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혹은 새로운 일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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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혹은 새로운 일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 김재인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철학
  • 승인 2020.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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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뉴노멀의 철학: 대전환의 시대를 구축할 사상적 토대』 (김재인 지음, 동아시아, 224쪽, 2020.07)

요즘 ‘뉴노멀’이 유행이다. 정작 실체가 없다는 말도 많다. normal은 ‘정상(正常)’이요 ‘일상(日常)’이다. 뉴노멀이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상(異常)’ 혹은 ‘재난’ 상황이 이제는 새로운 ‘정상’과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리라.

우리의 마음속에선 작금의 상황이 빨리 극복되고 어서 전과 같은 상태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가득하다. 그래서 자꾸 뉴노멀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뉴노멀의 철학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어떤 변화는 일시적이지만, 어떤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 (...) 세상은 다시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 왜인가?

최근 한국은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용인 우리제일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 양천 되새김교회 등 개신교 교회 때문에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폭발해서 심리적 공황 직전이다. 상황이 신천지 교단 때와 비슷해지면서, 정부와 의료진은 물론 많은 일반 시민도 당시 우리가 새로 마련했던 행동 지침을 실행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각급 학교는 원격수업으로 돌아가고, 회의와 강연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당장 가을은 이 상황이 계속되겠구나 하는 절망과 탄식이 흘러나온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새로운 규범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뉴노멀이다.

내게 뉴노멀을 체감하게 한 직접 계기는 코로나19였지만, 사실 그전에도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최근 전 세계에 걸친 폭우와 폭염으로 체험하고 있듯 과거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로 불리다가 최근 ‘기후위기’ 나아가 ‘기후재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게 된 지구 생태계의 체질 변화(물론 생물에게 나쁜 쪽으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지능활동 중 상당 부분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인간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한 ‘인공지능’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다. 이 세 가지 거대한 사건이 수렴된 계기는 물론 코로나19였지만, 나는 이 사건이 모두 서양 근대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내가 『뉴노멀의 철학』을 쓴 배경에는 『삼성이 아니라 국가가 뚫렸다: 들뢰즈, 과타리 이론으로 진단한 국가, 자본, 메르스』(길밖의길, 2015)가 있다. 아마 이 짧은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뉴노멀의 철학』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서양적 관점의 극복과 관련해 중요한 계기를 하나 더 보태면, 「우리 사회에 ‘사회’가 있는가?: 서구 ‘사회’ 관념의 국내 수용 과정 분석」(2019)이라는 논문(나중에 박정원 외, 『공동체 없는 공동체: 21세기 대안사회의 재논의를 위하여』, 알렙, 2020 수록)이 있다.

『삼성이 아니라 국가가 뚫렸다』에서 중요하게 분석한 것은 들뢰즈, 과타리의 ‘국가’ 이론이었다. 모든 것을 양화하는 자본이라는 조건을 국가라는 초월적 심급이 어떻게 조작하는지 밝히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는 국가의 ‘틈’을 통해 자본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 나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와 의료진의 게릴라 같은 노력 속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으려 했다.

다시 짚어본 『뉴노멀의 철학』은 들뢰즈와 과타리의 자본주의 비판(다행히도 나는 ‘자본주의와 분열증’ 연작인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을 번역했고, 박사논문에서 이를 풀이했다)의 연장이다. 특히 이들이 직면하지 않았던 문제인 인공지능과 기후위기 역시도 자본주의 발전의 끝에서 도래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자본주의가 이 위기조차 스스로 극복할 것인지는 중요한 쟁점이자 관전 포인트라 하겠다.

「우리 사회에 ‘사회’가 있는가?」를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왜 우리 사회는 ‘후진적이게도’ 서양의 society에 해당하는 것이 정립되지 않았는지 분석해보려 했다. 그런데 society가 메이지 일본을 거쳐 ‘社會’로 번역되어 수입되고, 이것이 다시 구한말과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한반도에 수용되는 과정을 추적하다 보니, ‘society’와 ‘사회’는 서로 따로 노는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society가 서양 식민주의를 바탕에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과제는 society에서 식민주의의 잔재를 빼고 새로운 사회 개념과 사회 현실을 만드는 일로 수렴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주독립이며,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자유, 평등, 박애, 권리 등 서양 근대가 빚어낸 가치 목록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니체 혹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잘 지적했듯이, 그 안에 숨은 권력의지와 소수자 배제가 눈에 띈다. 이들 가치 목록에서 승인되는 것은 식민주의요, 그 속에서 억압되어 온 것은 소수자(백인-남성-성인-기독교인...이 아닌 자)였다. 따라서 이들 가치 목록을 재검토하고, 탈근대의 가치 목록을 재구성하는 일은 뉴노멀의 과제이다.

나는 책의 앞부분에서 서양 근대의 성취로 건설된 가치들을 점검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개인의 자유’ 대신 ‘사회의 자유도’가 ‘자유’라는 주제를 실질적으로 다루는 핵심 방식이라고 보았고, 또한 근대 ‘계약론’을 넘어서 흄과 들뢰즈가 제안한 ‘느낌의 공유’가 공동체의 시원에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뒷부분에서는 이를 이어 ‘뉴리버럴아츠’를 중심으로 문사철 인문학을 극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을 갱신하자고 각각 제안했다. 이미 선진국인 한국은 집요한 지적 토론을 거쳐 그에 어울리는 철학과 사상을 발명해야 하며, 그것이 탈근대 철학 혹은 뉴노멀의 철학이 될 자격이 있다.

앞의 연구 두 과정을 건너뛰고 『뉴노멀의 철학』을 읽게 되면, 논리적 비약과 국뽕이 먼저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내가 『삼성이 아니라 국가가 뚫렸다』를 쓰지 않았다면 『뉴노멀의 철학』에서 개진된 새로운 민주주의와 거버넌스를 말하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나아가 『뉴노멀의 철학』은 무엇보다 촛불혁명에 대한 헌사이다. 나는 촛불의 분열을 믿지 않으며, 들뢰즈와 과타리가 규정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 혁명의 기념비’를 남겨두고 싶었다.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재인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철학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등과학원 초학제프로그램 상주연구원,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 『생각의 싸움 · 인류의 진보를 이끈 15가지 철학의 멋진 장면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모빌리티 사유의 전개』(공저), 『철학, 혁명을 말하다』(공저) 등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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