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들의 향연...후산마을 '명옥헌 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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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들의 향연...후산마을 '명옥헌 원림'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08.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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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전남 담양 명옥헌 원림

폭풍의 끝자락에서부터 남도 지인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괜찮으나...” 끝을 맺지 못하는 소식들이었다. 망연과 자실의 묵음 속에서도 명랑하게 또 꽃은 피었다고, 아직 만개는 아니라고도 하였다. “거그도 온전치는 않응께 조심하쇼.” 아름다운 명옥헌 원림, 그곳의 계곡도 범람했다 하였다. 

▲ 명옥헌 원림의 하지 풍경.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의미를 지닌 전통정원 방지원도다.
▲ 명옥헌. 명곡 오희도가 은거한 터에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자리하며 원림을 가꾸었다.

산덕리(山德里) 후산(後山)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가에 배롱나무 꽃이 만발이다. 폭풍에도, 폭염에도, 꽃은 피었다. 초입의 너른 주차장에 내려 이정표 따라 걷기 시작한다. 마을 입구에는 방문객의 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바가 설치되어 있다. 그 옆에 286년 되었다는 느티나무 보호수와 확성기 철탑이 나란하다. 아름드리 왕버들과 연꽃이 피어난 작은 연못을 지나 구불구불 마을길을 걷는다.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30여 가구의 마을. 집들과 이웃한 텃밭에는 감나무와 옥수수, 고추 따위가 자라고 있다. 후산마을은 600여 년 전 순천박씨가 정착한 마을이라 한다. 광해군 시절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는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어머니 박씨와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왔다. 그는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그 시절 중앙에서는 반정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이후 조선 16대 왕 인조(仁祖)로 등극하게 되는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이 있었다. 그는 쿠데타에 동참할 지지 세력과 인재를 찾아 전국을 돌다 이곳 후산마을의 오희도를 찾아온다.   

▲ 명옥헌 원림의 상지. 네모난 연못 속에 바위섬이 있다.
▲ 상지에서 바라본 명옥헌의 뒷모습.

명옥헌 원림을 3백 미터 앞두고 길이 갈라진다. 왼쪽으로 가면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다. 오희도를 찾아온 능양군이 말고삐를 맸다는 나무다. 그래서 나무는 ‘인조대왕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계마상(仁祖大王繫馬像)’이라고 부른다. 능양군은 오희도를 세 번 찾아왔다고 전한다.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 찾았듯이. 그러나 오희도는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능양군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나주의 박효립을 천거했다. 박효립은 반정을 위한 거사의 그날 궁궐의 문을 열었던 인물이다. 인조의 집권 후 오희도는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천연두에 걸려 4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은행나무의 솟구친 우듬지를 먼 시선으로만 훑는다.

▲ 우암 송시열이 새겼다는 ‘명옥헌계축’ 바위 글씨.
▲ 명옥헌계축’ 바위 아래에서 계류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줄기는 상지를 채우고 하지로, 또 한 줄기는 곧장 하지로 향한다.

길가 담벼락 곳곳에 원림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다. 270미터, 50미터, 그러다 갑자기 밝은 빛과 함께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뻥 뚫린 하늘같은 연못과 배롱나무 붉은 꽃들.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저 아우성이 어처구니없다. 연못의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들어간다. 원림의 배롱나무 꽃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충분한 개화다. 꽃은 석 달 열흘 동안 피고 진다고 했다. 몇 번째 지고 핀 것일까. 연못에 꽃물결 일렁인다. 배롱나무는 중국 자미성에서 왔다고 ‘자미목(紫薇木)’이라고도 하고 백일동안 꽃이 피고 지는 나무라 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나무 잘 타는 원숭이도 이 나무에서는 떨어진다 하여 ‘미끄럼 나무’라는 별칭도 있고, 둥치에서 간지럼을 태우면 그 끝이 연신 흔들거린다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른다. 남도사람들은 이 꽃이 세 번째 질 때 추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해서 ‘쌀밥나무’라고 했다. 자라면서 표피를 스스로 벗어 겉과 속이 같으니 이 나무는 ‘단심(丹心)’을 의미한다. 사실 원림의 배롱나무는 가장 오래된 것이 150년 정도다. 20그루 정도가 100살을 넘겼고 나머지는 20-30년생이다.

▲ 원림의 배롱나무는 가장 오래된 것이 150년 정도, 20그루 정도가 100살을 넘겼고 나머지는 20-30년생이다.
▲ 연못 속에 꽃들이 별세계로 잠겨 있다.

선홍빛 꽃들 사이로 머리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다소곳한 모습을 드러낸다. 부러 정자를 멀리에 두고 계류를 따라 오른다. 범람의 흔적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정자의 옆모습이 슬쩍 보이는 배롱나무 숲속에 사각의 작은 연못이 있고 몇 발자국을 더 오르면 ‘명옥헌계축(鳴玉軒癸丑)’이라 새겨진 작은 바위가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한다. 오희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넷째 아들인 장계(藏溪) 오이정(吳以井)이 부친을 이어 이곳에 은거했다. 이후 오이정의 차남 오기석(吳紀錫)이 머물렀는데 그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명옥헌’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연못을 조성한 이는 오기석의 손자인 오대경(吳大經)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한국학 족보에는 오대경은 오기석의 아들이다.  

▲ 명옥헌 정자문 속에 배롱나무 꽃 가득하다
▲ 후산마을 입구. 286년 되었다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확성기 철탑과 나란히 서 있다.

‘명옥헌계축’ 바위 아래에서 계류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줄기는 위쪽의 작은 연못인 상지(上池)를 채우고 다시 아래 연못으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물줄기는 곧장 아래 연못인 하지(下池)로 향한다. 이때 ‘물이 흐르면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명옥’이다. 상지는 선명한 네모다. 가운데에 바위가 놓인 수중암도(水中巖島)의 형상이다. 하지는 언뜻 원형으로 보이지만 네모다. 그 안에 배롱나무가 자라는 둥근 섬이 있다.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글다는 방지원도(方池圓島)다. 이 두 개의 연못 사이에 몇 걸음 물러선 정자가 자리한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모습이다. 가운데에 방을 두고 사방을 마루로 열었다. 정자에는 ‘명옥헌’과 ‘삼고(三顧)’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삼고’는 능양군이 반정을 위해 오희도를 찾았던 일을 기억하고자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명옥은 원래 벼슬아치들이 입은 관복에 장식으로 단 구슬인 패옥이 부딪히는 맑고 투명한 소리를 말한다. 패옥의 소리가 물소리와 같다는 비유다. 지금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자 방문 속에 배롱나무 꽃만 가득하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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