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이념의 시대에서 우연성과 상상력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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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이념의 시대에서 우연성과 상상력의 시대로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9.13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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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 리처드 로티 지음 | 김동식·이유선 옮김 | 사월의책 | 416쪽

밀레니얼 세대, 90년생, Z세대 등 온갖 세대론의 언어들이 오늘날 소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질적 사회, 집단주의 문화, 평균주의 시대와 같은 낡은 사회 현실이 종말을 고하고 다원화 사회, 개인주의 문화, 개성주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갈수록 다원화하고 복잡해지는 시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명확하지 않아서다. 우연하고 유동적인 정체성의 존재로 살아가게 된 우리 개인들은 어떤 식의 연대와 사회적 희망을 상상할 수 있을까?

리처드 로티는 이 책에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개인들을 위한 철학적 제안을 내놓는다. 로티는 우리 존재의 우연성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언어도, 자아도, 공동체도 발견되어야 할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철저히 역사적인 산물이며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할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독특하고 특이한 개인들의 사회에서는 전통 철학이 추구해왔던 보편적인 진리는 더 이상 연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인간의 연대는 공통의 진리보다는 차라리 공통의 이기적인 희망을 공유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과거의 세계는 진리와 거짓, 옳음과 그름, 아군과 적군이 확실했던 시대였다. 공산세계와 자유세계, 군부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 등과 같은 역사적 대결 앞에서 개개인의 삶은 공동체의 삶과 불가분하게 통합되어 있었다. 진리와 이념은 역사적 투쟁을 위한 유용한 무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개인의 자율성이 부각되면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가 전면화하고 있으며, 더 이상 진리와 이념은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개인들 간의 공감과 연대가 새로운 공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으로 이런 전환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_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 위키피디아 코먼스
▲ 리처드 로티. 위키피디아 코먼스

로티는 이 새로운 전환을 예견하고 이를 옹호하고자 했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어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초창기에는 극히 중요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민주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로티는 진리, 이념, 도덕적 의무와 같은 합리주의의 어휘가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필연적 진리보다 역사적 우연성에, 이념보다 상상력에 초점을 맞출 때 어떻게 새로운 상상력이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연대를 창출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연대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확대해가는 문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로 보게 하는 이 과정은, 낯선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의 문제이자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지에 대한 재서술의 문제이다. 로티는 이것이 이론의 과제가 아니라 이야기(narrative)의 과제, 즉 소설, 영화, 저널리즘, 다큐드라마 등의 과제라고 말한다. 요컨대 이론이 아니라 이야기가 세상을 바꾼다. 우연한 개인들의 이야기가 상세히 서술되고 공감을 얻음으로써 연대의 계기가 되고 도덕과 정치를 진보시키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로티가 던지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의식은 사적인 자아창조의 추구와 공적인 연대의 희망을 이론적으로 결합시킬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도발적인 주장이다. 과거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진리나 이념이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관통하면서 삶의 방향성을 확립해주었으나, 이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단일하고 초월적인 진리란 없다. 그래서 로티는 우리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개인적 우연성을 음미하고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면서 사적인 자아창조 행위를 수행해야 하며(아이러니스트의 과제),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우연성을 이해하고 공통의 이기적인 희망을 그들과 함께 공유하려는 공적인 연대를 창출해야 한다(자유주의자의 과제).

이처럼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당신은 우리가 믿고 원하는 것을 믿고 원하는가?”라는 물음과 “당신은 고통받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구분하는 것이며, 세계관에 관한 물음과 고통에 관한 물음을 구분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우리가 동일한 본성, 동일한 어휘,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고 그것을 융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각자의 진리나 이론, 어휘나 신념이 다르다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모두가 하나의 진리나 이념을 공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율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굴욕당하지 않도록 자유주의의 희망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래서 로티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전통 철학의 표어를 다음과 같이 뒤집는다. “우리가 자유를 돌본다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_원서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이 책에서 로티가 제시하는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인간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하고,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자원을 더 가진 자가 빼앗는 것을 저지하는 기획으로서, 단순한 자유지상주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적인 분배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며, 각자의 자아창조를 위해 최대한의 여지를 주는 사회, 그래서 각자가 자신만의 특이한 환상을 실현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사회이다. 이것은 21세기의 새로운 세대들이 바라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는 사회상이 아닐까?

이 책에서 로티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독특한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인용구로부터 책을 시작하여 필립 라킨의 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보코프의 『롤리타』, 오웰의 『1984』 등 다양한 문학작품들이 곳곳에서 심도 깊게 다뤄진다. 20세기 미국의 분석철학이 철학을 ‘과학화’하려고 했다면, 로티는 철학을 다시 ‘문학화’한다. 이를 통해 로티는 철학이란 초월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새롭게 재서술하는 작업임을 밝힌다. 이 점에서 문학과 철학은 다르지 않다.

이때 로티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철학적 인물상이 바로 ‘아이러니스트’(ironist)이다. 아이러니에 반대되는 말은 상식이다. 상식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습관화된 어휘로 자신을 서술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스트가 보기에 상식적인 삶은 자신만의 삶이 없이 그저 누군가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아이러니스트란 자신만의 어휘를 창조함으로써 자신만의 사적인 자아를 만들어가려는 사람을 가리킨다. 로티가 보기에 이런 자기창조 작업은 지식인이나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통찰과 더불어 로티는 사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추구가 때로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잔인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 자아창조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우리는 쉽게 ‘무관심의 괴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티는 사적인 자아창조의 필요성뿐 아니라 그 위험성을 동시에 지적하면서, 우리가 아이러니스트의 과제과 자유주의자의 과제를 둘 다 수행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점에서 아이러니스트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자유주의자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되기를 열망했던 로티의 사회적 희망이자 철학적 메시지였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괴로움이 장차 감소될 것이며,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굴욕을 당하는 일이 멈추게 되리라는 자신의 희망을 그렇듯 근거지울 수 없는 소망 속에 포함시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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