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실패로 되돌아가는 성찰을 위해서
상태바
우리의 실패로 되돌아가는 성찰을 위해서
  • 김정한 서강대·정치학
  • 승인 2020.09.20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가 말하다]

■ 저자가 말하다_ 『비혁명의 시대: 1991년 5월 이후 사회운동과 정치철학』 (김정한 지음, 빨간소금, 368쪽, 2020.07)

비혁명의 시대는 혁명을 못한 시대이기도 하고 혁명적이지 않은 시대이기도 하다. 이 표현은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에서 가져왔다. 이 책에서 홉스봄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공산당들이 혁명 활동에 실패하고 소수파로 전락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하고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로 굴절되는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고 할 수 있었는지를 반복해서 묻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1980년대가 무너지고 난 후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질문하고 싶었다.

▲ 강경대 운구행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 강경대 운구행렬

1991년 5월은 1980년대의 정치적 시공간이 붕괴하는 분기점이었다. 백골단의 폭행으로 명지대 강경대가 사망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사를 당했으며, 성균관대 김귀정이 시위 도중 강경 진압으로 사망했다.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해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차태권, 정상순, 이진희, 석광수 등 학생, 노동자, 빈민 11명이 연이어 분신했다.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14명이 사망하고 전국적으로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제2의 6월 항쟁’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1991년 5월에 이르는 4년여 동안에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착적으로 대립했고, 1991년 5월 투쟁은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분신들에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과 검찰의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계기로 1980년대의 급진적 민중운동은 결정적으로 실패했다. 그 효과는 민주화 과정의 왜곡과 봉쇄였다. 민중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과 배제가 본격화되었고, 6월 항쟁 이후 상정된 민주적 개혁 법안들은 폐기되거나 개악되었다.

하지만 1991년 5월 투쟁이 갑자기 소멸한 또 다른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럽고 처절한 투쟁이 그만 끝나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5월 투쟁의 실패는 1980년대 민중운동에 대한 내재적 성찰의 계기였다. 그렇지만 1980년 5.18광주항쟁에서 1991년 5월 투쟁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은 흩어졌다. 더구나 1980년대 민주화 세대는 이른바 ‘후일담’을 통해 혁명의 미망에 대한 고백과 청산으로 나아갔고, 민주정부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도했으며, 기성 정치인들보다 더 탈민주적이고 무능력한 ‘정치계급’이 되었다. 1990년대의 새로운 운동주체들은 민중운동 내의 군사 문화, 위계적 조직 질서, 과도한 중앙집중화, 정당 의존성, 명망가 중심성, 남성 중심주의와 성차별 등을 반성하고 성찰했지만,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관리체제로 신자유주의가 본격 도입되기 전까지 7년 동안 1990년대에는 소비사회, 신세대, 대중문화,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시대를 대표하는 언어가 되었다. 1980년대의 민중 담론은 촌스러운 옛 시절의 것이 되었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더 혁명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90년대는 매끄러운 시대는 아니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자본과 노동의 문제는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며, 여성 차별과 생태 위기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도 생겨났다. 1980년대와는 달리 개혁, 시민사회, 민주주의 담론들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1980년대에 제기된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의 현실은 변화했지만 어떤 이들의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한 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시대착오적인 시대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인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아닌 상황에서 난처해졌다.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적 대표자들은 바뀌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는 후퇴하고 진영 논리와 증오의 정치가 만연해 있다. 이 책에는 1991년 5월 이후 최근의 촛불까지 사회운동의 변화 과정과, 이를 이해하기 위한 정치철학의 주요 담론들을 돌아보면서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미래를 여는 열쇠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포스트 마르크주의, 이론적 정신분석학, 현대 민주주의, 포퓰리즘 등 학술적인 주제들에 대한 논의는 다소 난해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1991년 5월 투쟁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대중과 폭력 – 1991년 5월의 기억을 펴낸 바 있으며 이 책은 그 후속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운동과 정치철학의 마주침이라는 화두를 갖고 5.18광주항쟁 등 현대 사회운동들을 연구해왔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모색해주기를 바란다. 내년이면 1991년 5월 이후 30주년이 된다. 일회적인 기념이나 추모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실패가 무엇이었는지를 성찰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의(cause)를 함께 찾아가기를 기대한다.


김정한 서강대·정치학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문화과학』 편집위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방부5·18특별조사위원회 민간조사관 등을 역임했으며, 현대 정치철학과 사회운동, 기억의 정치 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대중과 폭력-1991년 5월의 기억』,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알튀세르 효과』(공저), 『너와 나의 5·18』(공저), The History of Social Movements in Global Perspective(공저), Toward Democracy: South Korean Culture and Society, 1945-1980(공저, 근간) 등 다수가 있으며. 국역서로 『폭력의 세기』, 『혁명가-역사의 전복자들』(공역)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