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시학』 - 행복론, 중용론, 교육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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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시학』 - 행복론, 중용론, 교육론을 중심으로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9.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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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6강〉 _ 손병석 고려대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시학〉」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6강 손병석 교수(고려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손병석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작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 『시학』을 “내용적인 측면에서 공통성 또는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행복론, 중용론, 교육론이라는 창을 통해 소개한다. 먼저 행복론에 대해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최고의 행복한 삶의 종류로 말해지는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선 정체(政體)에서 어떻게 최적화되고 있는지” 『정치학』의 검토를 빌려 알아본다. 이어서 “중용론과 관련해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aretē)에 따른 행위가 중용에 따른 행위임”을 살펴본 뒤 “그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체로 말해지는 혼합정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정치학』”에서 만나본다. 끝으로 교육론과 연관해서는 『정치학』에서 “이상 국가로 제시하는 ‘바람에 따른 폴리스’의 교육 내용”을 여가(scholē)와 음악 교육(mousikē)에서 확인해보고, “이것이 시민 교육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시학』에서 언급되는 “비극과 카타르시스 개념을 통해 그 가능성”을 찾아본다.

▲ 지난 8월 22일, 손병석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8월 22일, 손병석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6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과 『정치학(Politica)』 그리고 『시학(Poetica)』은 근대 이후 지금까지 윤리학사나 정치철학 또는 시 예술론에 관한 이론적 담론에서 고전으로서의 무게와 가치를 담보하는 정전으로 평가될 수 있다. 본 강연에서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공통성 또는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세 개의 주제, 즉 행복론, 중용론 그리고 교육론를 갖고 살펴보고자 한다.

1. 행복론을 통해 본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윤리학과 정치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선 개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정치학』에선 정체에 관한 논의를 주된 탐구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과 정체를 구분하고, 그래서 윤리학과 정치학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을 구분하고 있지만 윤리학과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관한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he peri ta anthropeia philosophia teleiothe, X.9, 1181b15) 하나의 논문 내지 작품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행복론에 관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작품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이 인간 철학을 구성하는 실천 철학의 두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자의 작품에서 개인의 행복은 덕에 따른 활동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러한 덕을 통한 행복의 실현은 정치 공동체가 제공하는 정치 제도나 법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폴리스적 동물(politikon zōon)’로서 가능하다고 『정치학』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행복이다. 즉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를 탐구하는 학문인데, 행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eudaimonia, 즉 행복은 최고선으로서 그것은 잘 행위하고(eu prattein) 잘 사는 것(eu zen)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은 “영혼의 덕에 따른 활동이다. 그 덕이 여러 개라면 최고의 완벽한 덕에 따른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098a16-18). 문제는 덕들이 여러 개라면 어떤 덕에 의해 행복이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을 지적인 덕과 성품적 덕으로 대별하면서 전자의 덕에 5개를, 후자의 덕에 10개 이상의 덕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최고의 완벽한 덕’을 어떤 덕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따라 최고의 행복한 삶의 유형이 달라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선 관조적 활동과 실천적 활동이 대표적인 행복의 후보로 말해진다. 관조적 행복은 소피아(sophia), 즉 지혜라는 이론지를 통해 실현되는 지적인 유형의 행복이다. 실천적 행복은 용기나 절제 또는 정의와 같은 성품적 덕의 발휘에 의해 이루어지는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종류를 최고의 행복한 삶으로 보았는지를 둘러싸고 우월론적 해석은 최고의 완벽한 덕을 소피아, 즉 이론지로 보면서 관조적 삶을 최고의 행복한 삶으로 주장한다. 이와 달리 포괄론적 해석은 최고의 완벽한 덕을 성품적 덕 전체로 보면서 행복의 실현이 일생에 걸친 성품적 덕의 발휘에 의해 달성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어느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볼 수 있을까? 『니코마코스 윤리학』 마지막 권인 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 삶이 첫 번째 행복이고, 실천적 삶은 두 번째 행복이라 밝힌다. 즉 최고의 덕인 소피아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이 완전한 행복이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9장에서 ‘우리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신적인 것인 이성에 따른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경우에도 관조적 활동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위해서는 외적인 것들이 장애물이 된다고 말한 후 곧바로 “인간인 한,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한, 그는 덕에 따른 행위들을 선택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관조적 삶에 앞서 성품적 덕에 따른 실천적 활동이 행복을 실현하는 삶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는 자족적이며 잘 사는 삶이란 고립된 삶을 살면서 자신만의 자족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행복의 의미로서의 자족성은 부모나 자식 또는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와 동료 시민들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실현되는 자족성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097b8–10). 요컨대 행복의 순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판정이 어떤 경우에도 관조적 행복을 실천적 행복에 우선하여 추구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의 진의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도덕한 관조자를 인간의 전형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에 관한 논의는 『정치학』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의 행복론은 인간에 관한 좋음을 탐구하는 정치학에도 적용되고 있는가?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권에서 폴리스의 존재론적 목적(telos)을 ‘자족적이며 잘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자족적이며 잘 사는 삶은 폴리스라는 정치 공동체(hē politikē koinōnia)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이것은 폴리스가 인간 본성이 지향하는 텔로스(telos), 즉 목적이 됨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는 본성상 자연적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폴리스를 건설하고자 하는 본성적 충동이 있으며, 이런 점에서 본성상 폴리스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폴리스적 삶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 존재는 바보이거나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뿐이다.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텔로스를 통해 알 수 있고, 그것이 폴리스를 통해 구현되는 자족적이며 잘 사는 삶이라는 결론은 결국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의 행복론이 정치학을 통해 그 의미가 보다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폴리스는 인간 본성에 가능태로 내재된 행복에 대한 지향성을 현실태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행복한 삶의 두 유형인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선정체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정치학』 7권 2장과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전에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두 가지 주요한 삶의 유형이 정치적 삶(politikos bios)과 철학적 삶(philosophikos bios)이다. 철학적 삶과 정치적 삶의 우월성에 관한 논쟁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양비양시론적 관점을 갖고 접근한다. 먼저 철학적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삶을 주인의 노예에 대한 통치 방식과 같은 전제적 통치 방식만 적용되는 것으로 보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치적 삶은 동등하고 평등한 자유 시민들에 의한 정치적 통치로도 발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삶에 대한 전적인 부정은 옳지 못하다.

