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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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I)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8.30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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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F 이슈 리포트]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노정혜, 이하 연구재단)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치료와 예방을 위한 과학기술적 대응 외에 인문학적 성찰과 대응으로 지속발전 가능한 인류사회 모색을 위한 기획보고서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보고서를 발간했다.

코로나19 감염증이 전 세계적 팬데믹(pandemic) 현상으로 확산되고 장기화 되면서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 상호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 국은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인문학적 고민과 성찰에 기반한 논의는 미비하다.

비유컨대 인문학은 ‘인간 바이러스’들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돌리는 백신이었다. 어느 특정 시대, 지역에서만 그러했던 것도 아니다. 사람이 인문을 빚어내던 시초의 순간부터 인문학은 백신으로서 널리 그리고 오래토록 활약해왔다. 디지털 기반 정보통신기술(ICT)의 급속한 발달에 힘입어 온 세상이 ‘내 손안의 지구촌’으로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맞닥뜨린 글로벌한 재난 코로나19 팬데믹! 이 미증유의 바이러스에 직면하여 “인문학은 과연 재난에 빠진 인간을 구제하는 백신 역할을 여전히 수행할 수 있을까?”

이를 짚어보기 위해 다섯의 인문학자가 참여한 이번 기획보고서에는 전염병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관련 이슈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담고 있다. 지난 주 기획보고서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에 이어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I)’의 주요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I)

▷ ‘멀티택트(multitact)시대와 교육장 재구성의 방향’ (김월회 교수,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김월회 교수는 “멀티택트(multitact)시대와 교육장 재구성의 방향”에서 교육장의 재구성을 코로나19로 야기된 상황에 대응하고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하는 데 핵심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역설로서의 코로나19” 같이 다소 도발적인 화두를 던지며 논의를 시작한 그는 코로나19 이후를 합리적으로 사유함에 요청되는 정신과 태도를 ‘멀티택트’라는 표현으로 대변했습니다. 더불어 코로나19로 인해 적어도 지난 반세기 넘게 교육의 장을 주도했던 주요 중심이 해체되거나 동요되었음을 지적하였고, 이와 연관된 과업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과업 해결을 위한 기본 방향으로 ‘소규모화’, ‘거주지화’, ‘과학기술화’, ‘평생화’를 제안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사유하는 네 가지 방향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사유함에 교육 본령의 구현이란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러한 ‘근본’은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문명조건의 변동,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방식 변이와 같은 ‘시세’와 유기적으로 연동될 필요가 있다. 교육 본령의 ‘시의적 구현’이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사유함에 궁극적 목표로 설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4차 산업혁명이 교육장에 던진 제반 과제를 지식과 기술의 수련, 사회적 인격 역량의 함양 같은 교육 본령의 실현이란 근본 지향 위에서 풀어감이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사유함의 필수 전제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러한 전제 아래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대비하기 위한 기본 방향으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소규모화’라는 방향이다. 비대면 수업으로 지식이나 기술의 연마는 유의미한 수준 이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해도 사회적 인격 역량 구비는 몹시 어렵다는 지적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코로나19 이전부터도, 예컨대 출석수업으로 진행된 대형강의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마찬가지였다. 꼭 100명, 200명 씩 듣는 강좌에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다. 강의실에서 드러나지 않게 앉아 있기만 할 수 있는 규모에서는 수강생 모두의 사회적 역량 제고를 추동해냄은 난망한 일이다.

100명은 고사하고 수강생이 20명가량만 넘어도 사실 사회적 인격 역량의 함양이란 교육목표를 지식이나 기술 수련과 동시에 또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웠음은 코로나19 이전부터도 널리 또 오랫동안 공유되던 문제였다. 화상회의용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으로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때도 수강생 규모로 인한 문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소규모 강좌는 대면수업으로, 대규모 강좌는 비대면 수업으로’ 식의 이분법을 확고하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면 대 비대면’ 식 이원 대립구도 설정은 교육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에 그렇다. 근자에 대안대학으로 그 성가를 더해 가고 있는 미국의 미네르바 스쿨이 온라인 기반 수업임에도 모든 강좌를 20명 이하로 운영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강좌 당 수강생 규모를 적어도 20명 이하로 줄여갈 필요가 있다. 대학의 강의만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본격 시행될 고교 학점 이수제를 실시할 때도 과목당 수강생 수를 가능한 20명 이하로 운영한다는 확고한 방향을 관철해갈 필요가 있다.

