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문학문의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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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 시대 인문학문의 혁신
  • 임재해(林在海) 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
  • 승인 2020.09.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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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

대학이 지성집단이자 학자들의 공동체라면 사회변혁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변혁은커녕 대학 자체의 변혁조차 못 하고, 오히려 코로나19의 명령에 복종하는 체제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체제에서는 학문의 전당이나 장터 뒷골목이나 다르지 않다. 누구나 바이러스의 지시에 따라 마스크를 끼고 일정한 격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대학 강단은 텅 비워둔 채 각자 방에서 모니터와 대면하는 게 고작이다. 원격강의나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새 강의 방식에 활기는커녕, 평소 강단에서 으스대던 교수들이 모니터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일부 교수들은 온라인 강의를 하느라, 시종일관 자기 얼굴만 가득 메운 화면 속에서 강의 노트를 읽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다. 유튜브의 명강사들에 견주어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다.
대학은 전위를 가르치면서도 전위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교수들은 사회혁신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혁신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에 갇혀 있다. 인문학은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면서 인류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다. 인류의 미래를 통찰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인문학문이다. 따라서 자가당착의 고리를 끊고 자기모순을 극복하려면, 크게는 대학의 인문학문 체제를 혁파하고, 작게는 자기 연구와 강의 방식을 쇄신해야 한다.

구성으로 보면 인문대학은 사실상 어문대학이다. 국어국문학과를 비롯한 중요 국가별 어문학과가 횡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 이것을 아우르는 인문학문은 없다. 문사철 가운데 사학과 철학은 구색 맞추기로 인문대학 구석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100년 전의 어문학 중심 체제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말을 배우고 문학작품을 독해하는 어문학은 19세기 수준의 인문학이었다. 세계화 시대이자 문화의 세기에는 문사철을 아우르는 문화학을 중심에 두고, 세계 각국의 전통과 현실문화를 비교 연구하며, 분절된 분과학문을 통섭하는 인문학문을 해야 인문대학답다.

한국의 인문대학은 일제강점기 동경대학이 모델이었다. 경성제대에서 출발한 서울대학은 그 전철을 따르는데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의 동경대 인문계열에는 어문학과가 없다. 인문학과가 있어서 중국사상과 문화학, 인도철학과 불교학, 종교사학, 미학과 예술학, 이슬람학 등의 전공이 있고, 인문계 전공으로는 기초문화, 일본문화, 아시아문화, 구미문화, 사회문화, 문화자원학, 한국문화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문화학 일색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문대학은 19세기 어문대학 체제에 안주하여 세상의 변화를 이끌기는커녕 적응조차 못한 채 퇴행하고 있다.

인문학문을 혁신하려면, 교수들이 선배 교수로부터 배운 전공에 따라 연구하고 강의하며, 제자들에게 다시 같은 전공을 지도하는 전공 세습 체제부터 혁파해야 한다. 21세기 대학에서 어문학과의 전공이 4대째 세습되고 있는 모순 현상에도 아무런 성찰조차 없다. 그러니 학문의 혁신은커녕 바이러스의 지시에 우왕좌왕하며 교수직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처지이다. 물려받은 전공과목에 목을 매지 말고 현실적인 전공을 새로 만들어서 강의하고, 후학들에게도 미래체제에 맞는 전공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권력 세습보다 더 문제가 전공 세습이자 학문 세습이란 것을 자각해야 한다. 학문은 독창성이 존립 근거이고 창조적 통찰력 발휘가 생명인 까닭이다. 

크게 대학체제의 혁파와 함께, 작게는 교수 자신의 연구와 강의의 혁신이다. 인문학자가 인류의 일상이 된 스마트폰 문화를 외면하고 서재 속의 작품 독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현실도피이자 직무유기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SNS인 페이스북에서 펼쳐지는 사람살이를 연구는커녕 강의에 활용조차 않는다면, 인류문화의 발전은 고사하고 신세대의 발목을 잡은 채 미래의 짐이 될 따름이다. 학생들처럼 더 이상 학벌 자랑하지 말고, 학자답게 바람직한 미래문화를 구상하는 연구에 골똘하며, 교수로서 온라인 강의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시민들까지 사로잡아야 한다.

지금은 비대면의 언택시대라기보다 온라인 접속이 대세인 온택시대라는 인식이 더 긴요하다. 재택근무의 온택사회에서는 도시 집중보다 교외 분산이 미래 주거생활 방향이며, 스킨십이 아니라 클릭십이 새로운 윤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연구와 강의 모두 급격한 전환과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 교수들 스스로 대학 캠퍼스에서 해방되어 전원에서 재택 연구실을 일구어가며, 거대한 구조물과 행정조직으로 구성된 기존 대학을 해체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한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벌이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창조적 상상력의 새 탑을 쌓아가야 인문학문을 혁신할 수 있다.


임재해(林在海) 안동대 명예교수·민속학

영남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동대학교 인문대 민속학과 교수로 있는 동안 국학연구원장, 박물관장, 인문대학장을 역임하고, 실천민속학회장, 한국구비문학회장, 비교민속학회장,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장 등의 학회활동을 했다. 현재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공동대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민속문화를 읽는 열쇠말, 지역문화와 문화산업,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마을문화의 인문학적 가치, 고조선문명과 신시문화 등 3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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