이처럼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는 정치적 삶을 주장하는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즉 정치적 삶을 지지하는 진영은 철학적 삶을 단지 비(非)활동적인 것(apraktein)으로 보고 공격한다. 그러나 철학적 삶이 활동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삶보다 오히려 더 활동적인 삶의 방식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정확성은 떨어진다. 이론적인 사고 활동이 실상 가장 완벽한 적극적 활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적 삶을 옹호하는 진영은 철학적 삶이 기본적으로 반(反)폴리스적인 삶, 달리 말해 고립적이며 사적인 삶을 취하기 때문에 최선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반대로 철학적 삶을 옹호하는 자들은 정치적 삶이 기본적으로 전제적인 폭력적 통치 방식을 따르고 무엇보다 타인에 의존한 자체성을 결여한 삶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기획하는 최선정체에선 어떤 삶의 방식에 따른 최고의 행복한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가? 이미 두 삷의 방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치학』에선 최고의 삶으로서의 관조적 삶과 차선의 행복한 삶인 실천적 삶이 조화될 수 있는 정치 현실적 환경을 최선정체에서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치학』 7권과 8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노동은 여가를 위해’,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치적 군사적 활동은 평화 시의 여가를 위한 활동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가의 최선의 활용은 자체 목적적인 활동이고 그것은 철학적 활동과 같은 관조적 삶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이상 국가로 제시하는 ‘바람에 따른 폴리스’에서도 여전히 철학적 삶이 최고의 행복한 삶이 되고 그것은 정치적 삶과의 조화를 통해 극대화된 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2. 중용과 혼합정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가 중용이다. 행복이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면 그러한 덕이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 중용의 적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감정과 행위와 관련해서 과다와 과소 또는 지나침과 부족함의 양극단을 피한 중용을 달성하기 위한 품성 상태(hexis)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용이 덕행의 아르키메데스적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중용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중용은 무엇보다 과다와 과소를 피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중간이 산술적인 중간이 아닌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중용은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중용 개념으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중용은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 즉 실천지를 가진 사람(phronimos)이 규정하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은 행위 중심(act-centered)이 아니라 행위자 중심(agent-centered)의 윤리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지를 가진 사람이 중용을 적중하기 위해선 다섯 가지 마땅함(deon)의 원칙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올바른 행위는 때와 사안, 대상, 목적, 방식이라는 마땅함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다와 과소가 다양한 덕들의 영역을 중용의 차원에서 규정짓는 총론적 원리가 된다면, 마땅함의 원칙은 행위의 구체성을 담보하는 각론에 해당되는 시행 원칙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중용을 적중시킨 올바른 행위인가는 실천지를 통한 마땅함의 원칙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정해져야 한다. 요컨대 중용은 가치론적 좌표를 갖고 최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과 결정(proairesis)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중용의 적중에 관한 이해를 위해서는 소위 ‘덕의 통일성 테제’를 통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선한 목적을 바라는 성품적 덕과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올바른 이성으로서의 실천지의 결합에 의해 중용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인 좋음의 목적 설정이 기본적으로 성품적 덕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숙고와 선택 결정이 실천지에 의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지 없이는 완전히 선하게 될 수 없고, 성품적 덕 없이는 사려 있게 될 수 없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44b30-32)라고 말한다.

