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 연구의 새로운 관점, 『고려 말 조선 초 공문서와 국가 - 변혁기 임명문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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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 연구의 새로운 관점, 『고려 말 조선 초 공문서와 국가 - 변혁기 임명문서를 중심으로』
  •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고문헌관리학
  • 승인 2020.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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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

■ 역자가 말하다_ 『고려 말 조선 초 공문서와 국가: 변혁기 임명문서를 중심으로』 (가와니시 유야 지음, 박성호 옮김,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84쪽, 2020.08)

이 책은 2014년 일본 규슈대학출판회에서 발행한 가와니시 유야(川西裕也) 박사의  『朝鮮中近世の公文書と国家 - 変革期の任命文書をめぐって』라는 책을 완역한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책 제목에 변화가 생겼다. 원저에서 ‘조선 중근세’로 표기한 것을 번역서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로 번역하였다. 일본 학계에서 ‘한국사’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조선사’로 지칭하고 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중세사와 근세사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다만,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기는 한국사에서 ‘고려 말 조선 초’ 또는 약칭하여 ‘여말선초’로 일컫고 있기 때문에 번역서의 제목으로는 ‘고려 말 조선 초’를 택했다.

이와 같이 일본 학계에서 출간된 한국 고문서 연구 성과를 한국의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군데군데 용어나 문투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책 본문의 첫 번째 문장부터 이런 고민은 시작되었다. 바로 한국사에서는 통상 ‘원 간섭기’로 지칭한 고려 말의 특정 시기를 원저에서는 ‘사원기(事元期)’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를 두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지칭하는 용어는 달라질 수 있다. 한국 학계에서도 고려 말 원(몽골제국)과 고려의 특수 관계가 형성됐던 시기를 ‘원 간섭기’, ‘원 복속기’, ‘몽골 복속기’ 등 여러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제도적으로 고려가 원에 대해 명백히 사대(事大) 관계를 형성한 시기를 ‘간섭’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지칭하는 것보다는 ‘사원(事元)’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기됐고, 저자도 이 주장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사원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역자의 입장에서는 원저의 주된 논제가 해당 시기에 대한 명칭 문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자가 고려 말 고문서를 통해 새롭게 부각시킨 ‘부마고려국왕’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하여 해당 시기를 ‘부마고려국왕기’로 번역하는 제안을 했고, 저자도 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이미 국내 학계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시기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요컨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이질적인 국가 체제가 양립한 단절된 시기로 볼 것인지 아니면 국호는 변했지만,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연속된 시기로 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 문제는 단지 국가 체제나 정치 제도만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시의 사상, 문학, 언어, 음악, 미술, 복식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이고 밀도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 고문서 연구가 기여할 지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성과가 최근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가와니시 유야 박사가 대학원 과정을 거쳐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탐구한 고려 말 조선 초 관료 임명문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이 시기를 바라보는 데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 駙馬高麗國王印
▲ 駙馬高麗國王印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심화시킨 결과물이다. 우선 일제강점기 이래 최근까지 한국에서 고문서 연구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꼼꼼하게 정리하면서 현시점에서 한국 고문서 연구의 중요성을 조명하고 보다 심화된 고문서학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각 장에서는 고려 말로부터 조선 초에 발급된 관료 임명 문서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집중하였다. 1344년(고려 충목왕 즉위년)에 신우(申祐)라는 인물에게 발급된 임명 문서는 ‘왕지(王旨, 왕명으로 발급된 임명문서)’의 서식으로 작성된 문서 가운데 유일한 고려시대 문서로 알려졌지만, 말 그대로 유일한 사례였기 때문에 그 진위나 의의를 조명하는 데 이견이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저자는 이 문서에 날인된 붉은 색 인장의 글자가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때 창안된 파스파 문자로 새겨진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이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이 문서의 신빙성을 높였고, 당시에 새롭게 출현한 문서 양식의 의미와 고려 말로부터 조선 초로 이어지는 일련의 임명문서가 보여주는 제도적 연속성에 대한 합리적인 논의를 펼쳤다.

또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관심을 쏟지 못했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존재했던 몇몇 고문서의 실체를 각종 문헌과 사진 자료 등을 통해 구체화시킨 것도 주목할 성과이다. 조선 후기 문인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에 고려 말과 조선 초 문서의 전사본이 다수 수록된 사실을 확인하고 해당 문서의 신빙성과 의의를 밝혔고, 원과 명에서 사용했던 차부(箚付)라는 공문서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한시적으로 관직 임명 문서로 사용된 사실도 규명하였다.

2014년에 이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저자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발급된 고문서의 실물 또는 단서를 지속적으로 추적하여 새로운 연구 결과를 계속 쏟아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1344년 왕지에 찍힌 파스파 문자 ‘부마고려국왕인’이 사용된 다른 사례 두 건을 추가로 학계에 보고하였다. 순천 송광사에 소장된 1281년(고려 충렬왕 7년)에 발급된 문서와 안동 태사묘에 소장된 1360년(고려 공민왕 9년) 공민왕이 내린 교서에서도 ‘부마고려국왕인’이 사용된 사실을 밝힘으로써 해당 문서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저자가 책의 서장(序章)에서 기술한 연구 의의를 인용하면서 역자의 짧은 소개 글을 맺고자 한다.

“부마고려국왕기로부터 조선 초기는 종주국인 원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고려가 정치·사회·문화적인 변화를 겪었고, 이를 계승한 조선왕조의 기초가 견고히 다져지던 중대한 변화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공문서 제도에도 영향을 미쳤고, 문서의 체계·체식·기능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략)… 공문서의 체계·체식·기능의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행정제도나 위정자의 정치사상과 같은 국가에 관계된 제반 요소를 해명할 수도 있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고문헌관리학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 말 조선 초 왕명문서를 비롯하여 한국 고문서의 제도, 양식, 변화상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말 조선초 왕명문서 연구』(한국학술정보, 2017), 「조선후기 고문서에 등장한 喪不着 표기의 기록문화적 의의」(『서지학연구』 78, 2019), 「새로 발견된 고려말 홍패의 고문서학적 고찰과 사료로서의 의의」(『고문서연구』 48, 2016), 『변화와 정착, 여말선초 조사문서』(민속원, 2011) 등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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