으려 애썼던 순간들을 복원해낸다. 인류는 전 시대에 걸쳐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우정을 발명해내고, 낯선 이에 대한 적대감에 저항해왔으며, 존경을 주고받는 관계를 모색해왔다. 젤딘은 전쟁과 갈등의 역사만큼 이해와 관용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도교의 사원은 단순히 신을 모셔놓은 장소가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대화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곳, 음악과 연극과 장기와 독서와 무예와 의료 모임들이 각각 자신들이 믿는 신을 모셔놓고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은 ‘성전’이라는 율법으로만 읽히는 코란의 메카 장에는 전쟁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처음 250년 동안 이슬람교는 각 개인의 이성과 코란 해석에 관해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이슬람교를 단층적이고 변하지 않는 단일체로 인식하는 외부인들은 이슬람교 전통의 풍요로움,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의 역사와 공유하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인간 내면의 믿음은 오직 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이 갖는 중요성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셈이다. 예수가 코란에 93번 언급된다거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중세 이슬람 철학자 이븐시나를 251번 언급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시 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눈부신 성취는 틈새에서, 이질적인 사상과 문화의 만남에서 탄생해왔다. 이것이 타인에 대한 냉소와 증오로 얼룩진 세계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내가 독자들에게 제공한 안경은 그런 수정을 돕고, 역사가 과거에 이루어졌던 것처럼 그렇게 될 필요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오늘날 존재하는 것들이 역사의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역사가 사람을 구속하는 곳에서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불가피함이나 필연성을 암시하지 않고 인간의 경험 전체를 어떤 뚜렷한 목적을 이끌어내는 원천으로 제시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썼다. 인간의 과거 경험은 또한 방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25장 ‘영혼의 동료 사이에 가능한 일’ (6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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