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극복 위해 인문학 관점에서 본 과거-현재-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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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극복 위해 인문학 관점에서 본 과거-현재-미래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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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F 이슈 리포트] 한국연구재단,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노정혜, 이하 연구재단)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치료와 예방을 위한 과학기술적 대응 외에 인문학적 성찰과 대응으로 지속발전 가능한 인류사회 모색을 위한 기획보고서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보고서를 발간했다.

코로나19 감염증이 전 세계적 팬데믹(pandemic) 현상으로 확산되고 장기화 되면서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 상호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 국은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지만, 정작 인문학적 고민과 성찰에 기반 한 논의는 미비하다.

비유컨대 인문학은 ‘인간 바이러스’들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돌리는 백신이었다. 어느 특정 시대, 지역에서만 그러했던 것도 아니다. 사람이 인문을 빚어내던 시초의 순간부터 인문학은 백신으로서 널리 그리고 오래토록 활약해왔다. 디지털 기반 정보통신기술(ICT)의 급속한 발달에 힘입어 온 세상이 ‘내 손안의 지구촌’으로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맞닥뜨린 글로벌한 재난 코로나19 팬데믹! 이 미증유의 바이러스에 직면하여 “인문학은 과연 재난에 빠진 인간을 구제하는 백신 역할을 여전히 수행할 수 있을까?”

이를 짚어보기 위해 다섯의 인문학자가 참여한 이번 기획보고서에는 전염병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관련 이슈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담고 있다. 기획보고서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I), (II)’의 주요 내용을 2회에 걸쳐 발췌 소개한다.


■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I)

▷ ‘코로나19와 역사적 시각에서 본 전염병’ (장문석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 장문석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 장문석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

역사학자 장문석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야기한 제반 상황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증언한다. 가깝게는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촉발했던 상황에서도, 멀게는 중세 흑사병이 초래했던 상황에서도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사람과 권력이 보인 양상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전염병 팬데믹이 그러했듯이 코로나19도 문명교류와 번성의 산물로서 발생했음에도 도리어 사회적 해체를 야기하고 정치적 긴장을 촉발하며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지식을 시험한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현재가 과거를 드러낸 셈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는 어떨까. 창궐했던 흑사병이 진정되고 세계를 강타한 스페인 독감이 퇴조하자, 사람과 권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팬데믹 이전으로 회귀했다고 한다. 사실 코로나19 이후에도 그런 현상이 반복될 가능성이 낮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랬다가는 더 큰 재난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하여 장문석 교수가 현재를 드러내는 과거를 살펴보는 까닭은 코로나19 이후를 모색하는 우리에게 간과해서는 안 될 귀한 반면교사로 삼아 코로나19 이후의 미래를 한층 진취적으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전염병과 세계화(교류사), 전염병과 사회(사회사), 전염병과 과학(지성사), 전염병과 정치(정치사) 등 다양한 역사적 테마들이 제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테마들을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습득하고 폭넓은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게 된 역사적 감각과 안목에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비교해 보고, 이런 비교를 통해 현재적 이슈들에 대한 좀 더 심화된 인문학적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스탠퍼드대 연구진을 이끈 역사학자 핀들런 교수도 과거와 현재의 비교 작업을 수행하면서 흑사병과 코로나19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언급한바 있다. 먼저, 예나 지금이나 질병과 감염, 사망 등에 대한 믿을 만한 통계 및 보도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잘못된 정보가 실상을 은폐하여 혼란을 조장하곤 한다.

각종 음모론과 미신, 낙인찍기, 사재기 등이 횡행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역병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국가들 간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된다는 것도 과거와 현재가 유사하다고 한다. 이런 정치적 긴장은 역병에 대한 근거 없는 루머를 내세워 각국으로 하여금 보복 행동에 나서게 한다. 그런 정치적 긴장이 오늘날 코로나19로 몸살을 앓는 세계를 엄습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바이러스 탓에 잔뜩 움츠린 채 각국이 보호 장벽을 높이 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 사이에 ‘신 냉전’이 운위될 정도로 긴장이 팽배하다.

그러나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긴장 외에 국가 내부의 사회적·정치적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 즉 계급과 세대, 성별, 인종 등에 따라 코로나19에 의해 받는 타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수혜도 차별적이어서 사회적 위험도와 그에 따른 정치적 폭발력이 점증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점은 일찍이 이탈리아의 경제사학자 치폴라(Carlo M. Cipolla)도 통찰했다. 전염병은 설핏 평등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다. 치폴라는 흑사병이 창궐한 17세기 토스카나 공국의 프라토 지역을 미시적으로 연구하면서 역병의 피해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은 빈민이었고, 반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피해도 덜 입었을 뿐더러 당국의 보건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제재를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보건 규정에 얽매어 불편함을 느꼈던 쪽은 하층 계급이었다. 치폴라가 보여준 그런 사회적·정치적 긴장은 오늘날에도 전염병 대응을 고민할 때 반드시 감안해야 할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 희생양 만들기가 출현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우려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코로나가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믿음 속에서 비등해지는 중국인들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흑사병의 시대에 서유럽인들이 이 질병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 이슬람 세계에서 왔다는 믿음을 연상시킨다. 당시에 서유럽인들은 흑사병을 “오리엔트 역병”이나 “레반트 역병”으로 부를 정도였다. 19세기에도 콜레라가 유럽에 당도했을 때 유럽인들은 이 역병을 “아시아 병”으로 불렀다. 이처럼 역병이 밖에서, 즉 ‘오리엔트’나 ‘아시아’에서 왔다는 생각은, ‘오리엔트’와 ‘아시아’가 역병을 낳을 정도로 더럽고 무지하고 열등한 지역이라는 편견을 전제하고 있다.