둘째는 ‘거주화(居住化)’라는 방향이다. 사회적 인격의 함양은 교실 안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교실 밖에서 이루어지는 동학들 간 교류와 관계 형성을 통해서 실현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실 바깥이 교실 안보다 사회적 인격 형성에 더욱 크고 결정적인 인자가 되기도 한다. 물론 학교가 그러한 관계 형성이 능률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학교가 반드시 교실만으로 대변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경우는 기숙사 등의 거주공간도 학교의 일부이며 강의실에 있는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곤 한다. 초중등 학생은 ‘집동네’로 표현할 수 있는 거주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 일상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을 학교와 대척 관계에 놓는 이분법적 사고틀이 여전히 행세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학교 중심, 매일-아침-등교 중심, 집합 중심의 동요 내지 해체는 그러한 사고틀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교라는 제도적 교육 공간 중심의 교육체제에서, 일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주지 중심 또는 그 둘을 두 축으로 하는 교육체제로의 중심이동에 더욱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학교(교사)-학생-학부모-지역사회’의 연쇄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회로가 제도권 교육의 기본값[default]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배움터’ 내지 ‘공부터’로서의 학교는 기존의 학교만 유용한 형식이 아니라, 예컨대 가정학교(home school)나 지역학교(local school) 등도 유용한 형식일 수 있다. 다만 관건은 이들 중 어느 학교 형식을 표준-중심으로 볼 것인지가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엮어내는지에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학교 대 학교 바깥’ 식의 이원 대립구도를 얼른 내려놓아야 할 때인 것이다.

