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사의 청와대 청원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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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사의 청와대 청원을 보면서
  • 지규용 동의대학교·한의학
  • 승인 2020.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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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규용의 행림방담(杏林放談)]
- 의료시장, 정책, 갈등에 관한 斷想

지난 8월 14일 대한의사협회가 의대 정원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및 한방첩약 급여, 비대면 진료 도입을 철회하라는 대정부 항의집회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정부가 수용하지 않으면 이달 말 다시 2차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경고했단다. 단체별로 대동소이한 내용의 여러 성명서가 있는데 민주사회에서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8월 12일자로 올린 청와대 청원 “저는 감염내과 의사입니다”(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91590)는 비록 대표성을 갖지 못하고 내용도 전면적이지 못하지만 모든 국민에게 의사로서의 억울함을 토로하여 동의와 구제를 청하는 것이므로 정치색을 배제한 진정성의 측면에서, 公器로서의 의료와 개인의 醫權이 경쟁하는 관계, 시장과 정책 두 영역의 작용, 개인적 신념체계 등을 생각게 하여 유독 눈에 띄었다.

청원자는 제일 먼저 기피과목인 감염내과 임상강사로서 내년 일자리가 없다고 서두를 시작한다. 경제적 성공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선한 의사에게도 당국의 부당한 수가정책이 취직조차 어려운 상황을 초래하는 원인임을 은연중 대조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이런 미래의 푸념이 사실 당장 아니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일자리를 잃은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리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경제상황이 나빠진 현 시국에서 얼마나 호소력을 가질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정부와의 갈등을 수사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논증과 분석 부분이다. 의대정원을 4,000명 증원한다는 정부계획에 대해 현재 감염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외과가 기피대상으로서 의사수가 적어진 문제를 예로 들어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직업에서 마찬가지일 것인데, 세부전공이나 영역들은 내부경쟁과 시장원리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절되는 것이지 외부적인 요소가 임의로 개입하는 것은 역차별이 될 수도 있다. 과거에 출산율이 높고 아이들이 많으며 사고와 외상환자가 많을 때는 호황이었지만 지금은 시대적인 상황이 달라진 결과이다. 만일 소아과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임의로 진료수가를 올려준다고 하자. 적정수가 결정방법은 차치하고라도 전문 과목 간의 형평성, 나아가 이종 직역간의 형평성은 어떻게 얼마나 고려할 것인가? 산부인과 의사의 피소를 완화하기 위해 법 규정을 손봐달라는 뜻인가? 정원을 유지하면서 이런 조치들을 취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진정 청원자 마음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서 대국민청원을 하는 것일까?

4,000명의 일자리는 정부와 사회의 몫이지 청원자가 걱정할 일은 아니므로, 제안한 원인분석과 해법을 보자. 정부가 비인기 기피과가 생기게 된 원인, 의사와 환자들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만 오려고 하는 원인, 지역병원들이 의사를 뽑을 수 없는 원인을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사실은 세 가지 모두 우리나라가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런 결과이고, 이 제도를 택한 사회가 감내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아마 전국적인 파업사태를 감당해야 할 주무당국자는 적어도 청원자 이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의료에만 국한되어 있을까? 사람들이 양질의 인력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좋은 대학과 기업, 그리고 최적의 시장을 찾아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이 기본원리를 거슬러 근무의사와 지역의료수요 만족도를 채우고자 한다면 얼마의 예산이 소요될까? 양측의 욕망은 무한한데 과연 가능할까? 평등, 공정, 균형의 원칙을 지키면서 최소비용으로 취약지역 의료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럴 때 정부는 정책을 통해 개입한다.

의대정원이나 설립문제에 대해 필자가 가부를 언급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납세자로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왼쪽 그림에서 지역의료수요만족도와 경제사회적 비용과의 관계에 대한 공공의대설립추세선을 보면 처음엔 비용이 높지만 일정한 선에서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데 반해, 시장개입보전추세선을 보면 비용이 초기엔 낮아도 점차 급격하게 상승하고 만족도도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이를 우측 그림에서 비용/만족도축과 시간축으로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병의원 규모 등의 조건에 따라 세부적으로는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느 경우든 비슷하다고 가정한 것이다.

