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아름다움, 문학의 지성 … 『아름다움의 지성』이 말하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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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름다움, 문학의 지성 … 『아름다움의 지성』이 말하려는 것
  • 오길영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0.09.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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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아름다움의 지성』 (오길영 지음, 소명출판, 527쪽, 2020.07)

이번에 낸 두 번째 평론집 『아름다움의 지성』(이하 『지성』)은 4부로 짜였다. 1부와 2부는 작품론과 작가론이다. 비평의 요체는 역시 작품론이라고 판단하기에 앞부분에 배치했다. 1부는 계간 『황해문화』에 몇 년간 쓴 문학평을 묶었다. 계절마다 주요하다고 여겨지는 작품과 쟁점을 다뤘다. 2부는 계간 문학평과 별도로 쓴 작품론들을 묶었다. 3부는 문학 일반론으로 그때그때 제기됐던 문학적·문화적 쟁점들을 다뤘다. 4부는 이론비평, 문화론, 외국문학을 다룬 글들로 한국문학과의 접점을 찾고자 한 글들이다. 여기에는 이제는 찾기 힘들어진 외국문학 전공자인 평론가의 자의식도 작용한다. 한국문학과 외국문학 사이의 길트기를 시도한 글들이다. 

모든 비평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담은 글을 쓰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지성』을 관류하는 문제의식을 몇 가지로 정리해본다. 제목이 그 책의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아름다움의 지성’도 그렇다. 고심 끝에 이 제목을 골랐다.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것으로, 지성은 이성적인 것으로 보면서 둘을 대립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분법이 현재 한국문학을 지배하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지성』에서도 몇 번 인용했던 T. S. 엘리엇의 지적대로 좋은 시는 감각·감정과 사유·지성이 온전하게 결합된 시다. 소설도 그렇다. 근대문학을 지배하는 낭만주의적 문학관에서는 직관과 상상력을 강조한다. 이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직관은 논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감각이나 감각적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예컨대 문학적 언어의 정수인 시(詩)를 해자(解字)하면 언어(言)의 집(寺)이란 뜻이다. 언어로 세운 집이지만 문제는 그 언어가 어떤 언어인가에 있다. 뛰어난 작가들은 “감각적 사유”(sensuous thought) 혹은 감각을 통한 사유, 사유하는 감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엘리엇). 『지성』에서 내가 한국문학의 지형을 평가하는 잣대이다. (1부의 「문학적 지성이란 무엇인가?」, 「시와 감각적 지성」 등 참고) 

아름다움에 대한 편협한 이해의 또 다른 원인은 아름다움을 언어적 표현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 문학계를 지배하는 휴머니스트 문학관에서는 시를 읽을 때 시어의 아름다움, 비유의 능란함, 이미지의 독창성, 잘 짜인 구성 등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 시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작가와 작품을 예리하게 분리해 평가하는 신비평의 틀이 작동한다. 작품을 작가·시인의 삶과 분리해놓고, 작품만을 물신주의적으로 평가하면 누군가에게는 그 작품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휴머니스트 비평에서는 그런 형식주의적 아름다움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곧 '알음다움' 이다. 아름다움은 ‘알음’ 곧 앎과 사유, 지성의 문제이지 감각적 세련됨이나 테크닉만의 문제가 아니다. 휴머니스트 비평가처럼 삶이 "불결"한 어느 시인·작가의 작품에 표현된 언어의 아름다움을 고평(高評)할 수 있다. 하지만 맥락이 문제이다. 작품물신주의에서는 아름다움이 다른 맥락과 배치 관계에서는 추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무시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여전히 작품은 '객관적으로' 아름답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좁은 맥락에서는 언뜻 아름답게 보였던 작품도 더 넓은 (사회역사적) 맥락과 배치 관계에 놓이면 추해질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아름다움의 맥락과 배치 관계를 고민하는 것이지 마치 선험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아름다움이 작품 안에만 있는 것처럼, 혹은 작가·시인의 삶을 포함한 더 넓은 (사회역사적) 맥락과 분리된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맥락과 분리된 작품의 아름다움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작품물신주의다. 『지성』에서 나는 작품물신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삶과 작품의 관계를 그 사이에 작용하는 매개(mediation)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는 시도를 했다. 어떤 철학자는 철학의 유일한 대상이 삶(Life)이라고 말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의 유일한 대상도 삶이다. 문학주의자들은 화들짝 놀라겠지만 강하게 말해 작품도 부차적이다. 작품은 더 나은 삶을 사유하는 것이 존재 이유다. 삶과 분리된 작품의 아름다움은 공허하다. 그것이 아무리 형식적, 기술적 아름다움을 뽐낼지라도 그 아름다움은 피상적이다. 아름다움의 깊이가 문제이다. (1부의 「미투와 낭만적 정념」, 2부의 「비극적 삶의 기억」, 3부의 「총체적 인격과 작품」 등)