셋째는 ‘과학기술화’라는 방향이다. 교원이나 교육과정, 교육내용, 교육행정 등 제반 차원에서 교육현장을 지배하는 보수적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가 늘 있어 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진보하는 과학기술의 성과를 교육현장에 능동적으로 도입, 응용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의도적 저항은 은근하지만 정책의 효율성과 시의성을 확실하게 떨어뜨릴 정도로 도도하기도 하다. 비용 등의 문제로 의지가 있어도 과학기술의 성과를 본격 도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그렇지만 코로나19로 유아교육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제도권의 모든 교육이 전면 중단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유의미한 수준 이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준 힘은 바로 과학기술에서 비롯됐음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디지털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한 비대면 수업을 실시함에 적잖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심각한 한계와 결점이 다수 노출됐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활용했던 과학기술은 완성품이 아니다. 과학기술은 결코 고인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보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 화상회의 용도로 개발된 프로그램 수준에서 사뭇 진전된, 아직은 영화 같은 데서만 가체험할 수 있는 기술 수준이지만, 이를테면 3차원 가상공간에 마련된 사이버 강의실에 교사와 학생 모두가 입체적으로 구현된 사이버 인격체로서 참여하여 실제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수업과 진배없는 감각과 상호작용 아래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다. ICT 기술이 지금까지 이룩해온 진보의 속도와 성취를 감안하면 말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해 제기된 교육 과업의 건설적 수행과 미래교육의 구축이라는 과제를 논의할 때 ‘과학기술의 선도’라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고 일러준다. 과학기술은 이제 더는 교육을 뒷받침해주는 보조적, 부차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 교실 같은 오프라인 공간 중심,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일률적으로 정해진 시간만큼 학습하는 방식 중심의 교과과정, 교수법, 교재가 아니라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을 설계하고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평생화’라는 방향이다. 사회교육·성인교육·직장교육·직업재교육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의 평생교육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이 사뭇 커졌다. 아니, ‘평생학습체계’ 같은 용어가 대두되었듯이, 코로나19 이전부터도 그러니까 4차 산업혁명이 일상 차원에서 폭 넓고 속 깊게 전개됨에 따라 대학을 제도권 교육의 정점이자 완성으로 보는 패러다임 하의 평생교육은 그 형질의 근본적 혁신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연유 때문이었다. 21세기 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지식 기반 사회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늦어도 지난 세기말부터 지식은 인간다움의 고갱이보다는 이윤 창출의 핵심 자산으로 활용되어 왔다. 국가나 기업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지식이 생계의 미더운 자산이 된 지도 꽤 됐다. 이제 지식을 익히는 일은 전통적 의미의 공부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밑천을 획득하는 활동이 되었다. 또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 바탕이 되었다. 이제는 비유컨대 ‘최저시급’처럼, ‘최저지식’의 지속적 획득이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시대인 셈이다. 게다가 ‘100세 시대’, ‘인생 n모작’ 같은 표현이 말해주듯이 초고령화 사회를 향한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평생직장 패러다임이 붕괴된 지 자못 되었고, 사회 진출 후 첫 직업으로 평생의 삶을 지탱하는 시절도 지나갔다. 제2, 제3의 직업을 가질 수 있거나 아니면 ‘평생 직업’이 가능한 역량을 갖춰야 한다. 더는 대학이 교육의 완성이 될 수 없음이, 유아-초등-중등-고등 식으로 연쇄된 제도권 중심 교육 패러다임만으로 평생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19가 대학이라는 오랜 중심을 뒤흔든 것은 도리어 우리에겐 긍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일정 연령대를 정해 놓고 개인의 성장 발달 정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교육을 수행하는 제도권 교육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생애주기에 따른 복지 패러다임처럼, 생애주기에 따라 교육이 지속 가능하도록 설계된 ‘평생복지로서의 평생공부’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입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 ‘느린 독서(Slow Reading): 인포데믹으로서의 코로나19에 대응하며’ (이동신 교수,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영문학자 이동신 교수가 제시한 ‘느린 독서(Slow Reading)’도 같은 맥락에 서 있습니다. “느린 독서(Slow Reading): 인포데믹으로서의 코로나19에 대응하며”라는 글에서 그는 과거부터 사람들은 또 권력은 희생양을 지명함으로써 전염병같이 “원인이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고, 치유나 전망도 불확실한” 데서 비롯되는 공포를 해소하고자 했고, 이는 코로나19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다만 이전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가짜 뉴스와 같은 인포데믹이 그것입니다. 바이러스만큼이나 위험한 이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분열과 부조화의 어두운 행로”를 걷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급박한 팬데믹과 혼란스러운 인포데믹 상황”의 대응책으로서 ‘느린 독서’를 제시합니다. 느린 독서를 통해 인포데믹을 야기한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을 빚어낸다면, 적어도 인포데믹에 대한 백신으로서의 역할을 느린 독서가 톡톡히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 또한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펼쳐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이자 동시에 인포데믹이라면 독서를 통해 천천히 읽는 경험, 그리고 독자로서 정보의 시간과 다른 자신만의 시간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독서의 이런 특징은 이미 논의된 바가 있다. “지속적 시간은 독서와 삶 모두의 특징이다”라고 말하며, 영문학자인 폴 암스트롱(Paul Armstrong)은 독자반응 이론의 선구자인 울프강 이저(Wolfgang Iser)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이저는 “독자는 텍스트를 살아있는 이벤트로 경험한다... 독서는 경험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그 이유는 “의미 자체가 시간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이저의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서의 시간성을 신경과학적 측면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그는 “자극의 타이밍과 자극의 신경적 통합의 차이는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생명체를 특징짓는 시간적 분열이다. 두뇌의 인지과정의 비동시성(nonsimultaneity)은 삶의 고유한 시간적 불균형의 한 측면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무언가를 인지하는 과정은 두뇌에 시간적 불균형을 자아내고, 이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이해인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두뇌가 시간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정과정은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던 “가상 현재”(specious time) 혹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지속”(duration)과 같이 가상의 폭을 만들어내어 자극과 반응을 순차적으로 잇는 과정이다. 즉 두뇌 스스로 시간성을 만들어내어 이해를 유발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정한 시간차는 독서를 포함한 우리의 의미생성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인지과정의 시간적 불안정성은... 미학적이면서 문화적인 현상에 중추적”이라고 암스트롱은 말한다. 덧붙여 암스트롱은 반복적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서 경험은 두뇌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향이 무엇인지, 어떤 미학적 그리고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지는 흥미롭게도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감수성이 무뎌진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습관을 생성하는 반복은 그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는 습관의 형성으로 가능한 즐거움도 있다.... 습관형성 반복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고 정반대의 결과, 즉 반응성의 감소나 고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다. 습관화의 무의식은 미학적 즐거움의 신경적 기반 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독서의 중요성은 이해력, 비판력, 창의력 등을 함양한다는 차원에서 논의되곤 한다. 하지만 암스트롱의 말처럼 습관적인 반복적 독서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면, 천천히 읽는 행위만으로도 자신만의 시간성을 형성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천천히 읽는 독서 습관을 통해 인포데믹에 대처하자는 의미에서, “느린 독서”(Slow Reading)를 제안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코로나19 이후에 독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TV에 책을 읽고 해설해주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매체의 특성상 프로그램은 깊은 이해와 면밀한 분석은 빠른 속도로 전할 수밖에 없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보통 사람이 읽는 속도에 맞춰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상상하기 힘들다. 문제는 그처럼 짧은 시간에 빠른 속도로 이해와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를 시청자가 수용할 만한 내용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미 통용되는 개념과 논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작품이 다름에도 비슷한 키워드가 반복되고, 같은 윤리적 메시지가 강조되고, 특정한 방식의 접근법이 되는 경우가 흔한 이유다. 반면 “느린 독서”는 좀 더 다른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기후변화라는 재난의 목전에서 이전과 다른 세계관과 인과론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다른 읽기를 강조하며 19세기 소설을 논의하는 타니 영 최(Tina Young Choi)와 바바라 랙키(Barbara Leckie)는 “느림”(slowness)을 강조한다. 이들은 “느린 인과론”(slow causality)이 “인간과 지질학적 시간성을 조화시키며 불완전한 증거가 좀 더 완전한 이해를 보조하도록 하는 전략적 방법론으로서의 서사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후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느림”은 19세기 소설에만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작품을 읽고 새로운 인과관계를 세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것은 “느린 독서”의 이차적 목표다. 사실 급변하고 위급한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러한 인과관계로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당장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급박한 팬데믹과 혼란스러운 인포데믹 상황에서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에 “느린 독서”를 제안하며 글을 마친다.

