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및 기타 대화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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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및 기타 대화편들
  • 대학지성 In & Out 기자
  • 승인 2020.09.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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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5강>_ 강성훈 서울대 교수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및 기타 대화편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5강 강성훈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강연을 요약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강성훈 교수는 먼저 플라톤이 왜 “철학적 주장을 담기에 적절하지 못한 그릇”인 대화를 글로 남겼는지 묻고,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아포리아(aporia), 혹은 난관에 봉착한 상태에서 끝마치게” 되는 대화의 특성이야말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밖에” 없음을 “저술 방식을 통해서 웅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플라톤 철학이란 “그 전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며 바로 그 때문에 “맥락 독립적/맥락 초월적인 고정불변의 가치 기준으로서 이데아의 존재를 요청”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수학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말한다. 끝으로, “플라톤의 자연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온 『티마이오스』를 보다 깊이 다루면서 그것이 “특정 시기까지 이루어진 탐구의 한 결과물이자 앞으로 계속될 탐구의 한 모델로서 제시된 것”에 불과하다며, 결국 그를 통해 플라톤이 “진리 탐구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간직한 채 “언제나 독자에게 ‘스스로 사고하기’를 촉구”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이야기한다.

▲ 지난 8월 15일, 강성훈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쓰는가?

플라톤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보통 논문 형식의 글을 썼지만 플라톤은 대화편들만을 썼다. 그의 대화편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한다. 그리고 이 대화에 플라톤 자신은 한 번도 낀 적이 없다. 사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다.

대화편이라는 것은 철학적 주장을 담기에 적절하지 못한 그릇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철학적 주장은 보통 그것이 진리라는 주장을 자체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철학적 주장은 보통 논증의 형태로 제시된다. 이에 비해서 대화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일회적 사건이다. 대화 상대자들이 무엇인가에 합의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보편타당한 진리의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플라톤이 대화편의 형식을 취해서 글을 쓴 이유는, 역설적으로, 대화가 가지는 이러한 불완전한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작품 곳곳에서 책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다. 설사 어떤 책이 보편타당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배움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소크라테스이고, 이것은 아마도 역사적인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아무런 저작을 남기지 않은 이유에 대한 플라톤의 해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대화편의 불완전성은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이 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중에서도 흔히 초기 작품으로 알려진 대화편들에서 이런 성격이 더 두드러진데, 이런 대화편들에서는 대화가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아포리아(aporia), 혹은 난관에 봉착한 상태에서 끝마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허무함이 수동적으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착각의 여지 자체를 남겨두지 않는다. 독자는 대화편을 읽는 것을 통해서, 예컨대,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함께 경건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볼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은 자신의 목소리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내세운 가상의 대화를 만들어낸 이유인 것이다.

물론 중기 이후의 대화편들은 이런 성격이 점차 희박해져가는 경향을 보이게 되며, 특히 후기 작품으로 간주되는 『티마이오스』의 경우 앞부분에 잠깐 대화가 등장하고 나서 전체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본론 부분은 티마이오스라는 인물의 긴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플라톤이 마지막 작품까지 그래도 대화편의 형식을 고수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철학함’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플라톤보다 2000년 이상 후대의 철학자인 칸트는 사람들이 철학을 배울 것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플라톤은 도대체 배울 수 있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의 저술 방식을 통해서 웅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플라톤이 대화편으로 글을 썼다는 사실의 또 하나의 중요한 함축은 필자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것들도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목소리로는 어떤 주장도 한 적이 없다. 원칙적으로 말해서 대화편의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야기가 저자인 플라톤이 하는 이야기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플라톤은 독자들에게 진리를 전달해주지 않고 진리의 탐구를 촉구한다. 플라톤의 글들이 철학함에로의 초대라면, 우리의 글은 플라톤의 글들을 직접 읽어봄으로써 철학함에로의 초대를 받아들여보라는 초대, 소위 메타적 초대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2. 플라톤 대화편의 문체 변화의 이유