그러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기술된 중용의 원리는 『정치학』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정치학』 4권에서 기술되고 있는 폴리테이아(politeia), 즉 혼합정을 통해 그 관계성을 파악해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혼합정은 정체 분류에서 왕정, 귀족정과 더불어 올바른 정체로 분류된다. 혼합정은 다수가 공동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정체로서 부에 근거한 과두정적 요소와 자유에 근거한 민주정적 요소가 혼합된 정체이다.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혼합정을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정체로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이유에서 혼합정을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정체 유형으로 보는가?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혼합정의 주요한 강점을 중용에 따른 삶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행복한 삶이란 덕에 따른 삶인데, 그러한 덕은 중용을 적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중용에 따른 정체가 혼합정이라는 점에서 혼합정의 정치 제도는 기본적으로 과다와 과소를 지양한 중간을 구현하고자 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러면 혼합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다와 과소를 피한 정치 제도나 법을 구현한다는 것인가?

『정치학』 4권 9장에서 정치 제도에 관한 혼합 방식이 이에 관한 이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법정 출석과 관련하여 과두정에선 가난한 자들의 재판 참석에의 동기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반면에 민주정은 부자들의 재판 출석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출석하지 않아도 벌금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혼합정에선 부자와 빈자가 모두 법정 출석을 하도록 빈자에겐 수당을 지급하고 부자에겐 벌금을 부과한다. 민회 참석과 관련해서도 혼합정에선 과두정의 지나친 재산 소유나 또는 민주정의 무재산 요구를 피한 중간 정도의 재산을 민회 참석 기준으로 택한다. 혼합정은 관직 배분도 중용의 원칙을 적용하는데, 그것은 관직자를 재산에 대한 자격 요구 없이 선거로 선출하는 것이다. 재산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민주정의 원리와 추첨이 아닌 선거로 선출하는 과두정의 원리를 혼합한 것이다.