 

▷ ‘코로나 위기로 싹트는 새로운 삶의 철학’ (신혜경 교수, 서울대 미학과)

미학자 신혜경 교수의 통찰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코로나 위기로 싹트는 새로운 삶의 철학”에서 그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 코로나19 대응의 성과를 긍정하는 한편으로 그러한 대응책이 “다른 사고에 열려 있는 성숙한 사회적 분위기와 시민의 자발적 참여”의 결과인지를 되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대응 방식이 ‘민주적 모델’이라고까지 운위되지만 혹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적 방어를 앞세우지는 않았는지, 말단의 저임금 노동자나 “우리 사회 각처에서 필수적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과로와 헌신을 당연시하며 딛고 선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봤습니다. 더불어 코로나19로 인한 분노 내지 타협 혹은 우울의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에게 “대중의 역량 강화, 연대감, 집단행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치유의 매개체로서 예술”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문학과 예술의 힘이 단지 미학의 세계에서만 유효하게 작동됨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실질적이고도 핵심적으로 작동된다는 통찰입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의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에 나타난 논의를 가져온다. 이 책에서 퀴블러로스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의 태도 변화를 다섯 단계로 설명하는데, (1)부인, (2)분노, (3)타협, (4)우울, (5)수용이 바로 그것이다. 한 사회 전체가 엄청난 트라우마를 경험할 정도로 거대한 참사나 생태적 재앙을 겪게 되는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패턴이 작동할 수 있다.

지젝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대처 방식과 태도 또한 이와 유사한 방식을 거치리라 예상한다. 먼저 (1)부인이다. 코로나는 기존의 독감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공포와 위기를 조장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자들의 음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터져 나온다. 그 다음엔 (2)분노. 예를 들어 이 모든 재앙은 중국인의 탓이라거나 록다운(Lockdown) 조치를 시행하지 않은 정부의 책임이라거나 사이비 종교집단의 무분별한 집단 행사 때문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이후엔 (3)타협. 희생자가 있긴 하겠지만 최악의 피해는 줄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섞인 타협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경우 이어지는 것은 결국 (4)우울이다.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은 불가능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져서 감염병의 위기는 열악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몰아치는 불행일 뿐이라는 깊은 불신과 우울감이 똬리를 틀 듯 일어난다.

그러나 퀴블러로스의 다섯 단계 도식이 알려주듯 우리에게는 또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마지막 (5)수용 단계 말이다. 코로나 위기는 그것을 수용하는 여러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치명적인 위험이 결코 만인에게 동등한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계급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코로나 위기에도 더 없이 안전한 지대에서 사회적 격리를 무리 없이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생존 현장에서 더욱 열악한 위협에 내몰려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코로나 위기가 단순히 생태적이고 의료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진단은 무척이나 적절하다. 따라서 지금의 위기 상황에 처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상태로는 지속할 수 없다는 믿음, 지젝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의 대안적 사회를 사유하는 바이러스, 국민국가를 넘어선 사회이자 전 지구적 연대와 협력의 형태를 실현하는 사회를 사유하는 바이러스”를 감염시킬 수 있다. 이른바 바이러스에 의한 혁명(viral revolution) 말이다.