대화편을 쓰는 것이 철학함에로의 초대라면, 그리고 그러한 초대의 전형이 아포리아로 끝나는 초기 대화편들이라면, 중기 이후에 플라톤 대화편의 문체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논박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그가 잘못된 신념에 근거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남들이 논박당하는 것을 보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맛본 사람은 논박을 그 자체로 추구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파이돈』에는 논박을 일삼다가 어떤 주장도 안전하지 않다는 논변 혐오증을 갖게 될 위험에 대한 경고가 등장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제시되는 이상 국가의 통치자 교육 과정에서는 예비 통치자가 10대일 때에는 시가와 체육 교육만을 받고 변증술 교육은 30대가 되어서야 받게 된다. 『파이돈』이나 『국가』와 같이 더 이상 논박적 대화편이라고 할 수 없는 중기 대화편들에 이런 이야기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는 헬레니즘 시기에 대표적인 회의주의 학파가 된다. Skepticism의 어원이 되는 skeptikoi라는 그리스어는 원래 ‘탐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권위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지 않는 논박과 ‘스스로 사고하기’의 정신은 언뜻 보면 회의주의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스타일은 당대 사람들에게 그런 오해를 받았고, 아카데미의 역사를 보면 플라톤의 후계자들에게도 한때 그런 오해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플라톤은 중기 대화편들 쯤에 오면 그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는 소크라테스가 단순히 논박만 하고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로 글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사안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탐구를 촉구하는 것이라는 ‘대화편으로 글쓰기’의 근본정신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대화편으로 글쓰기’라는 정신과 ‘문화 정전’이라는 아이디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의주의 아카데미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장군 술라의 아테네 공격 당시에 멸망하고, 그 이후에는 플라톤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에게서 ‘정전’의 대우를 받은 작품은 『티마이오스』였다. 『티마이오스』는 85% 이상이 티마이오스가 혼자 하는 긴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마이오스』는 플라톤 작품 중에서 일견 ‘대화편으로 글쓰기’의 정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티마이오스』가 후대에 정전의 대우를 받는 데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티마이오스』가 대화편의 성격을 거의 상실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플라톤 사상의 여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설명이 대화 형식을 취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추정도 어느 정도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회의주의적인 태도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 진리 전달자로서의 이론을 세우는 것도 거부하면서, 양자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어떤 의미에서 ‘문화 정전’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겠다.

3. 어떻게 살 것인가?

플라톤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定義)를 찾는 작업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에 대해서나 다 정의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경건이나 용기 등의 가치 개념들에 대한 정의를 찾으려고 했다. 플라톤 철학은 그 전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왜 플라톤에게 덕의 단일성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경건이 무엇이고 용기가 무엇이고 분별이 무엇이고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서 소위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이 각각의 덕목이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특별한 문젯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덕목들이 각각 독립적이라는 것은 이것들이 서로 상충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결국 덕을 갖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덕목들이 상충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가치 딜레마의 문제’라고 부를 법한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두 가지 중요한 입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임의의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있다는 것이다. 인식의 부재, 혹은 곤란함이 존재의 부재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가치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피상적 이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적인 논박들은 가치 개념들에 대한 피상적인 규정들 각각이 진정한 규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행동 규정도 가치 개념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定義)의 역할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바로 이러한 고찰로부터 맥락 독립적/맥락 초월적인 고정불변의 가치 기준으로서 이데아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행동 규정도 가치 개념에 대한 진정한 규정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능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이 있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이데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철학자란 맥락 초월적이고 고정불변인 가치 기준으로서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앎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가능한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모두 다 아는 사람이 있어야, 나라가 나라로서 맞이하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다. 이것이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조금 복잡하다. 덕의 단일성을 승인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가치 딜레마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중요한 것은 이 경우에도 여전히 사회 속에서 가치 충돌의 상황이 벌어질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덕의 담지자가 기본적으로 개인이기 때문에, 덕의 단일성을 통해서 가치 딜레마의 문제가 극복되는 것은 일단 개인 차원의 일이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답인데, 다른 사람은 또 자신의 처지에서 앞 사람이 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정답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가 덕과 관련해서 질서와 조화를 갖추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개인만이 아니라 나라가 ‘나라로서’ 덕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는 기이한 주장을 한다. 덕을 갖춘 나라에는 ‘좋음’이 구현되어 있어서 이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가진 통치자가 바로 나라에 ‘좋음’을 구현하는 자이다.