혼합정이 무엇보다 대다수의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정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중간 계급이 정체의 안정과 질서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부자와 빈자가 서로에 갖는 심리적인 특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부자는 빈자에 대한 경멸을 보이는 오만함(hybris)을 갖고 있고, 빈자는 부자에 대한 시기심과 적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자는 복종할 줄 모르고 폭군처럼 지배할 줄만 알고, 빈자는 지배할 줄 모르고 노예처럼 지배받을 줄만 안다고 비판한다. 전자는 교만하고 후자는 악의에서 양자 모두 부정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과두정과 민주정 사이의 친애(philia)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과두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은 무엇보다 각자의 분배 정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배 정의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분배 정의를 ‘공동체의 좋은 것들, 예를 들어 재화나 명예, 권력 등의 올바른 배분과 관련된 정의’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올바른 분배 정의는 가치(axia)에 따른 기하학적 비례에 의한 분배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윤리학에서의 분배 정의를 근거 지우는 axia, 즉 가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는 사람들 간의 의견이 갈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배의 기준이 되는 가치를 자유로 보고, 과두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부를 가치의 기준으로 주장한다. 문제는 두 가치 사이의 통약 가능성이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분배 정의의 가치 기준을 둘러싼 과두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사이에서는 화해 가능성이 부재하고 따라서 자신의 몫을 획득하기 위한 스타시스(stasis)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자들과 과두주의자들은 분배적 정의가 가치에 따라야 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면서도 그 가치를 각자 자유와 부로 본다는 점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즉 두 정체 지지자들은 상이한 분배적 정의관을 갖고 있고, 이것이 스타시스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8권 1장에서 ‘폴리스의 결속을 위해서는 입법가가 정의보다 친애를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이유는 정치적 친애를 통해 폴리스의 구성원들인 시민들 사이의 호모노이아(homonoia) 즉 ‘일치된 마음(homonoia)’이 실현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스타시스(stasis), 즉 파쟁(派爭, faction)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모노이아는 정치적 친애이다”(estin he homonoia philia politike, EE, 1241a34)라고 말하면서, 정의는 친애를 추가로 필요로 하지만 친애가 있으면 정의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혼합정을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체로 간주하는 이유는 혼합정이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계급 싸움으로 인한 스타시스의 발생을 방지함으로써 정체의 안전과 보존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시스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계급을 중간 계급으로 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처럼 중간 계급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혼합정에선 중간 계급이 좀 더 공평무사하게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는 이성적인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불합리한 판단을 하지 않고 공동 이익을 위한 올바른 행위를 하는 성향을 가진다. 즉 부자와 빈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있게 되고, 그래서 이 중 어느 한쪽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하고자 하면 중간 계급이 약한 쪽과 힘을 합쳐 강한 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혼합정의 형태는 중간 계급이 많아서 부자나 빈자 어느 쪽보다 우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중산정이 실현된다. 또는 중간 계급이 월등한 수적 우세를 점하지 않더라도 부자나 빈자 계급 어느 한쪽과 힘을 합쳤을 경우 다른 쪽을 능가하여 정체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3. 여가(scholē)와 음악(mousikē), 그리고 비극(tragodia)을 통한 시민 교육

교육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 철학, 즉 윤리학과 정치학의 상호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교육을 통해 덕을 갖춘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즉 도덕적 인간과 정치적 덕을 갖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즉 폴리스의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 3권 4장에서 언급되는 ‘좋은 인간(agathos anēr)’과 ‘훌륭한 시민(spoudaios politēs)’의 동일성 여부 문제 역시 덕의 소유에 의해 판가름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좋은 인간이든 훌륭한 시민이든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덕의 획득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인 가르침에 의해 획득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덕은 가능태로서 갖고 태어나지만 그것을 현실태로 만들기 위한 후천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덕을 갖춘 좋은 인간과 훌륭한 시민의 탄생은 결국 교육을 통해 가능함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마지막 부분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본성을 운 좋게 갖고 태어나는 경우에도 가능하지만, 다중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덕의 습관화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식 교육은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이유는 가정에서의 사적 교육에선 고통스러운 교육에 대한 자식의 저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교육의 보편성이 담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중들이 덕을 습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강제성을 지닌 법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끝 부분에서 정체의 법에 의한 덕 교육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최선정체를 건설하기 위한 최선의 교육론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최선정체를 ‘바람에 따른 폴리스(kat’ euchēn polis)’로 규정한다. ‘바람’은 좋은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바람에 따른 폴리스’는 폴리스의 존재 목적인 ‘자족적이며 잘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인이건 국가건 행복해지기 위해선 덕을 소유해야 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기획하는 ‘바람에 따른 폴리스’는 덕을 소유한 시민 양성에 있다. 그러면 최선정체의 모든 시민들이 고상하고 덕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이 이루어져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7권과 8권에서 여가 교육과 음악 교육을 강조한다. 먼저 7권 14장에서 그는 시민 덕 교육을 위한 중요한 것으로 스콜레(scholē), 즉 여가를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여가의 참된 의미는 무엇보다 그것이 관조적 활동을 위한 것이라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 자체적인 목적을 위한 활동으로서의 여가는 덕을 함양하기 위한 도덕적 활동뿐만 아니라 철학과 같은 지적인 활동을 위한 것이다. 즉 최선정체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철학과 같은 지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정체의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무시케(mousikē), 즉 음악 교육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의 중요한 기능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한다. 첫째는 휴식과 즐거움을 주는 놀이로서, 둘째는 좋은 성격을 형성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가 교육을 위한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음악은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주며, 무엇보다도 즐거운 활동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고상한 에토스를 갖도록 습관화시키는 데 좋은 교육 방법이다. 음악 교육을 통해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는 습관을 배울 수 있게 하여 좋은 성격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이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과 유사한 것(to homoion)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리듬과 멜로디 속에 분노나 온화함 또는 용기와 절제 같은 감정이나 덕의 본성에 유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이 대상을 유사하게 모방한 것이라면, 올바른 행위를 모방한 음악은 그것이 마찬가지로 영혼에 올바른 성향을 갖도록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음악 교육이 카타르시스를 주는 효과를 통해 적합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그래서 좋은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카타르시스가 일종의 덕의 계발에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카타르시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정을 조절하여 영혼의 안정과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금 일반적인 의미로(haplos) 사용하고 있는 카타르시스 개념을 통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하게 포이에티케에 대한 저술 안에서 말하겠다”(134lb38-40)라고 말한다.

