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과잉 정치화와 미성숙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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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과잉 정치화와 미성숙사회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0.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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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전현직 법무부 장관의 자녀문제를 둘러싼 정쟁이 거의 1년 동안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사회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기라며 한국판 뉴딜종합계획을 내세우고 코로나 상황임에도 중단 없는 경제성장과 공정경제를 만들어 세계적 선도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정부와 여당의 야심찬 계획인데, 180석 가까운 여당 의원 중 지난 1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보여준 인상적인 정치활동은 다소 과장해서 전현직 장관 자제에 대한 엄호사격이다. 최소한 많은 국민들에게 특정 정치인들은 그렇게 각인되고 있다. 두 전현직 장관 자제들을 대상으로 언론이 희화화한 ‘아빠찬스’, ‘엄마찬스’라는 표현도 참으로 민망하고, 자녀들의 문제만 주구장장 정쟁의 대상으로만 삼는 야당의 정치 콘텐츠도 애처롭기는 마찬가지지만, 솔직히 공중파를 통해서 그 아빠, 엄마들의 삼촌과 이모뻘 되는 의원님들의 엄호사격 논리 또한 가만히 듣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낯 뜨겁고 민망한 것들이 적지 않다. 엄마, 아빠 빽도 없고, 잘 아는 삼촌, 이모뻘 지인들도 부족해서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세월호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에 그 정성을 들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아무튼 여기서 다시 어느 한쪽 논리의 옳고 그름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코미디 같은 정치희극에서 철저하게 사라진 당사자 이야기는 언급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빠, 엄마세대는 안중근 의사만큼의 기개는 아니더라도 나이 20대 초반에 시위와 공공기관 점거로 경찰서와 감옥도 오가고 엄혹한 시절 법정에서 구호도 외쳤던 소박한 기개라도 보여줬다. 반면, 현재의 청년들은 철저하게 정쟁에 목마른 야수의 발톱에 짓밟힌 희생양의 모습이거나 상황이 고약해진 아빠, 엄마대신 팔 걷고 나선 삼촌, 이모들의 보호가 절실한 순한 양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시대적 상황이 다르니 다시 진부한 세대론으로 회귀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요즘 청년들은 이전 세대보나 더 자의식도 강하고, 독립적이라면서 막상 일이 터지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부모님 때문에 더더욱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는 아재들의 과민한 걱정도 있지만, 독재정권 아래서도 부친이 권부의 핵심에 있으면서 자녀는 시위를 해서 붙잡혀가는 휴먼 드라마는 있었다. 본인 문제가 몇 달 동안 언론에 도배를 하는데, 막상 20대 중반의 당사자는 꿀 먹은 벙어리인 게 답답하다. 물론 청년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부친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개인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가끔 SNS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문준용씨의 용기는 가상하게 느껴진다. 젊은이가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의 교육중산층 청년들은 20대 중반이 되어도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지인들의 엄호 속에 살아가고 그걸 ‘정치 폭거이냐, 아니냐’라고 정쟁을 벌이는 현실이 문득 안타깝게 느껴진다. 27세에 판서를 했다는 조선시대 남이장군은 역사적 위인이니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치더라도, 16세 그레타 툰베리는 복지국가 스웨덴의 청년이라서 혹은 별난 DNA를 가진 청년이라서 트럼프와 맞장을 뜨기라도 한 것일까? 당사자 젊은이에게 가혹한 비난을 하고픈 생각은 아니나 상황이 이 지경으로 확산되기 전에 좀 더 뚜렷하게 자기 입장을 밝혀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청년정책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정부의 청년정책이 182개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청년정책도 부지기수다. 이제는 청년사업이라고 할 만큼 연구자나 사회운동가, 정치가가 청년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열심히 청년을 모시면 정부가 표창도 주고, 청년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 자리도 준다. 그런데 막상 청년은 항상 손님이고, 보호의 대상이다. 청년정치를 강조한다는 모든 정당에서 청년대표든 청년 몫의 자리는 여전히 아재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고, 그 범위도 사실은 미디어에서 그럴싸한 그림이 나오는 명문대 청년 수준에서 정해진다. 젠더가 특화된 시기인 만큼 청년 여성의 상품성도 높아졌다(여성을 희화화할 의도는 결코 아니다!). 특정 지위에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불쾌할 수 있겠지만 이들 중 여전히 아래에서 전투를 거쳐 정당 내의 특정 지위에 올라간 청년 정치인은 기억에 거의 없고 아재세대(이하 아재는 삼촌과 이모 모두 포함된 중의적 의미)에 의해 선택되거나, 간혹 있다하여도 섣부른 쇼 이후 사라진 걸 흔히 보았다. 지위라는 기성세대의 정치적 자산이 없으면 정책 대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선언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보정당의 한 젊은이가 사라진지 몇 년 되었다.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아재세대가 청년을 온정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한 청년의 자립화는커녕, 청년정책은 과잉화되고 청년의 미성숙화만 가속화될 뿐이다. 20대 중반의 청년을 두고 부모도 ‘우리 아이’, 삼촌, 이모들도 ‘그 아이들’이라는 지칭 대명사를 별 부끄러움이 없이 사용한다. 이전 같으면 결혼해서 애를 낳아 부모라도 되었을 법한 연령의 청년에게 ‘아이’라는 명칭을 그냥 편하게 쓰는 미성숙한 사회가 현재 우리사회의 모습인 듯하다. 아재들은 그 아이를 언제, 어떻게 어른을 만들어주려는 것일까?

요즘 지자체에는 청년조례도 있고, 청년들을 위한 청년공간도 여러 개 있다. 마음씨 좋거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아재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청년공간을 몇 차례 방문해보니 활용빈도가 너무 없다. 기성세대의 선심성 정책과 청년 당사자 니즈간의 전형적인 미스매칭이다. 청년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저학력, 학력이탈자 청년들은 대부분 그런 공간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공간을 만드는데 아재들과 조력한 장래의(?) 청년정치인들은 그 공간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거 같다. 물론 상황이 어떻든 정부와 시민단체의 아재들은 어느 지자체에 청년공간이 몇 개나 있는지 숫자로 청년정책의 성과를 꿋꿋하게 평가할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다. 청년의회, 청년공동체 등 도대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연습해야할 훈련장소가 너무 많다. 피선거권이 있는 청년을 그냥 제도권에 들여놓으면 될 것을 실험실의 원숭이처럼 언제까지 모의훈련만 시킬 것인가? 이같은 설익은 실험만 하는 동안 청년들은 계속 미성숙한 보호의 대상으로만 머물 뿐이다. 이는 우리사회의 ‘미성숙화’와 엄빠 찬스로 대변되는 ‘사회관계의 봉건화’만 자초할 뿐이다.

이제 기성세대는 요즘 청년들이 이전과는 다르다고 인정만하지 말고 그냥 권력과 지위를 양보하는 미덕이 필요하다. 거창한 세대교체에 대한 논의도 필요 없다. 시행착오가 있어도 괜찮다. 기성세대도 다 그렇게 지나왔기 때문이다. 제발, 애들 취급 그만하고, 청년을 성인으로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지는 말, 꼭 아재들에게 권하고 싶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비판사회학회에서 발간하는 <경제와 사회> 편집위원장, 한국이론사회학회 부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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