4. 수학 교육의 필요성

『국가』 편의 소크라테스는 이상 국가의 통치자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앎을 가질 수 있을까? 『국가』에는 이상 국가의 통치자를 배출하기 위한 일종의 교육 프로그램이 제시된다. 예비 통치자들은 20세가 될 때까지는 시가 교육과 신체 단련 교육만을 받는다. 20세가 되면 10년 동안 수학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5년 동안 변증술 교육을 받는다. 35세가 되면 다시 ‘동굴 속’으로 내려가도록 강제되어 그때부터 15년 동안 실무 행정을 담당한다. 50세가 되면 드디어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강제’되고,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 나면 번갈아가면서 통치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수학 교육이 10년이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왕성한 시기로 여겨지는 20대 시기 전체가 수학 교육에 할당되어 있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수학적 연산은 맥락 초월적이고 고정불변인 계산 기준을 제공한다. 그리고 정의의 이데아나 경건의 이데아 같은 것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접근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수학적 연산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다. 플라톤은 수학이 우리 영혼의 눈을 이데아 세계로 돌리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런 목적을 위해서 수학을 10년이나 배워야 할까? 그리고 애초에 예비 통치자가 배워야 한다고 하는 수학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영어 ‘mathematics’는 그리스어 ‘mathēmata’를 어원으로 가지며, 그리스어에서 이 말은 단순히 ‘배울 거리’라는 뜻이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눈을 돌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배울 거리’ 다섯을 제시한다. 이것들이 산술,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음학(harmonia)이다. 이들 중에서 산술, 기하학(그리고 입체기하학)은 오늘날에도 수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누구나 동의할 만한 것이지만, 오늘날 천문학이나 화음학을 수학이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국가』의 소크라테스는 별을 구경하고 현이 내는 소리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당대의 천문학과 화음학적 관행을 비판하면서, 천문학이나 화음학도 기하학처럼 ‘문제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문제 중심으로 천문학이나 화음학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국가』에 등장하지 않는다. 문제 중심으로 천문학이나 화음학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천문학이나 화음학과 같은 배울 거리를 정말로 ‘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왜 이상 국가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부를 10년씩이나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단서를 우리는 『티마이오스』에 가서야 찾을 수 있다.

5. 『티마이오스』와 플라톤의 자연학

『티마이오스』는 고대에서부터 플라톤의 자연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플라톤의 자연학’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플라톤은 현실 세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이데아 세계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생각이 대중적으로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티마이오스의 설명 뒷부분에 불의 종류, 공기의 종류, 물의 종류, 흙의 종류 등에 대한 설명, 다양한 종류의 감각에 대한 설명, 신체의 구성과 기능에 대한 설명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티마이오스』가 당대의 정통 자연학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플라톤의 자연학의 출발점은 이 세계가 질서를 가진 세계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가졌던 믿음의 특별한 점은 자연이 가진 질서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플라톤이 보기에는, 태양이 항상 동쪽에서 뜬다는 대략적인 수준의 질서를 넘어서서는 이 세계가 무질서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사실은 사람들이 자연의 질서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뜨는 위치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자연이 세부적으로는 무질서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진정한 질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자연의 질서를 찾는 것이 바로 플라톤이 생각하는 천문학자의 일이다.

동일함의 원과 다름의 원을 교차시켜서 세계영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중요한 형이상학적 함축을 갖는 이야기이겠지만, 자연학적 측면에서 보면 태양이 뜨는 위치가 날마다 달라지는 외견상의 무질서를 더 깊은 차원의 질서를 통해 설명하는 시도이다. 두 개 원의 조합으로 태양의 운동을 설명하는 모델을 고안한 사람이 플라톤 자신이든 아니든,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델을 『티마이오스』 편에 제시하면서 플라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하늘의 별을 구경할 것이 아니라 천문학을 문제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국가』편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천체에 대한 관찰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체 관찰을 통해 얻게 된 데이터를 단순히 데이터 자체로서 수집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일종의 주어진 문제처럼 간주하고 그 데이터 이면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질서, 맥락 초월적이고 고정불변인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티마이오스는 관찰 데이터 이면의 질서를 제공해주는 교차된 두 개의 원을 세계영혼이라고 이야기한다. 티마이오스가 이야기하는 세계는 영혼도 가지고 있고, 물, 불, 공기, 흙으로 이루어진 몸체도 가지고 있고, 또 영원히 소멸을 겪지 않으니, 세계 자체가 하나의 신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영혼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원리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 눈에 보이는 신체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생명 활동이 자기 원인을 갖는 운동으로 구성되는 한에서, 영혼은 자기 원인을 갖는 운동의 원리이다. 그리고 플라톤에서 자기 원인을 갖는 운동은 좋음에 근거한 운동이다. 그리고 좋음에 근거한 운동은 질서 있는 운동이다. 영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세계영혼에 적용해보자. 세계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모든 사물의 운동의 원리이고, 세계영혼에 의해서 이 세계 모든 사물의 운동은 하나의 질서를 갖는다. 교차된 두 개의 원이 세계영혼이라는 이야기는, 자연학적 측면에서 볼 때에는, 두 개의 원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플라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세계영혼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의 운동에 대해 정교한 법칙적 질서를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플라톤 이후의 자연철학자들은 적어도 천체의 운동에 대해서는 모두 정교한 법칙적 질서를 주장했다. 다만 그러한 법칙적 질서는 오로지 천체의 운동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지상 세계, 혹은 달 아래 세계에는 법칙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분을 볼 수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티마이오스의 설명은 ‘지성에 의해 제작된 것들’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필연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티마이오스』 48a)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특히 물, 불, 공기, 흙의 종류들에 대한 설명이나 다양한 종류의 감각에 대한 설명 부분들은 당대의 정통 자연학 논의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즉, 여기에는 법칙적 질서에 기초한 논의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면) ‘지성에 의해 제작된 것들’에 대한 설명에서 천체의 운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필연으로 인해 생겨난 것들’에 대한 설명에서 지상의 사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니, 이 구분이 대략 아리스토텔레스의 달 위 세계와 달 아래 세계의 구분에 상응한다고 하겠다.