흑사병이든 콜레라든 코로나19든 전염병에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뿌리 갚은 담론이 작동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편견과 차별의 담론은 잘못된 정보와 무지에 근거하고, 거꾸로 잘못된 정보와 무지는 그런 담론을 강화한다.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한 정보 통제도 잘못된 정보와 무지를 조장하며 편견과 차별의 담론을 방치한다. 그런 사례로는 미국을 위시한 각국 정부의 엄격한 전시 정보 통제가 이루어졌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정보 통제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또한 방역을 위한 당국의 엄격한 행정적·과학적 대응도 사람들의 의심과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1918년에 종교적 동기와 결합되어 나타난 백신 반대 운동은 지금도 존재하면서 논란을 낳고 있다.

그런 점에서 투명한 정보와 올바른 지식이야말로 역병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적인 무기가 아닐까 한다. 토뇨티(Eugenia Tognotti)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방역과 공중 보건 자체는 전염병을 통제하는 필요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동시에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느껴져 “의혹과 불신, 폭동의 기운”을 낳기도 한다(예컨대 이탈리아 남부의 교도소들에서 일어난 폭동을 생각해보라). 또한 종종 계급적·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해 이루어지는 격리는 이들의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낙인을 찍어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강화한다.

더욱 일반적으로는 공중 보건의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방역은 종종 개인의 권리와 충돌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와 싸우기 위한 비상 대권을 총리에게 허용한 헝가리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전염병이 정치적·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토뇨티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공적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다.

“공적 신뢰는 정규적이고 투명하며 폭넓은 소통을 통해 확보되어야 하고, 그런 소통에서는 공중 보건을 위한 개입에 수반되는 부담과 혜택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공중 보건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과거의 가치 있는 교훈들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핀들런 교수가 들려주는 보카치오의 교훈도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글로벌 도시 뉴욕을 강타한 팬데믹의 위력이 14세기의 글로벌 도시 피렌체를 쓰러뜨린 그것과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는 점에서 14세기 인문주의자의 교훈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보카치오의 걸작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도달하기 전 활기차게 번영하던 피렌체 상업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흑사병의 한가운데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대신,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쾌활하지만, 통렬하게 정곡을 찌르는 세부 묘사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이기적이며 비겁한가를 고찰했다.

그런 인간의 오만과 탐욕, 정념이 책에 빼곡하다. 결국 보카치오가 동료 피렌체인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흑사병이 이 도시에 당도한 것은, 신의 의지나 별들의 배치 때문이 아니라 “분주하게 발전하는 들썩거리는 소비 사회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카치오는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역병이 지나가자 도시는 재건축을 시작하며 예전의 번영과 쾌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사회의 가치가 특히 그처럼 심오한 해체의 순간을 겪은 후에 바뀔 수 있을지 여부”야말로 과거 보카치오의 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관심사라는 것이 핀들런의 요점이다.

이런 생각은 스노든 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사스(SARS)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한 의사의 말을 인용하며 코로나19에 의해 우리가 “영원히 변해야” 한다고 충고한 것과 공명한다. 그의 충고는 역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는 그 이전까지의 삶과 일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도 참혹한 일을 겪어놓고도 병이 물러가고 생존자가 되면 즉각 옛 ‘노멀’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또는 지젝(Slavoj Žižek)이 경고하듯 시스템을 약간만 수정하여 “예전처럼 매끄러운 일 처리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필경 그런 회귀는 망각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스노든이 말하듯 우리가 불가역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역사야말로 그런 집단 기억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감히 비유컨대, 역사학과 인문학에서 말하는 집단 기억은 어쩌면 의학에서 집단 면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역병과 정치, 그리고 인문학: 아테네 역병을 중심으로’ (안재원 교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 안재원 교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 안재원 교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서양고전학자 안재원 교수의 “역병과 정치, 그리고 인문학: 아테네 역병을 중심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기원전 431년에 발발한 아테네 제국의 역병 팬데믹을 서술한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와 이를 비극으로 빚어낸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디푸스왕』을 통해 서양 고대인이 역병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역병 극복을 위해서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자연 질병을 넘어 ‘사회 질병’이자 ‘국가 질병’이었던 역병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방역을 위해서 공동체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특히 정치 리더십에 대한 고민과 반성을 강요했다”고 한다. 당장의 재난 극복은 결국 미래에 완성되기에 재난 리더십에 대한 모색은 역병이 진정된 이후를 어떻게 대비해갈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소포클레스가 사회적 대재난을 문학적으로 가공하여 극장에 올린 것도 그러한 대비책의 하나였다고 한다. “역병이 야기한 분노와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자기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린 사람들을 때로는 위로해주고 때로는 웃게 해주는 감정의 정화”를 통해 역병 이후의 미래에 능동적으로 대처해가고자 했음이다. 서사가 또 연극이 역병 이후를 대비하는 데 건설적이었다는 통찰이다.

