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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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한가?
  • 최진석 문학평론가/수유너머104 연구원
  • 승인 2020.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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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에 부쳐

■ 저자가 말하다_ 『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 (최진석 지음, 문학동네, 516쪽, 2020.06)

21세기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대중과의 소통’은 한국 인문학의 주요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학 내부의 폐쇄된 울타리에서만 이루어지던 비밀스런 지식 전수를 넘어서, 대학 바깥에서 일반 대중과 교감하며 수평적으로 의사소통하는 지식이 인문학의 새로운 모델로 제기된 것이다. 좀더 역사적으로 조감해 보자면, 이는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불러일으킨 무한경쟁 패러다임에 대한 인문학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근대 학문의 도입 이래 지식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고수하던 아카데미는 지식의 실천적 효용성을 요구하는 대중사회의 요구에 적절히 발맞추지 못했고, 그 결과 학교 바깥의 다양한 실험들, 인문학의 대중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 수유너머104 토론회_제도권 밖의 학문성을 찾아서
▲ 수유너머104 토론회_제도권 밖의 학문성을 찾아서

수유+너머나 철학 아카데미 등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부터 ‘대안적 연구공동체’를 기치로 세워졌던 수많은 비제도 연구단체들이 그 현상의 중심에 있었다.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과는 다른 궤적을 따라 만들어진 이 단체들은 ‘열린 지식의 창조’나 ‘대중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내에서 금기시되던 학문 간의 경계 이탈과 횡단, 통섭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대학 내로 유입된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유포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며, 들뢰즈나 푸코, 데리다, 라캉 등 ‘포스트모던’ 지식의 안내자이자 교사를 자처함으로써 인문학적 성찰을 대중적 차원으로 끌어들이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범람하던 ‘인문학 위기’ 담론을 넘어서고, 감히 인문학의 ‘부흥’조차 운위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대학 바깥에서 이루어지던 이런 노력들이 충분히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명제가 낳은 유의미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지금 2020년대를 시작하는 인문학이 기존의 모든 문제들을 해소한 것은 아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지속적인 과제로 주어져 있지만, 그것이 ‘어떤’ 소통이 되어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형으로 남아 있다. 예컨대 대중의 입맛과 편의주의에 편승한 하향평준화를 지적할 만하다. 이는 ‘인문학 길들이기’란 비판을 받고 있는 한국연구재단의 업적주의 경향과 나란히 현행 인문학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다. 후자가 사회적 진보나 현실 변혁의 요구와는 무관하게 연구자의 실적을 셈하기 위해 작성되는 논문들을 양산함으로써 인문학을 박제화하는 상황이라면, 전자는 먹기 좋게 잘 다듬어지고 이미 소화된 내용만을 반복·제시함으로써 대중의 비판적 지성이 작동하는 것을 저해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어느 쪽이든 당장의 외양은 화려하고 풍성해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인문학이 어떤 위기에 처했고, 어떻게 그것을 돌파해 왔는지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은 채 구태를 반복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인 의미에서, ‘대중과의 불화’가 새삼 화두로 요청되는 시점이다. 근대 학문의 과제였던 대중에 대한 (위로부터의 지적 시혜로서의) ‘계몽’이나 (지적 상품으로서 시장교환에 목적을 둔) 신자유주의적 ‘소통’이 아닌, ‘불화’가 진정 문제적이다. 여기서 불화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던져주고 제공하는 게 아니라, 대중의 취향과 욕망을 거부하고 논쟁을 걸며 계쟁하는 인문학의 힘을 뜻한다.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Le Partage du sensible)에서 말했듯, 기성의 사회적 위계와 문화적 취향, (무)의식적 관습 등은 국가와 자본이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분배된 감수성을 무비판적으로 나눠 갖게 된 결과이다. 시인이 따로 있고, 예술가가 따로 있으며, 노동자가 따로 있는 세계에서 대중은 단지 소비자로서만 자신의 지위와 감각을 소비할 따름이다. 문학은 작가들의 전유물이고, 과학은 전문가들 소관이란 감각을 가진 사람이 인문학을 접할 때, 그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그것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어진 감각의 체제를 뒤흔들고 전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중이 인문학 자체와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진정으로 인문학을 향유하게 되는 방법이 아닐까? 따라서 불화는 소통과 향유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대중과 화기애애하게 덕담이나 주고받는 데서 만족할 게 아니라, 그들과 다투고 논쟁하며 반목함으로써 교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불화를 인문학의 새로운 쟁점으로 제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불화의 실천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이 맞이한 가장 큰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불화의 대상은 기존의 인문학 체계이며, 그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순치된 학문과 교양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불화하는 인문학의 과제는 기성의 인문학에 맞서 인문학이 아닌 것, 즉 상아탑의 권위주의와 시장만능주의의 교환가치를 넘어서는 기이하고 때로는 괴물적인 지식의 공유와 생산에 있을 것이다. 