다음으로 한의학과와 통합의대, 통합면허를 이야기하면서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한다. “특히 감염내과 의사 입장에서 환자들에게 절대 침 못 맞게 하고 한약 못 먹게 합니다.… 접근방법에 있어서 정반대의 학문이고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아이디어 자체에 통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의사가 의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한의사 여러분, 의사가 되고 싶으면 다시 의대든 의전원이든 들어가서 뼈 이름부터 외우십시오.” 지난 3월 코로나환자 생활센터에서 환자들이 한약을 복용할 수 없었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의사들의 진심이다.(원문에는 글 쓰는 내내 얼마나 흥분했던지 띄어쓰기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다. 약품의 주요성분이 전부 한약인 한의처방이라도 주의사항에는 맨 먼저 의사와 상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전혀 공부한 적도 없고 절대 못 쓰게 한다는 광적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사용 및 대처방법을 물어보라고? 이런 황당한 지침이 가능했던 데는 도대체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이런 구조적 부조리에 대해 한의사들은 바꿀 여력이 없다.

의대부터 들어오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니 마음 같아서는 9말0초시절의 ‘라떼’를 시전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다만 한의사의 수익구조 악화와 한의대 경쟁률 저하에는 제도적 소외, 특히 실손보험의 소외라는 구조적 요인이 있고, 그 배경에는 의료 권력과 시스템을 장악한 의사들의 이러한 심층의식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통합의학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장되고 있는 세계적 추세이고, 통합의대 주장은 이런 추세에 부응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한의학의 가치를 증명하고 당대의 과학기술에 맞는 혁신을 이루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한의학을 버리면서 의사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소수지만 의사들이 한의사와 협진하고, 지자체의 자발적 한방진료 수요가 점증†하며, 미국 유수의대의 통합의학센터나 COVID-19*•정밀의학**•시스템생물학*** 등을 포함하여 양의사가 작성한 양•한협진연구들도 많다. 중의학은?‡ 나아가 사회 전 분야에서 통섭과 융합이 추세인데, 통탄을 금치 못한다니 과연 누가 문제일지? 청원자가 이 지점에서 보인 감정적 격앙이야말로 증원과 신설문제보다 ‘한의사의 개입’이 더 본질적이며 참을 수 없는 파업의 이유라는, 의사들의 솔직한 속내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증이다.

의료는 공공의 제도(公器)이면서 동시에 배타적 의료면허를 받은 사적인 개인의 醫權으로 수행된다. 그러므로 公私의 각 영역에 관여하는 시장과 정책의 사이에서 자주 협조와 갈등의 변주를 벌이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청원과 항의는 자연스런 것이고, 제3자가 시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한의사들은 코로나국난에 임하여 의사들의 벽에 막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고, 더구나 이 청원은 국가와 세계 의료제도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한의학에 대해 악의에 찬 비난으로 호도하는지라 부득이 다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고구정녕 부탁하건대, 누군가를 비판 아니 비방이라도 하려면 최소한의 공부부터 하고 나서 차분히 논리를 갖추기 바란다. 그래야 상대도 돌아볼 것이다. 아울러 이 청원이 원만하고 지혜롭게 잘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참고>
지자체, 난임·치매 이어 비만까지 ‘한방진료’ 다각화, 지방자치단체의 한방 친화 행보와 문제점(의사협회)

‡ 상해중의대부속서광병원 4세대다빈치수술로봇도입
(https://mp.weixin.qq.com/s/hqFe572KQDWS9Cd_tKBPmQ)

* Am J Chin Med, 2020;48(3):737-762. doi: 10.1142/S0192415X20500378.
** J Integr Med, 2017 Jan;15(1):1-7. doi: 10.1016/S2095-4964(17)60314-5.
*** Denis Noble, Evid Based Complement Alternat Med. 2009 Sep; 6(Suppl 1): 5–10. doi: 10.1093/ecam/nep101


지규용 동의대학교·한의학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로 있다. 대한동의병리학회 회장, 동의대학교 한의학연구소장과 한방바이오연구센터 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관심사는 한의학이 예전에 누렸던 정상과학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정지(整地) 작업과 한의학 이론의 일반화다. 저서와 역서로는 『격치고역해』, 『새로운 한의학 터닦기』, 『상한론정해』, 『현대상한론』, 『한방병리학』, 『동양철학과 한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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