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 철학’은 이제 그만, 쉬운 우리말로 꽃피운 우리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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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철학’은 이제 그만, 쉬운 우리말로 꽃피운 우리 철학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0.09.27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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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꿈꾸는 형이상학 | 윤구병 지음 | 보리 | 260쪽

농부철학자 윤구병이 삶의 본질에 다가서는 참된 앎을 갈망하며 한 자 두 자 새겨 넣은 철학 이야기다. 끊임없는 탐구와 지성으로 참된 한국철학을 꽃피우며 ‘형이상학(形而上學)’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과학의 신화’에서 벗어나 삶에서 우러난 직관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의 밑그림을 그려 내고자 한다. 수학,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전반의 ‘최신 성과’들을 아우르는, ‘가장 작은 하나에서 가장 큰 하나까지’ 하나로 꿰뚫는 형이상학 이야기를 우리말로 벼려 냈다. 사람과 자연, 지구와 우주에 주어진 낱낱의 삶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나온다는 것, 형이상학을 징검다리 삼아 글쓴이가 궁극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은 생각의 칸막이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생각을 가다듬으려면 우리말부터 갈고 닦는 것이 먼저이고 철학도 그 길에 예외일 수 없다. 저자는 기존의 학문용어를 ‘똥구멍말’로 선언하며 우리말을 씨앗으로 처음부터 다시 ‘한국철학’을 일구고자 한다. 그동안 다른 나라의 것을 마냥 받아들이는 데 급급하던 ‘흉내 철학’에서 벗어나 우리말과 글을 살려 제대로 된 우리 철학을 하자는 고민을 담았다. 삶에서 움트는 진정한 철학으로 생각의 칸막이가 열릴 때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철학 전공자들은 입말이 아니라 글말로, 글말 가운데서도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짜깁기(조립)한 한자어로, 이른바 개념어로 ‘철학’(이 말도 일본 사람들이 짜깁기한 말이다)을 익혔다. 외국 책을 옮긴 것이든 우리나라에서 나온 책이든 철학책은 거의 일본에서 만들어 낸 한자어로 도배되어 있다.” (본문 54쪽)

“독일에서 저 나름의 철학이 움튼 것은 그리스어, 라틴어들을 익힌 사람들이 그 말의 뜻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독일어로 옮기는 데 애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헤겔이 쓴 ‘das reine Sein’, ‘das reine Nichts’는 그리스어에도 라틴어에도 없었다. ‘on’, ‘ousia’, ‘esse’, ‘essentia’, ‘existensia’ 같은 그리스어, 라틴어를 독일 사람들은 ‘Sein(있다)’이라는 제 나라 말로 옮겼다. 그 말을 디딤돌 삼아 ‘das reine Sein’이라는 말을 빚어냈다. 일본 사람들이 서구 철학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자기 나라 말로 옮겨 받아들이는 대신에 한자어를 짜깁기해서 ‘das reine Sein’을 ‘순수유’로, ‘das reine Nichts’를 ‘순수무’로 바꾸었다. 일본에서 저 나름의 철학이 싹틀 밭을 일구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본문 64쪽)

▲ 윤구병 농부철학자 변산공동체마을학교 대표
▲ 윤구병 농부철학자/변산공동체마을학교 대표

이 책에서는 서구에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물질과학, 생명과학, 사회과학, 철학 용어들을 쉬운 낱말로 바꾸어 뜻매김을 새롭게 다시 했다. ‘있음, 없음, 것, 힘, 함, 됨, 결, 톨’처럼 열 마디 안팎에 이르는 낱말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시간과 공간, 사람과 자연,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앎의 길로 안내한다. 우주의 탄생처럼 자연현상이나 물질현상이 드러내는 수수께끼 같은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의 본모습을 우리 삶과 맞닿는 말로 담아냈다.

* 학문용어를 우리 말로 바꾼 곳 (괄호 안이 학문용어)
보기) 결(파동), 톨(입자), 있음(존재), 없음(무), 함(능동), 됨(수동), 때데한몸(시공연속체), 큰펑(빅뱅) 등
* 새로운 낱말을 빚어낸 곳
 보기) 뒷삶알(유전자), 뭇산이(생명체), 별누리(우주), 산힘(생명력), 아롬사랑(철학), 얼새김(기억) 등

저자는 이성(理性)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과학의 탈’을 쓴 현대 문명에 반기를 든다. 누구나 자명하다고 여기는 공리에 의문을 품고 철학, 우주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들을 치밀하게 탐구하여 그 한계를 파헤친다. 0과 1 사이에 놓인, ‘셈’이 안 되는 모순과 역리까지 끌어안는 통찰력으로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를 낱낱이 파고들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겼느냐? 물질의 최소단위는 무엇이냐?’ 사물의 본질과 근원에 다가서려는 끈질긴 물음과 반증 속에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상식과 이성, 학문 성과들이 뒤흔들리고 ‘과학의 신화’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0과 1 사이에 낀 것치고 멈추는 것은 없다. 모두 흔들리고 끊임없이 흐른다. ‘수’도 바뀌고 물질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톨로 뭉치고 결을 이루어 풀리는 뭇 것들 모두가 움직인다. 살아 춤춘다. 수학 공식도 물리법칙도 함께 널뛴다. 어떤 눈금이 새겨진 잣대를 들이대도 그 잣대가 잴 수 있는 것은 수의 얼굴을 지닌, 법칙의 탈을 쓴 나머지일 뿐이다. …… 0(없음)이라는 점과 1(있음)이라는 점. 결과 톨의 온갖 바뀜(변화)은 이 안에서 일어난다. 우주에서 힘의 ‘본샘’(원천)은 0과 1의 꼬임에 있다. ‘없음’에서 싹트니까 무한하고, 무규정적이다. ‘있음’으로 드러나니까 유한하고, 규정적이다. (본문 151쪽, 173쪽)

E=mc², 아무리 따져 봐도 틀려먹었다. …… ‘수학’ 공식에는 이게 들어맞겠지. 그러나 위아래, 왼쪽 오른쪽만 헤아리고 재는 걸 넘어서서 앞뒤, 안팎, 올 데 갈 데까지 따지면 이게 안 맞는다. 시방세계에는 안 맞는 공식이다. ‘이미’까지는 잴 수 있겠지. 그러나 ‘아직’은 잴 수 없다. 있었던 것, 있는 것을 재는 잣대에 새겨진 눈금으로는 ‘있을 것’을 잴 수 없다. (본문 199쪽)

왜 ‘꿈꾸는 형이상학’인가? 철학의 몫은 무엇이며 또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왜 ‘꿈꾸는 형이상학’인가? 철학은 올바른 가치관으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등대다. 물질 만능 시대에 휘둘려 갈피를 못 잡는 이들에게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형이상학은 그 철학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주춧돌이자 뼈대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그늘에 가려, 또 어려운 학문용어에 치인 나머지 ‘인문학 퇴출 1순위’ 학문으로 여겨지기 일쑤다. 돈 되는 기술, 능력, 학위만 좇도록 만드는 현실은 생각 없이 살도록, 생각할 시간조차 꿈꾸지 못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꿈꿀 수 없으면 한 사람의 삶도 세상도 제자리를 맴돌거나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진리는 강요하거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생각의 날개를 펼칠 때 좋은 세상과 맞닿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흉내 철학에서 벗어나 우리 철학을 올곧게 세울 때 코로나19, 기후위기 등 전 인류의 문제 앞에 희망의 나침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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