중요한 것은 플라톤의 논의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분을 촉발했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플라톤은 양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에 대한 통합적인 설명을 원했다는 것이다. 다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관찰 데이터만 가지고는 지상계의 운동에 대해 두루뭉술한 질서를 넘어서는 이면의 법칙적 질서를 찾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플라톤에서조차 천상계와 지상계에 대한 설명의 성격이 달라 보이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6. 그럴 법한 이야기

플라톤은 도덕적 문제와 자연학적 문제의 차이를 각 학문의 대상에서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티마이오스는 자신의 설명을 시작하면서 이 세계가 이데아 세계의 모상이라고 주장하고, 이 세계가 모상이기 때문에 이 세계에 대해서는 ‘그럴 법한 설명’밖에 제공할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한다. 원본과 모상의 관계는 특수한 관계이다. 원본은 하나이지만 원본에 대한 모상은 무한정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행동들이 모두 정의의 이데아의 모상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원본인 정의 자체에 대한 탐구이다. 그런데 정의 자체를 보통의 우리가 직접 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정의로운 행동 따위의 모상을 경유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정의의 모상이라는 측면에서는 실제 행동이나 가상의 행동이나 차이가 없다. 이에 비해 이 세계가 모상이라면 자연학은 결국 모상에 대한 탐구이다. 이데아 세계에 대한 모상 중 하나인 이 세계에 대해 탐구하면서 ‘사고 실험’ 같은 것을 통해서 그런 탐구를 수행하는 것은 곤란해 보인다. 우리가 사고 실험을 통해서 이 세계와 닮은 다른 세계를 상상해본다면, 그것은 이데아 세계에 대한 또 다른 모상이 되는 것이지 이 세계에 대한 모상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고 실험을 통해서 이 세계와 닮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 논의하는 것은 형이상학이지 자연학이 아니다.

이제 이상 국가의 예비 통치자가 천문학 등을 10년이나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통치자가 자연 세계의 질서를 파악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긴 할 것 같다.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면 좋은 삶을 살기도 어렵고 좋은 사회를 이끌기도 어렵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런데 티마이오스의 설명이 플라톤의 자연학을 담고 있다면, 예비 통치자는 티마이오스의 설명과 비슷한 것들을 10년 동안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티마이오스의 설명이 단지 ‘그럴 법한 이야기’라면, 예비 통치자가 그런 그럴 법한 이야기를 오랜 기간 동안 배워야 한다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천문학 등을 10년 동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천문학적 탐구의 결과물과 천문학적 탐구 자체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티마이오스의 그럴 법한 설명은 탐구의 결과물이며, 이 결과물을 열심히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천문학적 탐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 중심으로 천문학을 접근한다는 것은 티마이오스의 설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티마이오스의 설명에서 시사되는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연구 프로그램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 ⑴ 데이터를 수집한다. ⑵ 수집된 데이터에서 무질서한 요소를 파악한다. ⑶ 무질서한 데이터의 이면에 놓인 질서를 파악한다. 『티마이오스』는, 이 세계가 법칙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런 작업을 수행했을 때 어떤 성취를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산술,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음학 등이 모두 어떻게 해서 서로 연관되고 친족 관계를 맺는지를 파악하면 아름다움과 좋음에 대한 탐구에 유용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배울 거리들은 각각 특정 영역에서 일견 무질서하게 주어진 데이터의 이면에 있는 깊은 차원의 질서를 파악하는 작업들이다.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친족 관계를 맺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계가 어떻게 통일적인 질서를 갖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좋음 자체에 대한 탐구에 유용하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가 설득력이 있다면, 『티마이오스』는 탐구의 완결된 결과물로 제시되었다기보다 특정 시기까지 이루어진 탐구의 한 결과물이자 앞으로 계속될 탐구의 한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다. 무지를 자처한 소크라테스만이 아니라 플라톤도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선언을 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적 정신을 이어받아 그는 언제나 독자에게 ‘스스로 사고하기’를 촉구한다. 하지만 ‘스스로 사고하기’가 ‘자기 멋대로 사고하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진리 탐구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리 탐구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다시 이 세계가 좋음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강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티마이오스』를 비롯한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문화 정전으로 기능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구체적 내용들 때문보다 바로 이러한 플라톤의 정신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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