 

기원전 431년에 창궐한 아테네 역병을 관찰하고 그 영향에 대해서 관찰하고 성찰한 투키디데스의 관찰을 통해서, 아테네 역병으로 변한 아테네의 사회의 단면,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테네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이 해체되거나 변화되었음도 함께 들여다보았다. 소포클레스의 드라마를 통해서는, 역병을 이기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짚어 보았다.

이와 같은 관찰과 성찰이 이뤄진지 어언 2500여년이 지난 오늘-여기, 역병이 다시 지금은 아테네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창궐하고 있다. CORONA19의 이름도 얻었다. 역병도 나름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 기세가 대단하다. 물론, 의학의 발전으로 코로나19 역병이 그리 길게 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는 만큼,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코로나가 물러날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코로나가 숨어 있는 은신처가, 아테네의 역병에서 볼 수 있듯이, 실은 사람들의 욕망이다.

욕망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서 코로나도 움직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욕망을 강제로 없앨 수도 억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그 욕망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기에, 코로나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다. 이 대목에서, 어쩌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성과 기개와 욕망이 각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정의관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균형과 조화도 개별 시민 각자의 영혼이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뒤에 숨어 다니는 코로나도 더 이상은 위세를 떨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코로나가 아테네 역병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아테네 역병의 가장 큰 적은 건강과 행운이었지만, 코로나는 치료제와 백신이라는 강력한 적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연 질병으로서 코로나의 운명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코로나가 자신의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기후 변화의 위세를 타고 변신해서 다시 등장할 것이다. 이점에서 지금 인류가 코로나와 벌이는 전쟁은 장기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 질병으로서 코로나가 인류 문명에 끼치는 영향이, 그 규모와 위세를 놓고 보건대,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질병으로서 코로나도 못 잡고 있는 형편인지라, 사회 질병으로서 코로나가 남긴 영향과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변화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시기상조라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을 할 상황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테네 역병이 남긴 영향에 대한 인문학적 관찰과 성찰의 사례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의 위력과 영향이 어느 정도일 지에 대한 가늠조차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사이래, 물론, 인간의 지성과 기술은 깊어지고 넓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깊어지고 넓어진 인류의 지적 축적이 세상을 얼마나 좋게 만들었고, 얼마나 아름답게 바꾸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기원전 431년에 창궐한 역병으로 카오스 상태로 변한 아테네의 모습과 2019년에 발생해서 2020년 오늘에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 역병이 만들어 놓은 예컨대 미국의 혼돈과 혼란 상황을 비교해 볼 때,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지식이 아무리 깊어져도,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음이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역병이 창궐할 때에 서양 문명은 거칠지만 대략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긴 했다. 하나는 기독교와 같은 신의 세계에 귀속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을 갖자는 것이다. 후자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철학자가 루크레티우스였다.

하지만, 역병이 정작 닥치면,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이 제대로 작동한 적은 거의 없었다. 중세의 흑사병 시대가 그 단적인 실례일 것이다. 하긴 역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눌린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아무 것도 아닌 소리나 죽고 난 뒤에 구원될 것이라는 신의 음성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인간은 특히 대중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멀리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갈 것이 없이, 오늘-여기에서 창궐한 코로나19가 위력으로 드러난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현장 증거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로나19가 인간의 본성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핑크스의 물음은 지금도 위력적이고, 이에 대해서 오이디푸스가 제시한 답변은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끊임없는 자연의 물음에 답변을 제시해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인간에게 묻는 것에는 코로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인간, 너는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물음도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요구가 해소되기 전에는, 코로나는 물러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21세기 스핑크스인 코로나19가 인간에게 던진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가운데에 하나는 “그것은 인류이다”일 것이다.

적어도 코로나19가 자연 질병이지만 사회 질병이고 그런데 국가 질병이지만 세계 질병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국 차원에서는 퇴치가 불가능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류”라는 말은 ‘유’로서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종’으로 실재하는 지구촌의 인간 공동체를 가리킨다. 인류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적인 코로나19는 퇴치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찾아오게 될 경제 코로나와 안보 코로나의 위협도 극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기후 변화의 위세를 타고 다시 닥쳐 올 제2, 제3의 코로나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기후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스핑크스가 인류에게 던지는 핵심적인 물음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국경 너머로 생존 조건과 생활공간을 확장해버린 “인류”가 합심해서 답해야 하는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인류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라고 강요하는 자연의 경고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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