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화, 그 구조와 성격 그리고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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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 그 구조와 성격 그리고 특색
  • 민병훈 대전대학교·일어일문학
  • 승인 2020.09.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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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역자에게 듣는다]

■ 저·역자에게 듣는다_ 『일본 신화 이야기』 (민병훈 역주 및 지음, 한국학술정보, 206쪽, 2020.08)

▲ 일본의 개벽신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 일본의 개벽신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7, 8년 전부터 교양과목으로 일본 신화를 강의하고 있다. 의외로 다양한 전공의 학생이 들어오는데, 흥미로운 점은 적지 않은 수가 수업 전부터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주요 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에게는 ‘신화’라는 말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하는 유전자가 있는 모양이다.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특별히 기념할만한 일이라든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에 ‘무슨 무슨 신화’라는 식의 명칭을 붙여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2002년의 한일월드컵 ‘4강 신화’가 대표적이다. 월드컵 4강이 실재 역사임에도 그렇게 부르는 까닭은 아마 신화가 역사의 우위에 자리하며 역사보다 더 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청소년만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잘 아는 청소년이 또 있을까. 그 길고도 난해한 신의 이름을 척척 외우는 것을 보면 신화 사랑이 각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소질이 일본의 신화에까지 미쳐 있었다. 어떻게 신들의 이름을 꿰고 있는지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은 만화나 게임이 매개체였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와 일본 신화에 대한 이해와 상식의 정도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경우는 신화 자체를 애니메이션이나 서지로 제작한 작품을 접해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데 반해, 일본 신화의 경우는 신의 이름만 단순 암기하고 있을 뿐 그 신과 관련한 신화 내용에 대해서는 무지한 학생이 많다. 그들이 접한 매체가 만화와 게임,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은 같지만, 매체가 신화 내용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만 빌려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을 이수하는 학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이름들의 출처를 비로소 알게 되어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그들에게 조금 더 정확한 정보를 심도 있게 전달할 방법을 찾게 되었고, 신화를 수록하고 있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사기』의 상권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있어 막연했던 신들의 정체를 명확히 알려주기 위해서는 역시 출전 자료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다룰 필요가 있었고, 효과적인 학습을 위해 문예적 색채가 농후한 서문과 신화 부분만을 도려내어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일본 신화 이야기』는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오랜 시간, 원문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명칭을 표기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이제까지 몇몇 고대 문학 작품을 번역해 봤지만, 신의 호칭이나 지명 등을 한국어로 표기하는 일은 여러모로 난해했다. 주요 신화 부분만을 발췌하여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일본의 신대 신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용이 이어져 있어, 설령 계보만 나열되어 있다 해도 남겨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제를 달고, 신화 뒤편에 신화 창출의 배경과 신화 구조, 성격 등에 관한 해설을 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신화의 특색을 다룬 필자의 논문을 몇 편 실었다.

일본의 고전 문학 전공자가 본 일본 신화는 몇 가지 특색을 띠고 있다. 일본 신화에서 지상(아시하라노나카쓰쿠니)의 지배자 또는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신들의 공통점은 모두 장자가 아니며, 그 시작은 지극히 미약하다는 점이다. 또한, 각각 추방이나 도주, 또는 피신 등의 형태로 본거지를 떠나게 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고 지배자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닮았다. 지상을 무대로 하는 신의 탄생에서 성장에 이르는 과정, 특히 신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위 영웅으로 불리는 존재들에게서 보이는 신성은 이색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건국 시조 탄생 관련 신화를 살펴보면, 탄생 전후부터 주인공의 신성이 강조되어 혈통은 물론 걸출한 용모와 뛰어난 기량을 부각하고 있다. 즉 처음부터 지배자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일본의 신화에는 주인공의 탄생이나 용모 관련 묘사조차 찾을 수 없거나, 탄생 관련 기술은 있어도 괄목할 만한 영웅성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 지나치게 온후하거나 우유부단해서 지배자로서의 면모에 결여가 느껴지기도 한다. 혹은 정반대로 영웅의 풍모는 갖추었으나 지나치게 횡포하여 성군으로서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결함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의 성장 과정과 지배자로의 변모 과정에도 상당한 차이가 확인된다. 비범한 성장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한국 신화와는 달리, 박해를 받아 도망하는 일본 신화 속 주인공들은 유리를 통해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영웅으로의 변모는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결과로 보기 어려우며, 여성의 조력과 신의 가호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의 헌신적인 조력으로 난관을 극복하거나 여성의 아버지인 위대한 신의 권력 또는 영력을 손에 넣어 영웅이나 지배자로 재탄생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오오쿠니누시 신화로, 유약했던 오오나무지가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며 오오쿠니누시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죄를 범해 추방당하거나 파견된 영웅에게서는 유약하면서도 난폭한 성정이 동시에 관찰된다. 흥미로운 점은 추방당하거나 파견되어 내려온 곳에서 강적을 만나는데, 정공이 아닌 계략으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스사노오의 야마타노오로치 퇴치 신화나 『고사기』 중권에 보이는 오우스(야마토타케루)의 구마소타케루와 이즈모타케루 정벌담에 잘 나타나 있는데, 정면 대결로 승부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술을 이용하거나 기만하거나, 여장(女裝)을 하고 있다가 허를 찌르는 등, 정공이 아니라 일종의 속임수를 쓴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남다른 탄생의 양상과 우월한 풍모, 성장에 뒤따르는 강력한 힘, 거기에 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한국 신화와는 달리, 일본의 신화에서는 유약하거나 횡포한 자가 유리와 여성의 조력, 그리고 여성의 아버지인 위대한 신의 가호로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 구조가 전형을 이루고 있다. 이야기 구조의 심층에 대한 소견은 책 후반부에 실었다.


민병훈 대전대학교·일어일문학

대전대학교 일본언어문화전공 교수. 일본의 센슈대학(専修大学)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 연구과에 진학하여 우타모노가타리(歌物語)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일어일문학회와 대한일어일문학회의 편집위원이다. 헤이안 시대의 초기 모노가타리 연구로 시작해서 지경을 넓혀 신화를 문학의 견지에서 읽는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에 歌物語の淵源と享受, 일본의 신화와 고대, 出雲文化圈と東アジア(공저), 한 권으로 읽는 일본 문학사, 이세 모노가타리, 다케토리 이야기, 야마토 모노가타리, わかる日本文化(공저, 외국어고등학교 국정교과서), 일본어 독해와 작문Ⅰ, Ⅱ(공저, 외국어고등학교 인정교과서) 등이 있으며, 최근의 연구로 「다자이후와 탕치의 고장 쓰쿠시-나라, 헤이안 문학을 중심으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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