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삶(Bios Theoretikos)’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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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삶(Bios Theoretikos)’으로의 초대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0.10.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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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_ 서유경 칼럼]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여태껏 상식으로 당연시됐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비상식과 몰상식의 표상으로 변해버리기 일쑤고, 애용하던 사소한 물건과 즐겨 찾던 장소도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만 실수를 막고 헛걸음하지 않을 수 있다. 점심 한 끼 간단히 해결하려 해도 QR코드나 수기 명부, 심지어는 열화상 카메라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게 요즘 우리가 사는 법이다. 예전 같으면 사생활 침해라거나 기분이 나쁘다거나 무례하다고 질겁할 일들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고 오히려 지각 있는 처신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기존의 틀과 관성의 법칙들이 무력화되는 까닭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을 처음 대하는 양 조심조심 다루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언제 우리가 요즘같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하고 산 적이 있었던가 싶고, 우리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약간은 ‘민망한’ 신선함마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직접 확인하려 드는 태도를 ‘사유하는 삶(Bios Theoretikos)’과 간단히 동일시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사유하는 삶의 필요성을 꾸준히 환기하는 회의주의의 유령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라는 사실이다. 그것의 최초 시점은 아마 2014년 세월호 침몰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확인된 국가 시스템 붕괴로 인한 정치적 권위 상실과 그즈음부터 양산된 음모성 가짜뉴스들이 SNS를 마구 도배하기 시작한 때였을 것이다. 참다못한 우리가 2016-17년 촛불혁명을 일으켰고 이윽고 국가 시스템을 정상화하여 정치적 권위를 복원했다. 그러나 이른바 조국 사태와 일련의 유사 사례에서 드러난 우리 엘리트층의 도덕적 취약성과 공·사 구분의 실종, 정의기억연대의 내부 고발과 단체 대표의 석연찮은 행적으로 인한 시민운동의 명분 훼손, 전광훈 목사의 사행성 일탈 행위로 인한 개신교의 권위 실추, 그리고 무엇보다 철저히 계산된 편익에 불나방처럼 달려 붙는 언론과 정치권의 보수-진보 진영싸움이 바로 우리의 냉소와 의심을 부추기는 영매였던 듯하다.

어쩌면 2020년 코로나19의 엄습은 단지 이 암울한 그림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갑갑하고 도무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바랄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이런 물음들에 누가 과연 그럴듯한 답을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왠지 니체와 아렌트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서 “니힐리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 가치들이 스스로 탈가치화하는” 현상, 즉 기성의 “가치, 의미, 바람직함에 대한 본질적인 거부”를 의미한다고 답한다. 요컨대 그는 니힐리즘의 핵심을 서구의 전통적 도덕의 붕괴 현상, 즉 우리 삶 속에서 이러저러한 판단의 기준으로 존재했던 기성 가치들의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책에서 우리는 “니힐리즘; 그것은 목표의 결핍,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결핍된 상태”라는 표현도 함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니체의 니힐리즘은 기성 가치체계의 붕괴 현상과 인간의 목표 의식 부재에 따른 무기력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면 이 인식론적 난맥상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무너진 가치체계를 대체할 대안을 찾는 것과 우리 인생의 목표 의식을 확고히 함으로써 우리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니체는 강하고 건강하며 자유로운 ‘주인 도덕’을 대안 가치체계로 추천하면서 미래 어느 순간에 그것의 담지자로서 ‘초인’이 도래할 것임을 예견한 바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초현실적인’ 초인사상이 나중에 아렌트를 통해서 어떤 현실적인 이론적 결실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1966년 초 뉴욕 맨해튼의 리버사이드 교회에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당시는 베트남전쟁이 확전 일로를 걷고 있었고 미국 내 여론은 하루가 다르게 존슨 행정부의 동남아시아 정책에 대한 반대로 기울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날 거기 모인 사람들 역시 그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 즉각 실행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초청 연사들의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로부터 직접 찾아보고자 했다. 거기 초청된 독일 실존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강연이 이런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킬 리 만무했지만,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그날 아렌트는 “우리가 어느 순간을 살고 있든 그 세계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바로 그 세계일 뿐”이라고 전제한 다음, 과거에 행한 어떤 행위가 현재의 맥락에서도 이전과 동일한 의미와 결과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위는 항상 그것의 특수한 조건들에 수반되는 우발성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그 어떠한 일반규칙이나 기준이라도 여지없이 무력화시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특수한 질문에는 반드시 특수한 답이 주어져야만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의 반정초주의적 사유법의 핵심이며, 니체의 니힐리즘과 초인사상이 현실 속 우리의 삶과 접맥되는 지점이다.

다시 2020년 10월 현재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면, 정치적 권위도 종교적 권위도 도덕적 권위도 다 무너지고, 좋든 싫든 예전에 익숙했던 우리의 관행들마저 하루가 다르게 낯선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고, 모든 게 다 의심스럽다. 이것은 말 그대로 총체적인 인식론적 혼돈 상황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혼돈 상황이 우리에게 가져온 귀한 선물이 하나 있다. ‘사유하는 삶’으로의 초대 말이다. 그것은 시효가 다 한 기성의 가치체계나 관성의 법칙에서 스스로 해방되라는 신호이며, 익숙한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보라는 시대적 요청이다. 이것이 ‘왜’ 선물인가. 아주 오래전 소크라테스가 말했듯,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교수로 현재 한국NGO학회 회장이다. 주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민주주의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와 『제3의 아렌트주의』(근간),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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