이를 ‘인문학 이후의 인문학’이라 명명하는 데는 현재의 인문학이 고수하는 형식과 내용의 장벽을 돌파하고 낯설게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의 인문학을 넘어서는, 혹은 인문학으로 가치부여된 학문과 교양, 문화적 전체를 전복하는 인문학이 과연 인문학이라 불려도 좋은 것일까? 인문학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는 이로부터 연유하는 바, 만일 인문학에 새로운 시작이란 것이 정말 필요하다면 우리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성으로부터 길어내야 하는 가능성의 지평이란 어떤 것인가? 우선 인문학이 인간학으로서 성립해 왔음을 직시해야 한다.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온 인간중심주의적 가치체계는 인간 아닌 모든 것, 비인간을 무력화하고 짓밟아 지배했으며, 심지어 사멸시켜온 파괴의 역사를 포함한다. 지구온난화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기후재난은 ‘더 나은 인간적 삶’을 명목으로 지구를 파괴하고 지배해온 역사에 다름 아니다. 소위 자연의 복수에 대해 미래를 사유하고 그 대처에 대해 고민해야 할 주체는 비단 과학자들, 정부정책 입안자들만이 아니다. 휴머니즘을 이론적으로 고안하고 실천적으로 지지해 왔던 인문학 또한 근대 이래 인간성의 함양을 내세우며 벌여온 자연지배 및 비인간적인 것 모두의 추방의 역사를 반성하고 비판함으로써 휴머니즘 이후의 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다음으로, 인문학의 문화주의적 지향에 제동을 걸고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인문학의 문화주의는 휴머니즘과 연이어져 있는 가치체계로서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 대한 정당화와 합당화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주의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서구 근대문화의 저변이 WASP(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여기에는 인종차별을 비롯한 권위주의와 위계주의의 총체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여성과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소수자 차별 또한 인문학의 문화주의로 합리화되어 전승되었던 게 사실이다. 때로는 전통의 미덕을 앞세우고, 때로는 다수자의 공리주의를 내세움으로써 인문학은 우리 안의 식민주의와 차별주의를 묵과해 왔던 것이다. 만일 인문학 이후의 인문학을, 이전과는 다른 낯설고 새로운 인문학에 대해 감히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와 문화주의의 멍에를 기꺼이 털어내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전혀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인문학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는 바로 이로부터 성립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문학을 폐기한 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당면한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을 부수고 새로운 출발점을 찾아내는 것은,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든 그렇지 않든, 지금-여기서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다. 앎과 함의 일치로서 인문학의 오랜 소명은 기성의 질서에 동화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문학 자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상이한 내용과 형식 속에 담아낼 수 있도록 창안하는 데서 달성될 것이다. 인문학의 불가능성은 바로 이 역설을 통해 비로소 가능성으로 전화(轉化)하지 않을까?

지금-여기에 놓인 불가능성을 성찰해 보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어느 누구도 이 작업을 감히 쉽고 즐겁게 행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리라. 왜냐면 스스로 기대왔던 인문학의 지반 자체를 부정하고 깨뜨리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조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불가능성을 통과하지 않고는, 국가와 자본에 포섭된 채 마취제로서만 대중에게 봉사하는 인문학의 현재를 타파하기란 불가능한 일일 성싶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것이 인문학이라 불리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지금-여기서 인문학의 불가능성을 검토하고 성찰하며 인문학의 이후를 묵묵히 따져보아야 한다. 스스로를 넘어서는 인문학의 가능성을 직시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인문학은 자신의 오랜 과거와 낯선 무엇이 되어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이 책은 그 같은 망설임 끝에 시작된 첫 발자국의 하나에 불과하다.


최진석 문학평론가/수유너머104 연구원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근대비평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러시아인문학대학교에서 문화와 반反문화의 역동성을 주제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문학동네>로 등단했으며, 문학과 사회, 문화와 정치의 역설적 이면에 관심을 두면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 『불온한 인문학』(공저), 『문화정치학의 영토들』(공저) 등을 썼고,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해체와 파괴』, 『러시아 문화사 강의』(공역)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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