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손을 잡았나?
상태바
천도교와 기독교는 어떻게 손을 잡았나?
  • 이영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한국사
  • 승인 2020.09.06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가 말하다]

■ 저자가 말하다_ 『동학·천도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연대, 1893~1919』 (이영호 지음, 푸른역사, 412쪽, 2020.07)

3·1운동은 천도교인 15인, 기독교인 16인, 불교인 2인 등 종교인 33인이 민족대표를 자임하여 선창한 뒤 전 민족, 전 계층,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사건이다. 역사학계에서는 그 성격에 대해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인가, 아니면 학생·교사·노동자·농민 등이 주도한 민중운동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민족이나 민중 등 거대담론을 벗어나 지역적 특성과 장소성에 주목한 사례연구가 집적되었고, 나아가 3·1운동의 표상과 그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주요 화두로 삼기도 한다.

저자는 만세시위운동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을 왜 종교인들이 먼저 제창하게 되었는지 그 연원에 관심을 두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에 연대하게 된 종교 내적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소급해보면 천도교의 뿌리는 동학이랄 수 있고 기독교는 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와 같은 뿌리라고 본다면,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로 상극의 처지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연대가 가능했을까?

1894년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동학 남접의 지도자들은 동학조직 뿐 아니라 일반농민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19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농민항쟁의 흐름과 1860년 이후 창도된 동학운동의 흐름이 1894년의 시점에서 결합하여 반체제·반외세의 기치 하에 폭발한 사건으로서, 동학의 남접 지도부는 농민항쟁의 흐름을 대표하고 동학의 북접교단은 동학운동의 흐름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흐름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다시 결별했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으로 2004년 『동학과 농민전쟁』을 저술한 적이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의 변혁운동과 동학교단의 동학운동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3·1운동에 이르는가를 검토함으로써 연구상의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2006~2007년 또는 최근의 헌법개정 논의 가운데에는 ‘동학농민혁명’-3·1운동-4·19혁명-5·18민주화운동-촛불 시민혁명의 역사를 헌법전문에 넣어 민주주의의 기원과 연혁을 분명히 하자는 주장이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사건이나 운동을 헌법정신에 반영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3·1운동에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지도자들이 참가했다고 하여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을 일직선의 계승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명이 일반화되고 있지만, 저자는 동학남접과 농민세력이 주도한 그 사건을 ‘동학농민전쟁’이라 부른다. 동학농민전쟁-3·1운동 사이에는 여러 노선의 복합과 분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엉킨 실타래를 풀어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1919년 3·1운동 사이의 계승 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또 다른 동기 중의 하나다. 

▲ 손화중(오른쪽)
▲ 손화중(오른쪽)

