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정치와 민주주의
상태바
코로나의 정치와 민주주의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
  • 승인 2020.09.27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인사색]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제1부 도입부의 시작이다. 1980년대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상황에서 이 구절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면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게 만든 구절이었다. 되돌아보면 지극히 관념적이고 과거 향수적인 글이었지만 80년대라는 암울한 동토에서 상상의 총체적 세계로의 귀환을 통해 미래의 민주주의를 꿈꾸게 하던 말이었다. 이 글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학청년들이 소설에 매혹을 느끼게 되었던가!

2018년 루카치의 아카이브가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 아카이브는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가 작은 아파트에 있었다. 1971년 루카치가 죽고 난 뒤 헝가리 과학아카데미의 관리 하에 그가 살던 집이 루카치 아카이브로 개조된 것이다. 거기에는 루카치의 미발간된 수고들은 물론이고 그가 블로흐, 베버, 사르트르, 프롬, 하버마스,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형제들과 주고받았던 서신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루카치 연구자들에게 매우 소중한 곳이었다. 2017년 그곳을 찾아 루카치의 자료와 유품들을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특히 그곳 직원이 『소설의 이론』의 수고를 보여주었을 때 다시 20대로 소환되는 듯한 깊은 감회에 젖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절박했기에 경직될 수밖에 없었던 80년대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의 사상을 찬찬히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18년 5월 전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오르반을 수반으로 한 극우민족주의 정권하의 헝가리과학아카데미는 아카이브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존, 전환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무기한 폐쇄하고 직원들을 내보냈다. 헝가리 내에서 그 폐쇄가 정치적 이유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2010년 권력을 잡은 오르반 정부는 보수적이고 극우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헝가리의 문화적, 정치적 재편을 꿈꾸어왔다. 오르반 정권은 루카치의 급진적 민주주의와 코스모폴리턴적 유럽주의 전통이 젊은 세대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루카치와 루카치 아카이브에 대한 공격을 노골화했다. 2017년에는 부다페스트의 한 공원에 있던 루카치의 동상조차 철거되었다.

오르반 정부가 국제적으로 악명을 날린 것은 2020년 코로나 사태 속에서다. 지난 3월 오르반 총리가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던 의회는 총리의 법령에 의한 통치를 무기한 행사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을 그에게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팬데믹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표면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 법령은 격리조치 위반 시 가중 처벌 뿐 아니라 의회 해산, 집회 금지, 선거 연기, 허위뉴스 유포자 처벌 등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법령은 가짜뉴스의 유포자에 대해선 5년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엔 지방 정부의 권한을 중지하는 후속법안까지 통과시켰다. 이 법령들은 그에게 비판적 사람이나 언론인들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해주고 야당이 지배하는 지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 헝가리 민주주의의 약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최근엔 성전환자의 법적 성전환을 금하는 법안까지 통과시켜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한 유럽의회 의원은 헝가리가 민주적 기준으로부터 위험스럽게 이탈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영국 가디언은 헝가리가 EU 내의 최초의 독재국가로 변질되고 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EU의 강력한 경고와 우려 때문에 오르반 정부는 무기한의 비상령을 곧 끝낼 것이라 발표하며 한 발 물러섰지만 팬데믹 상황을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자신의 정권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권력자들의 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팬데믹 사태는 권위주의적 정부와 국가가 비상 상황을 이용해 시민의 저항권을 억압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권위주의적 정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팬데믹 사태는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테크놀로지들의 상상할 수 없는 발전을 통해 시민의 생명과 자유, 권리를 제약하는 통제 정치를 강화하는 길을 터주고 있다. 정부가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통제의 기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선함이 오히려 시민의 비판의식을 차단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향후 민주주의의 관건은 우리가 이러한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력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

현재 부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영미문화연구, 문화비평이론, 세계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소장, 인문한국 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혼종문화론》, 《문학에서 문화로》가 있고, 역서로는 《백색신화》,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글로벌/로컬》, 《미술관이라는 환상》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