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단 ‘인격’으로,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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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보단 ‘인격’으로,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기파』
  •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 승인 2019.12.3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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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기파랑가’ 모티브로 삼은 SF소설 『기파』(박해울 저, 허블, 2019.11)

▲ SF소설 『기파』는 독보적인 개성으로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았다. ⓒ 허블
▲ SF소설 『기파』는 독보적인 개성으로 심사위원의 극찬을 받았다. ⓒ 허블

척박한 국내 SF소설계에 독보적인 개성을 가진 작가와 작품이 탄생했다. 바로 박해울 작가의 『기파』다. 이 작품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2018년 한국과학문학상(장편)을 받은 작품이다. 최근 『기파』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이 SF소설은 완성하는 데 무려 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몇 번의 퇴고를 거쳐 단편에서 중편으로, 중편에서 장편으로 규모를 키워나갔다.

박해울 작가는 신라의 화랑 ‘기파’를 찬양하는 노래 <찬기파랑가>를 읽던 중 의문을 가졌다. 과연 그는 실제로 찬양받을 만한 행동을 한 인물일까? 혹시 향가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찬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라고. 소설 『기파』는 어떻게 해독하느냐에 따라 진실이 뒤바뀔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됐다.

『기파』는 난파된 우주 크루즈 ‘오르카호’가 이야기의 주요 배경이다. 사건은 주인공 ‘충담’이 ‘기파’를 찾기 위해 오르카호를 돌아다니며 발견하게 되는 일들을 다룬다. 충담은 수십 명의 시민을 구하느냐, 자신의 가족을 살리느냐의 사고를 겪었다. 그 결과 딸의 심장을 인공심장으로 계속 바꿔야 하는 상황이다. 만약 딸이 생체심장으로 바꿀 경우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충담은 사례금을 받기 위해 의사 기파를 찾아 오르카호로 간다.

그런데 사실 기파는 의사가 아니라 인공지능 로봇이다. 진짜 의사 기파는 오르카호가 난파되면서 죽었다. 인공지능 로봇은 외과의 기파를 돕고 있었다. 기파는 사망 직전 마지막 소원으로 인공지능 로봇에게 자신을 대체해주길 바랐다. 자신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치료해달라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로봇은 새로운 기파가 되어 난파된 오르카호에서 사람들을 치료한다.

‘기파’는 정말 찬양받을 만한 인물인가

문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생한다. 사람들은 인간 의사 기파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추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 로봇으로 바뀐 기파를 알아차린 자는 충담과 인공 눈을 단 '아누타'뿐이었다. 딸의 생체심장을 얻기 위해서 충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누설하면 안 된다. 한편, 기파 역할을 하던 인공지능 로봇은 더욱더 기파처럼 되기 위해 연구하고 행동했다. 마지막에 인공지능 기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인공지능을 다루는 작품들은 끊임없이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인공심장이나 인공장기를 하면서 인공지능 로봇을 닮아간다. 거꾸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성격을 닮기 위해 행동을 따라 하고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과연 인간은 무엇이며, 인공지능 로봇이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심사를 맡은 서울SF아카이브 박상준 대표는 심사 경위에서 “아마 이 작품이 제시한 설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상호 인식 및 이해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오랫동안 현실의 레퍼런스로 유효할 것”이라며 “안드로이드라는 직접적인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 그 자체의 메타포로서도 말이다”라고 밝혔다. 『기파』는 박해울 작가가 상당히 공을 들인 게 역력하다는 점이 대상으로 선정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SF소설 역시 문학이다. 심사평을 보면, 응모된 작품들이 대부분 ‘분노’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SF소설이 꼭 ‘인간 대 인공지능’이라는 대립 구도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보라 소설가는 “전반적으로 과학소설을 쓸 때 인권 감수성과 젠더 감수성을 키우고 음모와 반전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한다”면서 “문학 작품이 아닌 ‘SF를 쓴다’ 또는 ‘SF는 이래야 한다’라는 편견을 버리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기파』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정체성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기술보단 인격으로 글을 썼다는 또 다른 심사평은 그래서 이해된다. 박해울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되는 이유다.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과학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교수신문> 학술 객원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학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과학과 기술, 철학, 문화 등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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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혀니 2019-12-30 12:20:43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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