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흔적을 남긴다
상태바
말은 흔적을 남긴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10.04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25)_말의 흔적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있고, 인생에도 다양한 길이 있다.”

말은 사람의 이동과 더불어 도처에 그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이 동네 말과 저 동네 말이 닮은꼴인 경우가 많다. 조상 언어인 인구어 조어  *gʷr̥Hís에서 비롯된 ‘山’을 가리키는 고대 범어 giri가 동족어인 고대 교회 슬라브어  гора (gora), 알바니아어 gur,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토어 ǧar, 아베스타 페르시아어 gairi와 닮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닮은꼴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캄보디아 북동부는 라타나키리(Ratanakiri)라는 산악지대다. 이 지명 역시 범어 ratna에서 파생된 ‘보석’이라는 뜻의 크메르어 ratana와 ‘산’을 지칭하는 giri를 차용한 kiri의 합성어다. 라타나키리 남쪽에 자리한 몬둘키리(Monddulkiri)라는 지명에도 –kiri가 포함되어 있다. 말뜻은 ‘center of mountains’, ‘산들의 중심’이다. 어떻게 해서 캄보디아의 지명에 범어가 들어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캄보디아 이전에 앙코르 왕국(the Angkor Empire)이라고도 알려진 크메르 제국(the Khmer Empire, 802~1431년)이 있었다. 앙코르는 크메르 제국 시절의 수도였다. 현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캄보디아(Cambodia)라고 하기 보다는 캄푸치아(Campuchea) 또는 캄부자데싸(Kambujadesa)라고 말한다. 

▲ 앙코르 와트 전경
▲ 앙코르 와트 전경

크메르 제국의 공용어는 古 크메르어와 범어였다. 종교는 힌두교와 대승불교, 소승불교가 공존했다. 제국의 통치자와 수도의 이름을 보면 이들이 인도계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신진 인도계 세력이 역시 인도계인 구정권을 내몰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첸라(Chenla 또는 Zhenla: 真臘, 진랍)(550~802년)가 바로 크메르 왕국 수립 이전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가르침은 간결하면서 냉정하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諸行無常이다.
 
크메르 제국의 건설자인 자야바르만 2세(802-850)를 비롯하여, 수리야바르만, 마헨드라바르만, 찬드라무카바르만등의  왕명은 이들이 인도계임을 말해준다.

앞 정권인 후난(Funan: 扶南, 부남)(50/68~550/627년)왕국의 제후국이었다가 주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통치세력이 된 진랍(眞臘) 왕국의 수도는 슈레스타푸라, 바와푸라, 이사나푸라, 샴부푸라의 순으로 바뀌었다. 후난 왕국의 수도는 비야다푸라였다.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마지막 수도는 야소다라푸라 즉 앙코르였다.
 
이들 명칭에 사용된 ‘-pura’는 고대 범어로 ‘城’이라는 뜻의 말이다. 과거의 도시는 다들 성곽도시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서울인 漢城도 빙둘러 성을 쌓았고, 지금의 지명에 성북, 성남, 성동, 성내 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漢城이고, 漢陽이며, 또 漢江, 漢水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수도이고 수도 한복판을 흐르는 강인데 韓城, 韓江이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민족적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한강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가 중심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아니해서 중국의 양자강과 같으므로 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

결국 중국에 대한 일종의 모화(慕華) 아닌가? 전에는 漢이 크다는 우리말 ‘한’의 한자 표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씁쓸한 기분이다.

