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몽테뉴를 그린 내밀하고 사적인 여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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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몽테뉴를 그린 내밀하고 사적인 여행 일기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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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몽테뉴 여행기 | 미셸 몽테뉴 지음, 뫼니에 드 케를롱 엮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520쪽

1770년 어느 날, 지역사와 관련해 자료를 조사하던 샹슬라드 사제가 몽테뉴성에서 200년 동안 숨겨졌던 원고를 발견한다. 『수상록』의 저자로 알려진 몽테뉴의 여행 일기였다. 이 일기에는 1580년 6월 22일부터 이듬해 11월 30일까지 그 여정이 담겨 있다. 신장결석을 앓고 있던 몽테뉴는 치료를 위해 본인의 성을 떠나 파리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일대를 다녀온다. 아픈 와중에도 그는 현지의 풍습과 사람들을 자세히 바라보고 기록한다. 덕분에 우리는 최초의 근대인의 눈으로 16세기 유럽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출간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기에 이 책에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인간 몽테뉴의 사적이고 친근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수상록』보다 더 에세이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이 책은 현대어 판이 아닌 18세기 케를롱 판본을 완역한 것으로, 400년이 넘는 시대 차를 넘어 몽테뉴를 더 가깝게 만나볼 수 있게 우리를 안내해 준다.

사상가 몽테뉴는 호기심 많고 편견 없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그는 여행지의 풍경과 풍습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여행지에서 들은 이야기와 직접 경험한 일들을 생생한 에피소드들로 펼쳐놓는다.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는 이탈리아 로레토의 작은 교회에서 비싼 값을 주고 가족들의 초상화를 제작해 벽에 걸며 가족의 평안을 빌기도 하고, 한 서점에서는 우연히 보카치오의 유언장을 발견하고 감명을 받기도 한다. 여행자가 여행지에서 경험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우연한 발견이 주는 감동을 보여준다. 여관 주인들이 잘 차려입거나 직접 말을 타고 마중 나와 자신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오라고 호객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고, 하인을 시켜 여러 여관을 돌며 흥정하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여관 주인과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서는 알뜰한 장기 여행자의 면모도 보인다. 또 한 수도원에서 장례식 의례를 누가 주도하느냐를 두고 육탄전이 벌어져, 결국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는 소문을 전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이처럼 몽테뉴가 묘사하는 풍경들은 몇세기 전의 일임에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 닮아 공감과 웃음을 자아낸다. 가는 곳마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며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몽테뉴의 일기는 단순한 관광으로는 감히 누릴 수 없는 직접적인 체험으로서의 자유로운 여행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몽테뉴는 여행지에서 본 모습들을 풍경화를 그리듯 기록한다. 온천 풍경을 예로 들어보자. 신장결석을 앓으며 아픈 몸으로 여행하는 몽테뉴의 여정에는 온천지도 포함이 되어 있다. 덕분에 우리는 16세기 유럽에서 사람들이 온천을 이용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에는 지역과 온천마다 전해지는 일종의 온천 이용 관습이 있었는데, 몽테뉴가 특히 오래 머물렀던 빌라 온천에서는 보통 정수리 부분에 있는 머리카락을 밀고 그 위에 머리를 보호하는 작은 천 조각을 올려놓고 온천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몽테뉴는 민머리인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관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의사의 처방전에 온천 이용 방법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는데, 의사마다 처방이 달라 몽테뉴가 본 스무 개의 처방전 중에 온천물을 마시는 법, 온천을 하는 법에 관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본인이 내린 것과 다른 처방은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고. 물론 몽테뉴는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온천을 이용했다.

여행하며 여행지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던 몽테뉴는 빌라 온천에서는 마을의 관습에 따라 무도회를 열었는데, 시상식에 쓸 선물의 종류와 개수(모슬린 천으로 된 앞치마 두 장과 장식용 핀을 담는 상자 네 개, 펌프스 구두 네 켤레, 슬리퍼 한 켤레, 머리망 세 개와 머리카락을 땋을 때 필요한 도구 세 개 등), 가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시상식의 풍경을 그리듯 묘사해놓아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 정서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몽테뉴 여행기』는 기존 역사서에서 보기 어려운 16세기 유럽 현지의 풍속과 현지 사람들의 생활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그런 까닭에 지배층 중심의 정치사에 집중했던 기존 역사관에서 벗어나 민중, 특히 여성과 노동자의 일상을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저자)이 자신의 책에서 『몽테뉴 여행기』를 언급했을 것이다. 몽테뉴의 눈으로 세밀하게 기록한 16세기 유럽의 풍경은 자유로운 영혼을 따라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고수한 아날학파의 관점을 공유하는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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