『지성』에서 내가 제기하려고 했던, 다른 몇 가지 쟁점을 소략하게 정리한다. 『지성』은 순문학 혹은 본격문학과 기타 문학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관점을 문제 삼는다. 이런 구분법은 동의하기 힘들다. 굳이 구분하자면 좋은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이 있을 뿐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문학의 정전(正典)을 정하는가? 그런 질문에 대한 논쟁만이 가능하다. 예컨대 장르문학 작가로 폄하되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이 보여주는 서사 구성이나 캐릭터 형상화는 웬만한 순문학 작품보다 뛰어나다. 그는 그냥 좋은 작가이지 장르문학의 작가가 아니다. 그런 고정된 틀을 깨는 것이 『지성』의 문제의식이다. (2부의 「악을 장악할 수 있는가?」, 「역사소설가의 외로움」 등)

『지성』은 해설과 비평을 동일시하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비평계에는 이해할 수 없는 통념이 작용한다. 해설과 비평을 동일시한다. 이런 관점은 비평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든다. 비평은 작품 앞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작품의 논리와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내재주의 비평(immanent criticism)이 아니다. 내재주의 비평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비평의 전부는 아니란 뜻이다. 비평은 좀 더 담대해져야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컨텍스트와 얽혀있다. 비평은 그 얽힘의 양상을 분석해야지 컨텍스트를 배제한 채 텍스트 분석에만 몰두해서는 곤란하다.(4부의 「텍스트란 무엇인가?」 등) 그 결과가 작품물신주의(the reification of text)이다. 작품물신주의는 문학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작품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히 작품은 비평의 핵심대상이다. 다만, 작품만이 비평의 대상이라고 보는 태도가 문제라는 뜻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생산하듯이 비평은 작품을 매개로 한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고유한 감각과 인식을 생산한다. 작가나 비평가는 다른 방식으로 미지의 것을 향한 “사유의 모험”(D.H. 로런스)을 감행하는, 긴장되면서도 서로를 자극하는 동반자다. 뛰어난 창작과 비평은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 그리고 심지어 '알려질 수 없는 것'(the unknowable)을 향해 열리고 또 나아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작품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려나갈 때 캐릭터와 그들이 맺는 관계와 그 관계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확정된 견해(opinion)를 미리 갖지 않는다. 오히려 주어진 견해를 의심하고 그 너머를 사유한다. 『지성』이 작품을 읽는 핵심적 문제의식이다. 그러므로 자주 언급되는 비평의 겸허함도 그 의미를 다시 숙고해야 한다. 작품 앞에 내재적으로 머리를 조아린다고 겸허한 비평이 되는 게 아니다. 창작이든 비평이든 겸허함은 자기가 표현하는 감각과 인식의 한계에 대한 성찰에서만 가능하다. (3부의 「한국문학의 아픈 징후들」 등)

끝으로, 『지성』은 ‘칭찬의 비평’과 거리를 둔다. 어떤 작품에 대해서나 칭찬도, 비판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칭찬의 비평, 비판의 비평이라는 규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정확한 비판인가, 정확한 칭찬인가만이 관건이다. 비평가 자신의 안목을 걸고, 최대한 공명정대하게, 작품의 칭찬할 대목을 정확히 가려 칭찬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예리하게 비판하면 된다. 누구도 비평에서 객관적 정답을 찾았다고 자임할 수 없다. 칭찬과 비판을 적재적소에 맞게 하는 것, 그것이 균형 잡힌 의견(balanced opinion)을 모색하는 비평의 본령이다. 강하게 표현하면 모든 비평은 의식하든 않든 일종의 평가이고 심판이다. 나는 한국평단에는 어떤 기이한 자의식, 즉 비판으로서의 비평을 극구 거부하려는 자의식이 강하게 작동한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균형감각을 잃고, 칭찬할 수 없는 작품을 칭찬하는 것이다. 비평에서 필요한 것은 신중함(prudence)과 온전성(integrity)을 견지하려는 태도이지 칭찬이나 비판을 선험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내 문제의식이 얼마나 내실 있는 결실을 맺었는지는 『지성』을 읽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1991년 계간 『한길문학』에 임철우·양귀자론을 발표하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산문집 『아름다운 단단함』(2019), 평론집 『힘의 포획』(2015), 연구서 『포스트미메시스 문학이론』(2018), 『세계문학공간의 조이스와 한국문학』(2013), 『이론과 이론기계』(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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