첫째, 제1부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또는 그 정신을 계승한 동학 변혁세력의 운동을 기독교와의 갈등과 소통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1885년 처음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동학농민군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저자는 몇 가지 드문 사례를 찾아냈다. 동학의 변혁세력이 서울의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격문을 붙여 경고한 사건, 황해도 동학군 치하에서 7개월 동안 버티며 동학군과 소통한 매켄지 기독교 선교사의 사례, 손화중의 부하들이 전북 일원에서 기독교를 표방하며 영학당을 조직하여 봉기한 사건 등이다. 이들 사건에서 동학의 변혁세력과 기독교가 접촉하고 대립하고 갈등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검토했다. 초점은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의 변혁세력이 1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변혁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에 있지만, 3·1운동에서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대한 점을 염두에 두고 동학의 변혁세력과 기독교의 관계에 주목했다. 두 세력은 갈등했지만, 동학의 한울님,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둘째, 제2부에서는 3·1운동에서 천도교와 기독교가 어떻게 연대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선도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파헤쳤다. 1905년 12월 창건된 천도교는 기독교를 모델로 삼아 근대종교로의 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에 천도교 중앙대교당, 지방의 각 교구에 교회당을 건립해 나갔다. 제사 형식의 의례를 일요일의 공중예배 형식으로 바꾸었다. 중앙집권적 교구제를 통해 포덕을 공개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교회당 설립, 예배형식, 포덕방식에 있어서 천도교는 기독교를 모방하고 또 경쟁하면서 교세를 급격히 확대했다. 천도교인 40만, 기독교인 20만을 일컬을 정도로 천도교세가 기독교의 2배에 달했다. 성미제를 통해 확보한 재정은 3·1운동에서 개별교회 중심의 기독교 측에 자금을 빌려줄 정도로 넉넉했다. 민족적 의제를 놓고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대하게 된 배경에 기독교를 모델로 한 천도교의 근대종교화, 천도교와 기독교의 경쟁을 통한 상호 교세의 확장 등이 자리 잡고 있었던 점을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셋째, 제1부와 제2부 사이에 노선의 전환과 단절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한 변혁운동은 1904년경에 이르면 소진된다. 이미 동학의 남접 변혁세력은 동학의 북접교단과는 결별하여 노선을 달리해왔다. 북접교단도 남접 변혁세력을 배척하면서 교단의 재건과 포덕의 확장에 매진했다. 포덕은 서북지방에서 성공했다. 과제는 교단 재건이었다. 불법 사교집단으로 몰려 탄압받던 동학교단으로는 불가능했다. 여기서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는 문명개화로의 노선 전환을 선택했다. 손병희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1904년 진보회 운동은 문명개화 노선의 기조 하에 전개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지원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친러파 광무정권을 비판하는 정치운동을 전개했다. 교세 확장, 진보회 운동 등을 기반으로 손병희는 천도교를 창건할 수 있었다. 노선을 전환한 천도교는 동학의 남접세력이 주도한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교단사에서 삭제하여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사실 동학의 북접교단은 동학의 남접 변혁세력이 주도한 1894년의 제1차 반체제 봉기에 적극 반대했었다. 일본군이 동학교도를 탄압하자 제2차 반외세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함과 동시에 창건한 천도교는 반일운동에 참여한 과거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천도교가 문명개화 노선으로 전환함으로써 그 계통에 속한 기독교와도 연대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도교의 노선 전환과 그로 인한 동학 변혁운동과의 단절은 천도교 민족대표를 매개로 한 동학농민전쟁-3·1운동의 계승성이나 연계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 3·1운동은 초기에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대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촉발했지만, 후기에는 민중의 역동성이 아래로부터 분출했다. 동학 남접세력의 변혁운동 노선은 문명개화 노선으로 변신한 천도교 민족대표 주도의 3‧1운동이 아니라 민중 주도의 후기 3‧1운동에 합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에서 3·1운동에 이르는 이러한 민중운동의 계보가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제1부와 제2부를 구별하여 동학이 천도교로 변신하면서 노선전환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 사이를 직선적인 계승관계로 보는 관점을 비판했다.

한국 역사를 살펴보면, 불교의 시대, 유학의 시대를 지나고, 1860년 동학의 창도에서부터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60년은 근대 전환기 종교지형의 변동이 격심하게 일어난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근대화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민족종교=신흥종교와 외래종교의 연대가 빛을 발했다. 한국 근대 전환기는 정치사회적 혼란과 동요가 종교에도 그대로 반영된 시기이고, 종교가 정치사회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간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민족 신흥종교인 동학·천도교와 서양 외래종교인 천주교·기독교의 갈등과 연대 속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 신흥종교와 외래종교의 관계는 사상사적으로도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본서에서는 깊이 다룰 수 없었다. 또한, 3·1운동 이후 한국전쟁까지 진행된 종교지형의 변화도 검토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영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한국사

인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 근대 사회경제사, 민중운동사, 지역사라는 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저서로 『한국근대 지세제도와 농민운동』(2001), 『동학과 농민전쟁』(2004), 『개항도시 제물포』(2017), 『근대전환기 토지정책과 토지조사』(2018), 『토지소유의 장기변동』(2018)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