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민족 정체성과 과라니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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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민족 정체성과 과라니 문화
  • 구경모 부산외국어대학교·중남미지역원
  • 승인 2020.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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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

■ 저자가 말하다_『기층문화와 민족주의』 (구경모 지음, 한국학술정보, 230쪽, 2020.08)

과라니 문화는 파라과이 사람들의 일상에 남아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들과 구분된다. 파라과이 국민 모두는 과라니 원주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라니어와 문화를 소비하고 공유한다. 멕시코와 페루, 볼리비아 등의 국가들은 원주민 비율도 높고 그와 관련된 민족주의도 강하게 나타나지만, 파라과이처럼 모든 국민들이 원주민 문화를 향유하지 않는다. 실제로 멕시코에서는 원주민이 아닌 국민들이 원주민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에서는 원주민을 통해서만 원주민 문화가 계승된다. 멕시코 정부가 나우아틀어를 포함하여 복수의 원주민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지만, 일부 원주민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사정은 페루와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원주민들은 다수의 국민들과 소통하거나 공적 문서에 접근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에 비해 파라과이는 백인계와 메스티소가 전 국민의 98%에 이르지만, 과라니어를 대중적인 의사소통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파라과이 국민들이 과라니어를 일상에서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사실은 과라니 문화가 파라과이에서 기층문화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과라니 부족

이처럼 파라과이 민족 정체성은 언어 공동체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와 유럽 민족주의의 차이를 언어 정체성의 부재로 바라봤던 앤더슨의 주장에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그는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 발현했던 이유를 지방 언어 집단들의 정체성 때문이라고 지적했으며, 그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와 유럽 민족주의의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언어가 민족주의의 변수가 되지 못한 것은 식민지로 인해 원주민 종족들이 사용했던 무수한 지방 언어가 제국주의 언어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앤더슨은 라틴아메리카 각 국가의 민족 정체성 발현 요인을 지방에서 공유된 신문과 활자 매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이것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민족주의를 공통으로 관통하는 지점인데, 앤더슨은 유럽의 각 지방어가 활자화되면서 서로 간에 정체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이와 같은 논리로 라틴아메리카도 지방지에 의한 정보공유가 서로 간에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것이 민족주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사실 유럽은 민중의 언어로써 지방어가 라틴어를 대체하면서 근대국가의 이데아인 민족주의가 발생하였고, 각 지방 사람들이 국가의 주체인 시민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지방지는 오직 해당 지방의 지배계급인 크리오요나 일부 메스티소의 전유물에 불과하였다. 크리오요들이 지방정부의 관리로서 독립을 주도하고 선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과 민족주의 형성 과정에서 원주민의 역할과 그들의 문화를 언급 조차하지 않는 것은 마치 유럽계의 유산만을 인정하는 문자 중심의 사고 체계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상 민족주의는 근대의 결과이자 국민국가의 산물이었기에 유럽과 엘리트 중심의 거대 이론과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근대의 중심인 유럽의 사례가 민족주의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근대화의 경로가 달랐던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민족주의 이론과 담론으로 말끔하게 채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 연구는 법칙정립적인 접근 이상으로 개별기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만 하더라도 각 국가나 지역마다 인종 및 종족 구성이 상이하여 그에 따른 민족주의의 형태가 다양하게 드러난다. 소위 원주민계 비율이 높은 국가와 아프리카계 흑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우세한 국가, 백인계의 숫자가 많은 국가들은 서로 다른 민족주의 경향과 배경,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민족주의 연구는 지역연구라는 맥락에서 국가나 지역, 혹은 문화권에 대한 분석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 사례 연구의 축적은 역내 국가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교분석 및 유형화로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아가 개별 사례 혹은 권역별 유형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 전체를 조망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구경모 부산외국어대학교·중남미지역원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학사와 석·박사(사회인류학 및 민속학 전공)을 마쳤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남미 남부지역의 이민과 종족, 민족주의, 사회적 불평등에 관심이 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과이라공화국, 또 하나의 파라과이: 유럽계 이민자와 과이레뇨의 종족성」, 「파라과이 민족국가 형성에 있어 과라니어의 역할」, 「아르헨티나 거주 파라과이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통합의 한계」, 「남미공동시장과 역내국가의 종속과 갈등: 브라질계 대두농과 파라과이 소농의 사례」, 「라틴아메리카의 민족주의 경향과 분석틀에 관한 고찰」, 「파라과이 군부독재정권의 토지정책과 농민운동의 역사적 요인」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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