▲ 카슈가르 중심 모스크 광장
▲ 카슈가르 중심 모스크 광장

산을 가리키는 범어 ‘giri’의 변이형이 또 뜻밖의 장소에서 목격된다.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신장성 위구르 자치주의 오아시스 도시 카시(喀什, Kashi)가 그 장본인이다. 정확하게는 축소되기 전 카시의 위구르어 본명 카시가르(Kashgar)가 당사자다. 중국인들에 의한 카시가르의 借字 표기는 喀什噶爾 외 다수가 존재한다. 기원 후 2세기 학자 프톨레미는 『地理誌』라는 저서에서 Kashgar를 Kasia라 언급했다. Kashgar에서 kash는 ‘바위’를 뜻하며, gar는 동부 이란어 -γar에서 비롯된 말로 의미는 ‘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매우 다르다. 玉산지로 유명한 인근도시 호탄의 지명과 강이름에 사용되는 Karakash(흑옥)와 Akkash(백옥)에서 보듯 kash(~qash)는 玉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즉 Kashgar는 玉山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 캄보디아 라타나키리의 이약라옴 호수
▲ 캄보디아 라타나키리의 이약라옴 호수

이쯤에서 지나친 관심이 초래한 에너지 소비에 대해서 고백하는 게 좋겠다. 인도 북서부 잠무-카시미르주에 속하는 고산지대에 까르길(Kargil)이라는 소읍이 있다. 25년 전 쯤 Andrew Harvey의 체험소설 Journey in Ladakh를 번역하다가 까르길이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까르길에서의 ‘길’이 우리말 ‘길’과 같은 뜻의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으로 어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지명은 ‘城’이라는 의미의 Khar와 ‘중심’을 뜻하는 rKil의 합성어라고 한다. 본래 이 지역이 인도 라다크의 수도인 레와 잠무-카시미르주의 주도인 스리나가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음에 비추어 타당한 명칭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먼저 Khar의 어원을 인도 아리안어 祖語 *kʰáras.에 둔 khára라고 한다면, 이 말의 의미는 ’당나귀‘ 또는 ’노새‘에 해당한다. 만일 인구어 조어의 어근 *kar에서 어원을 찾는다면 그 말뜻은 ’돌‘이 될 것이다. 전자는 이곳의 길 사정이 고대에는 나귀나 노새나 다닐 정도의 협로였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후자는 이 지역이 온통 돌투성이이기 때문에 역시 지명에 사용될 법하다고 판단된다. 아무려나 사람의 말은 길 따라 흥미로운 흔적을 남긴다.

▲ 까르길 전경
▲ 까르길 전경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산을 뭐라고 지칭했을까? 퍼뜩 드는 생각이 ‘메’와 ‘뫼’다. 이 말은 어떻게 해서 우리말이 된 것일까? 긴 설명이 필요할 것이나 출발지만 말하자면 인도다. 인도 서북부의 Jaisalmer, Kashmir에 사용된 –mer와 –mir가 ‘언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파미르 고원은 산꼭대기에 야생파가 자라고 있다 해서 붙여진 명칭으로 한자어 표기가 총령(蔥嶺)인 것은 그 때문이다.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주문진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배경 또한 이채롭다. 1734년(영조 10년)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주문리가 사기리, 교항리, 향호리와 더불어 연곡면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항구가 생기면서 새롭게 바닷가 마을(魚村)이 형성되자 새말(새마을)이라 부르고 그에 상응하는 한자어 지명 신리(新里)를 붙인 행정구역을 신리면이라 했다. 1757년(영조 33년) 연곡면에 속해 있던 사기리, 교항리, 향호리, 주문리가 모두 신리면에 통합되어 대한제국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 후 행정구역 병합에 따라 1937년 신리면이 주문진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0년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강릉읍이 강릉시가 될 때 명주군 주문진읍이 되었다가 현재는 강릉시 주문진읍으로 존속하고 있다.
 
문제는 注文津에 쓰인 注文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하는 점이다. 그걸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제법 한가로운 책읽기를 하다가 알아냈다. 『세종실록지리지』 강릉 대도호부 편을 보면 연곡 주을문(注乙文)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바로 앞 단락에서 주문리가 연곡면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당연히 注文은 注乙文의 와전이다. 이쯤해서 강릉시 경포동 소재 자연부락 즈므마을의 이름이 된 즈므라는 말의 정체를 注乙文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 과한 것일까? 주을문이 주문, 즈므의 순서대로 변모했다고 보는데, 만일 그렇다면 注乙文은 음차 注乙과 훈차 文으로 구성된 복합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