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와 창조의 미학, 다다이즘 세계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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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와 창조의 미학, 다다이즘 세계로의 초대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10.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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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시대로부터의 탈출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13) | 후고 발 지음 | 박현용 옮김 | 나남 | 504쪽

다다이즘의 창시자인 독일 문호 후고 발의 예술정신이 응축된 저작으로 20세기 초, 타락한 시대와 온몸으로 부딪쳤던 선구적 예술가의 뜨거운 기록이다. “다다이즘 운동의 도덕적, 철학적 기원에 대한 증거”이자 “다다이즘에 대한 가장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다다이즘의 태동과 의미 및 활동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스위스 취리히에 모인 예술가들은 현대 예술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마련한다. 삶이 전쟁과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던 시대, 다다이스트들은 삶과 유리된 예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이 초래한 살육에 대한 냉소에서 더 나아가, 근대 이후 유럽을 지배해 오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와 문화적 가치를 부정했다. 전통적 예술 형식의 파괴와 부정을 주장하면서, 혼돈과 순수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포함해 비이성적이고 반문화적인 예술 운동을 전개했다.

후고 발이 문을 연 다다이즘 운동의 산실인 카바레 볼테르의 공연에서는 다다이즘의 본질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시 낭송과 산문 낭독, 합창, 클래식 연주, 즉흥 연주와 즉흥적인 극,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작품’이 소개되었다. 기상천외한 발상과 생동감이 넘치는 카바레 볼테르의 퍼포먼스는 ‘무례한 제스처’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형식의 파괴를 통해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다다이즘은 예술이 성찰과 반성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속물화되어 가는 시대를 목격하면서, 예술의 자살을 꿈꾸었다. 이는 한마디로 유럽의 근대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이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였다. 기존 질서를 조롱하며 반(反)예술의 난장을 벌인 다다이즘은 마치 열병처럼 타올랐다가 꺼졌지만, 서양 예술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며 20세기 현대 예술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다다이즘의 가장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다다이즘의 태동과 본질적 의미, 그리고 활동 과정을 내밀한 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또한 20세기 초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대 속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한 발의 고민과 사상적 전환뿐만 아니라 헤르만 헤세를 비롯한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교유까지 망라한다.

▲ Hugo Ball, 1916
▲ Hugo Ball, 1916

후고 발이 시인 차라, 휠젠베크, 추상화가 칸딘스키 등과 함께 강연, 토론, 공연, 전시회를 통해 다다이즘을 창시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린 이 책은 1910년에서 1921년까지 후고 발의 일기 형식의 글을 모은 것으로, 20세기 초반 세계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부딪쳤던 한 예술가의 내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작품에는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시대에 단상과 성찰, 예술의 역할에 대한 발의 고민과 사상적 전환, 예술관이 담겨 있어 당시 예술가를 비롯한 지식인 계급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후고 발은 시대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시대와 정면으로 싸운 예술가였다. 그는 자신 안에 상호 대립적인 세계관과 예술관을 지닌 인물로, 표현주의와 무정부주의, 다다이즘을 거쳐 말년에는 가톨릭에 귀의하는 등 진폭 넓은 사상의 흐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발의 이러한 다채로운 사상적 흐름의 바탕에는 ‘개인 자유의 열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발은 자신의 시대가 악마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늘 생각했고, 평생 ‘시대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다.

발은 또한 합리성보다는 본능적인 창조에 기반을 둔 예술을 추구했다. 그는 물질적이고 야만적인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적극적으로 소외시키면서 원시적인 것, 특히 원시인의 무시무시한 가면에서 친밀감을 얻었다. 그것은 ‘치욕적 현실을 가린다’는 뜻이자,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예술가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가 사회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 예술가는 ‘위장한 관객’으로서 야만적 현실에서 대중을 구하는 존재임을 상징하기도 했다. 발은 새로운 예술을 통해 대중을 구원하고 시대의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가 시대로부터 탈출해 가고자 했던 지향점은 다름 아닌 순수한 예술의 세계였던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세계적 문호 헤르만 헤세와 발의 특별한 인연이 기록되어 있다. 사후 같은 곳에 잠들 정도로 막역했던 두 사람은 암울한 시대에 삶과 예술의 방향을 논했다. 헤세는 발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고 발은 헤세의 전기를 유작으로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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