『시학』에서 카타르시스가 발견되는 곳은 비극의 정의가 기술되고 있는 6장에서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와 같은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달성하는 미메시스다”(1449b26-28)라고 말한다. 여기서 비극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의되고, 비극이 『시학』의 주된 논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본 강연과 관련해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첫째는 『시학』이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 사이의 일종의 경첩(hinge) 또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학에서의 추상적인 중용론이나 덕론, 또는 정치학에서의 시민론이나 정체론이 『시학』에서의 비극 주인공의 행위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며 효과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윤리적인 보편적 원리나 정치적인 법률은 그것을 기계적으로 개별행위에 적용할 경우 바람직한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보장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학』은 구체적 개별자인 인간의 행위와 삶을 통해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 가치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이 담보하고자 하는 덕 교육의 실질적이며 효과적인 텍스트가 될 수 있다.

둘째는 시민 교육적 측면에서 카타르시스는 개인과 폴리스의 재조화 내지 화합에 기여할 수 있다. 희랍 또는 그리스 비극이 아테네 정체에서 종교 제의 축제와 함께 시작되었고, 그것이 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극 관람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은 시민들로 하여금 무엇이 공동 이익이고 보편적 선인가에 대해 숙고하게 함으로써 좋은 인간 또는 훌륭한 시민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다수의 시민들을 덕과 진리로 영혼을 전환(periagōgē)시킬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민들의 영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일까? 플라톤에 따르면 시나 비극은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의 기술로서 미메시스는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보기에 시인이나 비극 작가는 실재가 아닌 허상을 만들어내는 자들로서, 그들은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고통 쾌락에 의한 모든 감정들에 물을 주어 자라게 한다. 문제는 그러한 지나친 감정들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용기나 절제 또는 정의의 덕을 함양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감각적 대상 안에 내재하는 형상과 진리를 아름답게 재현하는 창조 행위일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연민과 공포라는 감정은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폴리스의 시민들은 비극 작품을 관람하면서 일종의 내면에서의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은 원자적인 개체적 카타르시스가 아닌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의 보편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극적 카타르시스가 시민 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시학』 4장에서 발견된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 행위는 인간이 어려서부터 발휘하는 타고난 본성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미메시스된 것, 즉 모방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다(1448b4-9).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우리가 모방의 대상을 바라볼 때 그들에게는 ‘각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배움과 추론(manthanein kai sullogizesthai ti hekaston)’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448b9-17). 그리고 이때의 쉴로기제스타이(sullogizesthai)라는 말은 개별 속에 존재하는 본질이자 형상인 보편을 인식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비극에서 이러한 인식과 깨달음은 행위를 모방한 이야기 전개(mythos, plot)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비극의 주인공의 의도하지 않은 하마르티아(hamartia), 즉 과실(過失)에 의해 전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하마르티아에 의해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급전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발견과 인지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시민 관람자들은 ‘아, 이것이 그것이구나(houtos ekeinos)’라는 감정적이며 지적인 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처럼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라는 미학적 쾌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비극이 자유로운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이 시민 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여가를 통한 시민 교육을 통해 덕 있는 시민을 양성할 수 있다고 본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라는 쾌감을 통해 최선정체의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완성된 덕 있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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