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화 다양성을 위한 도서정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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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문화 다양성을 위한 도서정가제
  •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 승인 2020.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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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대강당에서 '도서정가제 폐지를 우려하는 출판·문화단체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사진 =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대강당에서 '도서정가제 폐지를 우려하는 출판·문화단체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사진 =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도서정가제는 도서의 가격을 고정시켜 판매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정가(定價)대로 판매하는 전국 균일가 제도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일본 등 비영어권의 문화 선진국들에서 공통적인 출판물 가격제도다. 이들 나라에서는 동일한 책은 어디서나 같은 가격으로 판매된다. 1990년대에 대형 할인점과 인터넷서점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현재는 ‘도서정가제’라 쓰고 ‘할인율 제한 제도’라고 읽어야 하는 현실이다. 10%의 부가세가 면제되는 책에 대해 정가의 10% 이내 가격 할인을 포함해 총 15%의 직·간접 할인을 법적으로 허용한다. 나아가 불필요한 민간 협약으로 카드사 등의 제3자 할인을 15%까지 추가로 인정한다. 부가세 면제를 포함하면 사실상 총 45% 할인 체제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문체부 장관이 매 3년마다 정가제를 ‘재검토’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일몰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잘못된 표현이다.

최근 도서정가제가 다시 뜨거운 이슈다. 문체부의 재검토 기한이 올해 11월로 다가오면서 찬반양론이 다시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년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민관 협의체에서 출판, 서점,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 단체들이 참여한 논의에서 ‘현행 유지’의 합의 틀을 확인했는데, 최종 서명을 앞둔 상황에서 ‘소비자 후생’을 더 고려해야 한다는 청와대 및 문체부 내 규제개혁위원회 의견이 나오면서 문체부 입장이 묘연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현행 유지가 아닌 직·간접 할인율이 확대되며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된 출판·문화계 30여 개 단체는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청와대는 왜 느닷없이 ‘소비자 후생’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을까. 지난해 20만 명을 넘긴 도서정가제 반대 국민청원 여론에 대한 부담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가뜩이나 국정 지지율이 하락하는 마당에 또 다른 돌발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작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도서정가제 논란과 관련해 본 칼럼에서도 문체부 장관이 국민에게 답변하는 계기를 만든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청원’ 내용의 사실 왜곡과 부당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2019.12.21., “도서정가제에 대한 오해와 진실”). <중앙일보>(2019.11.2.), <노컷뉴스>(2019.12.24.) 등의 언론에서도 팩트 체크를 통해 국민청원 내용은 가짜뉴스에 기인한 것이고 사실과 다르다고 보도했다.

현재 상황을 둘러싼 향후 전망은 직·간접 할인율의 ‘현행 유지’ 또는 직·간접 할인율 ‘확대’로 갈린다. 전자책과 관련된 규정안이 제시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정가대로 판매’하는 제대로 된 정가제 규정 개선안이 정부안으로 제시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정가제를 강하게 지지하는 독일이나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 상황을 본다면 ‘출판 다양성과 출판유통 질서, 지역 서점을 포기하는 정책’으로 볼 것이다. 누구든 입만 열면 문화와 책, 독서, 출판, 서점, 도서관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 생태계의 근간이 되는 절대다수의 약자를 배려하는 동반성장 정책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의 취지상 극소수 자본력이 있는 강자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저자, 출판사, 서점, 독자를 위해 정가제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소비자 이익을 명분 삼아 할인 경쟁으로 더 나아간다면 상생이 아닌 상극의 길을 정부가 택하는 셈이 된다. 할인 경쟁이 심화될수록 이미 시장 점유율이 60%를 넘어선 과점 상태의 인터넷 서점만 살고 대다수 지역 서점은 사라질 것이다. 할인을 예비한 거품 가격이 더욱 기승을 부려 가격 신뢰도 역시 추락할 것이다. 중소 출판사들은 할인 경쟁에 나설 여력이 없어서 출판 활동이 더욱 어려워져 다양한 저자 개발에 나서기 어려워질 게 명약관화하다. 이것이 국민이 바라는 일인가.  

도서정가제는 한 마디로 ‘문화 다양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일반 소비재 상품과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인 책(특히 종이책)의 다양성, 출판사의 다양성, 오프라인 서점이 공존할 수 있는 유통경로의 다양성, 유통질서 유지와 공정 경쟁을 위해서 필요하다. 문체부는 더 이상 눈치보기가 아니라 책과 도서정가제가 문화정책의 근간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소모적인 도서 가격제도 논쟁을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에너지로 승화시키기 위한 지혜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백원근 서평위원/책과사회연구소 대표·출판평론가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로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겸 출판정책연구회장, 일본출판학회 정회원이다. 대학에서 출판문화론 등을 강의한다.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화체육관광부 규제개혁위원, 서울도서관 네트워크 위원장, 경기도 지역서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출판산업사』를 썼고, 옮긴 책으로 『서점은 죽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책』, 『책의 소리를 들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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