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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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 정영기 서평위원/호서대·과학철학
  • 승인 2020.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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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1962년은 과학사에 있어 의미 있는 해이다. 기념비적인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한 권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고, 다른 한 권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다. 살충제의 폐해를 알린 『침묵의 봄』은 이후 환경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계에 많은 논쟁거리를 주고, 과학계 이외에 인문사회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구글 학술 검색에 따르면 2020년 10월 현재 121,868회 인용되었다. 이언 해킹(Ian Hacking)은 『과학혁명의 구조』 2012년 50주년 기념판 소개 글에서 “위대한 책이 드물지만, 이 책은 위대한 책 중의 하나다.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소개 글이 실린 과학혁명의 구조 50주년 기념판
▲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소개 글이 실린 <과학혁명의 구조> 50주년 기념판

토마스 쿤(Thomas S. Kuhn)은 원래 이론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인문계 학생들을 위한 과학사 강의를 권유받고 과학사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역사를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역사는 현재 우리가 가진 과학관에 결정적인 변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쿤에 의하면 『과학혁명의 구조』의 목적은 “실제 탐구 활동 자체의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전면적으로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찾는 것이다.” 이언 해킹은 앞의 소개 글에서 쿤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그 당시 쿤(1922~1996)과 비교될 수 있는 철학자로 칼 포퍼(1902~1994)를 들 수 있는데, 포퍼가 과학에 대해 규범적, 논리적으로 접근했다면 토마스 쿤은 과학에 대해 역사적, 서술적으로 접근했다. 이를 두고 과학철학자인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는 칸트의 말을 약간 바꿔서 “과학철학 없는 과학사는 맹목이고 과학사 없는 과학철학은 공허하다”라는 말로 두 사람을 비판하고 두 견해를 종합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년 7월 18일 - 1996년 6월 17일)
▲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년 7월 18일 - 1996년 6월 17일)

쿤은 먼저 전통적 과학관에 대해 비판했다. 첫째, 과학의 변화와 발전은 누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전통적 과학관에 의하면 과학에서 후속하는 이론은 선행하는 이론을 포함하여 항상 누적적인 발전을 이룩해 왔다. 그러나 쿤은 과학적 이론의 변화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둘째, 쿤은 과학자 공동체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흔히 진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그 진리를 발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쿤에 의하면 진리는 과학자 공동체 즉, 전문가 집단이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셋째는 둘째와 관련되는데,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은 전문가 집단의 상호주관성에서 찾아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이 개개의 과학자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쿤에 의하면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자들 개개인의 주관이 상호 간에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확보된다는 것이다.

쿤은 비판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가 말하는 과학혁명의 순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전(前) 과학(prescience)--정상 과학(normal science)--위기(crisis)--혁명(revolution)--새로운 정상 과학--새로운 위기

쿤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이론에서 핵심적인 개념인 "패러다임(paradigm)"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또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쿤 자신은 『과학혁명의 구조』 제2판 후기에서 패러다임이 첫째, 과학공동체(scientific community)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믿음, 가치, 기술 등 총체를 지칭하며, 둘째, 이 같은 구성체 중 한 요소로서 다른 문제해결을 위한 모델과 범례(exemplar)로서 사용되는 구체적인 문제해결의 예를 지칭한다.

쿤은 과학의 역사에 대해 대담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사에는 ‘정상 과학’과 ‘위기’와 '과학혁명'이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에 기초한 정상 과학은 변칙 사례들이 누적되면 위기에 도달하며, 이때 새로운 이론들이 정립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패러다임 전이(paradigm-shift) 즉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과학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을 정비하거나 확장함으로써 성취되는 누적적인 과정이 아니다. 패러다임의 전이는 패러다임 방법과 그 적용은 물론 가장 기초적인 이론적 일반화의 일부까지도 변화시키는 하나의 재구성인 것이다. 전이가 완료되면 그 분야에 관한 관점, 방법, 목표 등이 변화한다. “과학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이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대치되는 비누적적인 발전과정이다.” 쿤은 과학혁명의 역사적인 사례로 코페르니쿠스, 뉴턴, 라보아제, 아인슈타인 등이 제시한 이론의 변화를 들고 있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주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도 다르며, 동일한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과학혁명은 공동의 전제가 변하기 때문에 세계관의 변화를 수반하며, 정치혁명과 종교개종에 비유된다. 쿤은 두 패러다임이 서로 단절적이며 두 패러다임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개념을 사용한다.

1962년 쿤과 파이어아벤트가 이론과 이론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약불가능성을 제시한 이후 이 개념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공약불가능성은 그리스 수학에서 "no common measure"라는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었지만 현대 과학철학에 이 개념이 도입되자마자 매우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개념이 되어 버렸다.

한 분야의 책이 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기도 어렵지만, 그 분야를 넘어서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는 더욱 어렵다. 쿤 이론은 자연과학의 성격과 구조를 이야기하거나 학문 일반의 방법론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관문처럼 인식되고 있다. 쿤 이후 과학사회학이 등장해서 많은 논쟁이 진행되었고 과학전쟁(science war)이라는 세계적인 지적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우리의 지적 세계에서 『과학혁명의 구조』 만큼 영향을 준 책을 찾기도 어렵다.


정영기 서평위원/호서대·과학철학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양철학(과학철학) 전공으로 호서대학교 창의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KAIST 대우교수, 충남대 초빙교수, 국회 입법고시출제위원을 역임했으며, 한국동서철학회 차기회장이다. 저서로는 <과학적 설명과 비단조논리>, <귀납논리와 과학철학>, <철학과 영상문화>, <논리와 사고>, <논리적 사고와 표현>, <인문학 독서토론 20선>이 있으며, 역서로는 <근대철학사-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 <현대경험주의와 분석철학>, <공학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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