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을 모르고서는 결코 주자 철학을 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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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을 모르고서는 결코 주자 철학을 논할 수 없다
  • 주광호 동덕여대·동양철학
  • 승인 2020.10.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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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역학과 주자학: 역학은 어떻게 주자학을 만들었는가』 (주광호 지음, 예문서원, 520쪽, 2020.09)

‘역학’과 ‘주자학’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이 책을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주자학이다. 내 전공은 유학儒學이고 그중에서도 주자학朱子學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철학은 워낙에 규정하기 애매한 대상이기에 저마다의 규정들이 있어왔고 또 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유학과 주자학 역시 연구자들마다의 다양한 규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그렇게 새롭게 규정하는 작업 자체가 과거의 사유를 오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문학에서의 모든 ‘새로운 규정’ 혹은 재해석은 일정 정도 연구자가 처한 시대적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자들은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합일’ 혹은 인격적 완성과 그 사회적 실천을 유학의 목적으로 공인해 왔다. 이 점에 있어서는 현대의 연구자들 역시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서 이러한 시각은 불가피한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지난 세기 초 모종삼牟宗三 · 풍우란馮友蘭 등 서양식 학문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서양의 언어로 동양의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의무 의식을 지녔다. 그래서 그것은 자연스레 논리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과 사회의 분화는 그들의 철학을 즉 동양철학을 자연스레 ‘내면의 본질’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서양 문명의 침탈에 맞설 자기 위안의 무기가 필요했던 절박함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유학의 내면화’ 경향은 한 세기를 넘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전통의 유자들처럼 과거科擧를 통해 직접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술적으로도 정치학 · 사회학과 같은 여러 분과 학문이 발달한 지금, 철학의 자리매김을 ‘내면의 인격 완성’으로 집중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와 방법으로서의 본체론 · 심성론 · 공부론을 연구하는 것이 유학 혹은 주자학 연구자의 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됐을 때 동북아를 지배해온 주자학의 800년이 해명되지 않는다. 그 지배는 단순히 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위한 지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이 송대 성리학의 ‘집대성集大成’이기에 그랬다는 말 역시 설득력이 없다. ‘집대성’에는 주자만의 특징과 의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 연구의 일차적 목적은 주자학을 있었던 그대로 복원해 내는 것이다. 나는 주자학이 유학의 하나로서 ‘개인의 인격적 완성’에 집중하고 그 이론적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주자학의 출발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주자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연구자들이 다루는 ‘텍스트’의 문제가 깊게 개입된다. 그것이 두 번째 ‘역학’의 문제다. 역학易學은 동양의 가장 오래된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 관한 학문이다. 따라서 주자의 역학 역시 주역이라고 하는 텍스트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대부분 동양의 사상가들은 경전의 권위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정당화한다. 특히 송대 성리학자들은 주역과 <사서四書>를 주목했다. <사서>의 체계를 완성한 것이 주자다. 이렇게 텍스트와 사유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연구자들은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경학經學’이라고 부르면서 사유의 본령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주자의 역학은 그의 예학禮學이나 사서학이 그런 것처럼 주자학 자체가 아니다. 주자학은 이런저런 텍스트학을 제외한 순수하게 본인의 입에서 나온 것만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니 그 자료는 어록이나 문집 정도로 한정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전히 이기理氣 · 심성  · 수양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텍스트에 의해 분리하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의 역학 역시 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위해 기능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주자의 역학은 윤리학적이지도 형이상학적이지도 않다. 그는 일관되게 주역을 점치는 책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주역을 인격의 완성과 정치적 실천의 교재로 삼았던 스승 정이程頤의 역학을 오히려 비판한다. 그럼 그의 역학은 정말로 그의 사상 즉 ‘주자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주자의 상수학象數學 즉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선천역학先天易學>에 주목한 것이다. 이 도식은 주자 스스로 주역의 근거라고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중 그 어떤 것도 실제 주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들은 모두 북송 유자들의 창작이다.

이 그림들은 인격의 완성이나 사회적 실천 더 나아가 점占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는 이것들이 주역의 근거라고 수없이 ‘주장한다.’ 주자는 왜 그다지도 이 그림들을 중시한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균형과 질서’로 읽었다. 주자의 상수학은 철저하게 기하학적 대수학적 균형과 질서를 상징한다. 좌우 혹은 동서남북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룬다. 주자는 상수의 이 균형과 질서로부터 세계의 질서와 체계를 읽어낸 것이다.

태극太極이라는 하나의 ‘중앙’으로부터 만물 만사로 확장되는 이 세계는 철저한 법칙과 관계 속에 놓여 있다. 황제와 관료, 부모와 자식, 지역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독립적이고 파편적인 제멋대로의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관계와 질서의 체계는 공부와 시험의 교재로서의 <사서>로, 일상의 행위 지침으로서의 예학으로, 교육 제도로서의 서원書院으로, 향촌의 도덕적 지배 질서로서의 향약鄕約으로, 경제적 조직으로서의 사창司倉 등으로 구체화 된다. 황제를 향한 상소문으로부터 백성 하나하나를 위한 향약에 이르기까지 주자는 세계를 질서와 법칙에 맞게 규율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체계는 우주적 질서를 내면화한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그 구체적 절목은 주자 자신이 고안한 것이며 한번 정해진 체계와 규범은 구속력을 지니게 마련이다 - 그 구속력은 서양의 충격이 있기까지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 주자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믿었지만, 그것에만 기대지 않았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길러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제도와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면의 본성과 심리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 다 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천적 참여 속에서 인격적 완성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잘 짜인 관계망이며, 그것은 변하지 않는 법칙에 의해 굴러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소위 ‘유학의 내면화 경향’은 다시 검토되어야만 한다. 최소, 여타의 송명 성리학자에 비해서 주자는 분명히 그렇다. 주자학에서 내면의 문제는 물론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그것은 아주 엄연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고 또 그럴 때만 의미를 지닌다. 그의 세계관과 사유방식은 생물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이기보다 기하학적이고 체계적이다. 사실상 경전으로서의 주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의 상수역학으로부터 우리는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역학을 모르고서는 주자학을 논할 수 없다.


주광호 동덕여대·동양철학

고려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북경대학에서 「朱熹太極觀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주역, 운명과 부조리 그리고 의지를 말하다』, 『맹자, 나를 이기는 힘』,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역학철학사』(전8권, 공역), 『중국사상사』(공역), 『유가철학, 감정으로 이성을 말하다』(공역)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周易本義의 성리적 성격에 관한 연구」, 「신화적 사유로 본 북송성리학에서 ‘생성’의 의미」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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