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적 유물론’의 관점으로 본 팬데믹 시대
상태바
‘생기적 유물론’의 관점으로 본 팬데믹 시대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8.23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간소개]

■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 제인 베넷 지음 | 문성재 옮김 | 현실문화 | 280쪽

저자 제인 베넷은 주류 철학에서 무력하고 수동적이며 힘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물질’을 새로운 관점에서 탐구하며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을 주창한다. 그는 인간만이 아니라 물질에도 힘과 활력이 있으며, 우리가 자신 이외의 물질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생동하는 물질’들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생동하는 물질’이라는 생각은 서양에서 긴 철학적 역사를 갖고 있다. 바뤼흐 스피노자(모든 사물은 살아 있다는 주장), 프리드리히 니체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사물을 들여다볼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 찰스 다윈, 테오도르 아도르노, 질 들뢰즈, 그리고 20세기 초반 베르그송과 한스 드리슈 등의 개념과 주장들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사상들은 인간과 비인간(다른 물질들)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물질을 능동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우리 인간 역시 수천, 수만 개의 물질(비인간)로 이뤄졌음을 밝히는 일이다. 베넷은 이 책에서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며, 인간을 하나의 행위소(행위자가 아니라)라고 부르고 물질을 하나의 활력가(활력소가 아니라)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인간 행위소의 지위를 재조정하는 작업”은 불가피하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서 누리는 권력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각각의 인간이 생기 있는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 즉 인간의 권력이 '사물-권력'이라는 색다른 주장으로 이어진다.

본래 생태주의, 환경주의를 연구했던 베넷은 하나의 윤리로서의 생태주의, 환경주의의 토대가 생각처럼 단단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의구심은 베넷을 20세기 초기의 생기론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다. 베넷은 앙리 베르그송과 한스 드리슈가 과학적·경험적 탐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사물이 지닌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했다는 데에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한스 드리슈는 자신의 생기론이 나치 독일에 의해 ‘생기가 있고 없음에 따라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데 쓰이는 것에 반대했다. 이같은 생기와 정치적 폭력 간의 관계는 오늘날 미국 기독교 세력이 주창하는 ‘생명문화’와 미국 행정부가 역설하는 ‘선제공격’ 개념과 겹쳐지는 바가 있다. 베넷은 줄기세포가 지닌 여러 가능성과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생명과 비-생명을 구별하고 줄기세포를 둘 중 어느 한쪽에만 위치시키려는 생명문화 옹호자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계속 이어지는 베넷의 고백은 인간중심주의 철학이 지닌 필연적 실패를 벗어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인간이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모순적인 공리에 계속 주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리와 그것을 기억하는 재능을 계발하는 일은, 나타나야만 할 필요성이 있는 새로운 자아를, 새로운 자기이해를 갖춘 자아를 형성하는 핵심이다.” 이로써 우리 인간이 생동하는 물질로서의 경험을 추구해가는 일을 반복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 코로나19 스파이크 단백질
▲ 코로나19 스파이크 단백질

물질의 힘에 주목하는 이 책의 통찰은 2020년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코로나 팬데믹’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막의 바깥쪽에 달려 있는 스파이크단백질은 기존의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해 점액 친화성이 수십 배 이상 높다고 한다. 이 책의 통찰에 따르면, 바이러스 단백질의 이같은 변화는 해당 바이러스가 “인간의 신체 및 사회의 구조와 배치, 연합체를 형성했기에 일어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맞이한 이번 사태는 바이러스의 퇴치와 박멸이라는 외과적 방역을 뛰어넘어, 바이러스와 배치를 이루는 무수히 많은 물질(인간과 비인간)을 함께 살펴봐야 그 정확한 면모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베넷은 환경주의자에서 생기적 유물론자로, ‘자연 대 문화’의 대립과 구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생동하는 물질들의 필연적 이질성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자신의 관점을 바꿔왔다. '우리는 왜 환경을 보호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생태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는 것은 이미 그 전제에서부터 인간 이외의 물질들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베넷은 막다른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생기적 유물론을 제안한다. 이는 인간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비인간의 힘을 주목하게 하면서 큰 인식론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물질의 활력, 그리고 생기적 유물론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이론적 토대는 우리 인류가 새롭게 선택할 철학의 방향을 넌지시 일러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