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뚫어 보는 눈으로 시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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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어 보는 눈으로 시를 논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0.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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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창해시안: 시를 꿰뚫어 보는 눈 | 이경유 지음 | 장유승, 부유섭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SKKUP) | 608쪽

이 책은 조선 후기 문인 이경유(李敬儒, 1750~1821)가 편찬한 시화(詩話) 『창해시안(滄海詩眼)』을 두 명의 고전문학자가 함께 현대어로 옮기고 주해와 서설을 단 것이다. 시 비평과 산문 비평, 야사 및 일화가 혼재된 대개의 시화들과 달리 ‘한시 비평서’의 성격이 뚜렷하고 중국의 시들에 대한 비평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단연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고 주류에서 밀려나 있던 당대 남인계 문단의 실상을 전하는 자료로도 일찌감치 주목 받아온 이 책은 이렇게 한 젊은 문객의 엄격하고 독자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시론을 품는다. “시의 묘리는 한 글자에 달려 있다”는 입론에 공감했던 조선후기 문인의 남다른 비평적 안목과 실천을 보여주는 문학 고전의 사례다.

이경유는 증조대에 경북 상주로 낙향한 남인계 가문의 자제였다. 부친 이승연은 여러 차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 이경유의 과거 급제를 간절히 기대하고 꼼꼼히 지도했으나 그 역시 과거에는 실패한다. 즉, 이경유 집안의 사회적 위상은 뚜렷이 쇠퇴하고 있었다. 이경유는 5세부터 『사략』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사기』 열전을 본떠 글을 지었다. 『좌전(左傳)』,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당송팔가(唐宋八家)의 글을 좋아했고, 시는 이백과 두보를 종주로 삼았으며, 특히 『당시품휘(唐詩品彙)』 읽기를 좋아해 죽을 때까지 암송했다고 한다.

『창해시안』은 이렇게 성장해간 이경유가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을 드나들던 시절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엮어낸 시화집이다. 출생과 삶의 근거지를 영남에 둔 그였지만,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역 인사보다 주로 선조(先祖)의 인적 관계망에 놓인 근기 남인이 다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경유의 비평론을 뒷받침하는 문헌이거니와 영남 지역에 국한된 문단사라기보다 그의 감식안 하에 근기 남인의 문학적 업적이 취합·평가된 저술로 보는 게 합당하다.

이 책에는 작가론·작품론·형식론 등 다양한 양상의 비평이 혼재한다. 얼핏 보기에는 산발적이지만 그 강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안목’이다. ‘시안’이라는 서명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경유가 말하는 안목은 단순히 가작(佳作)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는 표절과 위작을 알아보는 안목이다. 이경유는 한위시(漢魏詩)를 배우는 자들이 오로지 표절을 일삼는다고 한탄하며, 이처럼 표절과 위작이 횡행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참된 안목[眞眼目]’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창해시안』에는 표절과 위작을 지적하는 기사가 상당하다. 보건대 이경유는 이안중(李安中)이 당시(唐詩)를 표절하고, 조주규(趙胄逵)가 두보와 육유를 표절한 사실을 밝혀냈으며, 채홍리(蔡弘履)가 발굴한 일당시(逸唐詩)가 위작임을 간파했고, 김안국(金安國)이 가짜 일당시에 속지 않았다는 기사도 수록했다. 이경유는 고문사파의 문학론에 기본적으로 찬동하는 입장이었으며, 이들의 시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지만 표절은 배격했다. 표절과 위작을 간파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비평의 우선순위였다. ‘점화(點化)’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점화에 대한 이경유의 견해는 대체로 긍정적이며, 여러 사례를 들어 점화의 선례를 보였다. 특히 『동인시화』에서 인용한 45칙 중 점화에 관한 것이 10여 칙이다. 본디 점화와 표절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표절과 위작을 가려내고, 점화를 능숙히 하기 위해서는 전대의 시에 해박해야 한다는 점도 동일하다. 이경유는 과거의 문학적 성취를 학습함으로써 시를 창작하고 비평하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창해시안』에 기존의 문헌이 다량 인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시안의 두 번째 의미는 ‘자안(字眼)’이다. 이경유는 “시를 배우는 사람이 옛사람의 힘쓴 부분을 알고 싶으면 글자를 놓은 것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창해시안』의 한시 비평은 자(字)와 구(句) 단위에 집중되어 있다. 시 전편을 인용한 사례는 드문 편이며, 전편을 인용한 경우는 대부분 절구이다. 심지어 장편시에서 서로 떨어진 구절을 뽑아 하나의 연으로 구성한 예도 보인다. 이경유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곳은 시 전편의 유기적 구성보다 한두 글자의 절묘한 배치가 자아내는 풍격이었다. 인용한 기사도 자안에 관한 것이 많다. 『당음』에서는 정곡(鄭谷)이 제기(齊己)의 시에서 한 글자를 고친 일화를 인용했고, 『당시품휘』에서는 관휴(貫休)가 왕정백(王貞白)의 시에서 한 글자를 고친 일화를 인용했다. 『동인시화』에서도 소초재(蕭楚材)가 장영(張詠)의 시 한 글자를 고치고, 변계량(卞季良)이 김구경(金久冏)의 시 한 글자를 고친 일화와 이색(李穡)이 이종학(李鍾學)의 조언에 따라 한 글자를 고친 일화를 인용했다. 이경유는 “시의 묘리는 한 글자에 있다”라는 서거정(徐居正)의 발언에 깊이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어느 문헌에서 인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승려가 김창흡(金昌翕)의 시 한 글자를 고쳐주었다는 일화도 보인다. 자안에 관한 기사는 『창해시안』의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시안의 세 번째 의미는 독자적인 안목이다. 이경유는 당대 일각에서 유행하던 ‘고원신기(高遠新奇)’한 시풍에 비판적이었으며, 이러한 시를 “시도(詩道)의 일대 액운”이라 했다. 이는 18세기를 풍미한 ‘기궤첨신(奇詭尖新)’의 시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경유는 이러한 시를 두고 “후세에 본받는 사람이 있을까 두렵다”라고 맹렬히 비난했으며, 시선집에 선발한 것도 문제 삼았다. 참신한 시를 선호하지 않았다는 점은 다소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이러한 시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세간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시론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반박하기 어려운 권위 있는 비평에 대해서도 완곡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이경유는 남인 문단에서 손꼽히는 이서우의 시를 두고 ‘아름다운 시구는 몹시 드물다’ 하고, 최립의 시를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고 일축했으며, 퇴고(推敲)의 고사로 유명한 가도의 시구마저 ‘놀랍지 않다’고 폄하했다. 안목이 부족해서라고 겸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존의 비평에 동의할 수 없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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