퀴블러로스의 다섯 단계 도식을 상기한다면, 우리의 현 단계는 아직은 (2)분노와 (3)타협, 혹은 (4)우울, 그 사이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사회적 격리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사람들에게 던져준 정서는 무엇보다도 깊은 외로움과 불안과 같은 우울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의 역량 강화, 연대감, 집단행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치유의 매개체로서 예술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예술은 삶의 전체 과정에 대한 능동적 참여의 감각을 일깨워주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튜브 동영상에는 이탈리아 전역의 발코니에서 펼쳐지는 일반 시민들의 수많은 플래시 몹을 볼 수 있다. 각자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저마다의 악기를 들고 같이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가운데 인류 전체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자는 인간의 의지와 연대감이 강하게 발현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온라인 기술을 기반으로 창조되는 가상 합창단(virtual choir)의 코러스 경험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깊은 감동과 기쁨을 주고 있다.

이러한 대중적인 이벤트 이외에도, 공연예술계는 코로나 시기 동안 다양한 온라인 스트리밍 공연을 펼쳐 보이고 있다.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는 2020년 3월 중순 베를린 필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필두로 시작되어, 기존에 녹화된 다양한 영상 콘텐츠와 무관중 실시간 온라인 생중계를 송출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술의 전당, 국립발레단, 세종문화회관, LG문화센터 등에서 시네마 라이브 이벤트(시네마 라이브 뷰잉) 형태와 개인용 IT 기반 스트리밍&VOD(주문형 서비스) 형태로 수준 높은 공연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대중음악계 또한 온라인 유료 공연을 기획하여 성황리에 진행했다. SM이 지난 4월 최초로 온라인 유료 콘서트를 선보인 이래, 6월 방탄소년단의 방방콘 The Live는 전 세계 관객 75만 명을 끌어 모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또한 미술계에서도 새로운 예술적 시도들이 행해지고 있다. 사회적 격리와 이동금지로 텅 빈 대도시의 공간은 희망과 좌절을 담고 코로나19 전투의 영웅을 기리는 다양한 코로나 거리 미술로 채워지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예술가들은 인터넷 온라인상에서 대중들과 협업하는 새로운 창작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1994년 터너상 수상자인 영국의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Banksy), 현존 작가 중 가장 비싼 가격에 작품이 팔리는 화가인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등, 서구의 대표적인 미술가들도 사회적 고립의 경험을 표현하는 다양한 작품을 창조하고 온라인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대 가장 센세이셔널한 영국미술가라는 평을 듣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코로나에 맞서 분투하고 있는 영국 보건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무지개 미술’을 창조하고 이를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아 창문에 붙일 수 있게 하였다.

▲ Damien Hirst, Butterfly Rainbow, 2020. 데미안 허스트는 희망을 상징하는 무지개 미술에 대해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근로자들의 노고에 헌사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 Damien Hirst, Butterfly Rainbow, 2020. 데미안 허스트는 희망을 상징하는 무지개 미술에 대해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근로자들의 노고에 헌사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예술을 통한 힐링과 치유를 강조하는 이론들은 고통스런 경험을 예술로 담아냄으로써 그 고통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집단적 두려움과 공포를 집단적 공조와 연대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예술을 통해서 “역사상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인간의 소중한 연대의 순간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21세기 최대의 난적을 맞아 과거의 시스템 그대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세워질 새로운 세계는 과거의 잔해를 더욱 강력하게 재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그 길을 택하는 대신 대지의 갈라진 틈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씨앗을 움트게 할 수도 있다. 현재의 위기로 뿌려진 미래의 씨앗을 찾아내어 새로운 세계의 싹을 틔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힘, 우리가 함께 잡은 손에 달린 일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의 코로나 위기는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 다른 생명체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 실존을 대하는 태도 전부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지젝이 말했듯, 만약 “‘철학’이 우리의 삶의 기본 지향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철학 혁명을 체험”해야 할 순간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면한 위협을 극복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때보다도 진정한 성찰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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