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자 송익필을 노비로 만든 소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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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자 송익필을 노비로 만든 소송 이야기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8.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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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나는 선비로소이다: 송익필 노비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정치 | 임상혁 지음 | 역사비평사 | 312쪽

구봉 송익필.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시와 문장에 뛰어나 선조대 팔문장가로 꼽히며 명성을 드날렸고, 이이·성혼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으며, 예학의 비조로 일컫는 김장생에게 ‘예’의 본의를 가르쳤다. 송익필은 예학의 대가이자 최고의 유학자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소송에 휘말려 노비 신분으로 떨어졌다. 송익필과 그의 집안을 노비로 만들어버린 이 소송은 어떻게 제기되고 전개되었는가?

이 책은 안씨 집안과 송씨 집안의 소송을 통해 조선의 법에 대해 알아본다. 이 소송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신분제도뿐만 아니라 《경국대전》의 각종 법률 규정, 나아가 붕당정치로 대립하는 조선 중기의 정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소송당사자, 안가와 송가-두 집안은 어떤 관계인가? 1585년 말, 안씨 집안이 송씨 일가에 대해 자기네 노비라고 주장하는 소장을 제출함으로써 시작된 소송은 원고와 피고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100년도 더 지난 일을 따져보아야 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피고 측의 송씨 형제들은 학문으로 명망이 높고 그들의 아버지는 당상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원고 측의 안씨 가문은 1521년 신사년에 권신 제거 모의를 했다는 죄로 몰락했다가 수십 년 뒤 안당이 기묘사림으로 복권되고 시호까지 추증된 집안으로, 송가나 안가 두 집안이 모두 쟁쟁한 가문이었다.

안씨 집안은 왜 송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을까? 송익필의 할머니는 감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으로 거족 집안의 고관 안돈후의 비첩인 중금의 소생이다. 조선의 신분제에 따라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노비이므로 감정도 노비 신분을 갖고 태어났다. 좌의정을 역임했던 안당은 안돈후의 정실이 낳은 아들이며, 감정은 안당에게 배다른 누이다.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과 안당의 세 아들은 고종사촌지간이다. 소송당사자들의 부모 세대가 얼사촌으로 엮인 관계이다.

문제는, 안돈후의 비첩 소생인 감정의 신분이다. 확실히 그녀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긴 했다. 그녀는 나중에 송린과 결혼하여 송사련을 낳았는데, 그의 자녀들이 바로 송익필 형제들이다. 안씨들이 주장하듯 감정이 자기네 집안의 노비 신분으로 태어났으므로 그 후손인 송씨들도 노비일까? 이 소송은 두 집안의 관계로만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 법률 조항을 일일이 따져보아야 하는 문제이고, 법리 적용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하는 문제이다.

송씨 집안과 안씨 집안의 송사에 대한 판결문인 「안가노안(安家奴案)」에 따라 두 집안의 소송을 살펴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많지만, 여기서는 그중 두 가지 쟁점 사항만 소개한다. 첫 번째는 사실관계에 대한 분석이고, 두 번째는 법리 논쟁이다.

(1) 가장 크게 다투어지는 사실관계

송익필의 할머니 감정은 노비 신분이었나? 송익필 형제의 할머니 감정이 천첩 소생의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는 피고 측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조선의 법전은 일정한 지위에 있는 이들의 비첩 소생에 대하여 양인이 되는 길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보충대에 입속하는 방법으로서, 이는 《경국대전》 〈형전〉 ‘천처첩자녀’ 조에 나온다. “대소원인(大小員人: 대소 관원)으로서 공·사노비를 아내나 첩으로 삼은 이의 자녀는, 그 아버지가 장예원에 신고하면 장예원이 사실을 확인하여 장부에 기록하고 병조에 공문을 보내어 보충대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 규정에 따라 천첩자녀들은 보충대에 편성됨으로써 양인이 될 수 있고 일정한 직역을 수행하고 나면 벼슬도 얻을 수 있었다.

남의 자식은 노비로 부려도 자기 자식만큼은 양인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부모 마음일 터. 감정도 이 과정을 거쳐 양인이 되고, 양인 남성 송린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아들 송사련도 관상감 종5품의 벼슬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장에서 안씨 집안은 감정이 속량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아들 송사련은 양인이 아닌데도 불법으로 관상감에 소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안씨 집안에서 감정을 속신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로 103년 전 안돈후의 유서라는 것을 내민다. 이 유서에 무엇이라 쓰여 있을까? 이 유서는 믿을 만한 문서인가?

송씨 집안은 직접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불리한 상황에서 마침내 감정의 보충대 입속입안을 찾아냈고, 제출했다. 그런데 송관은 격식에 어긋난다며 위조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 이 입속입안은 어떠한가? 송관은 무엇을 근거로 격식에 어긋난다고 했을까? 이 문서에 위조의 여지가 있는가?

이 책은 안가와 송가가 제출한 각각의 문서를 하나하나 분석한다. 유서의 형식과 문구도 꼼꼼히 살펴보고 증거력을 가질 수 있는지도 검토한다. 입속입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분석한다. 입속입안에서 인용된 《경국대전》의 조항을 살펴보고 위조 여부를 판단한다. 과연 송관의 판결은 타당했을까?

▲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중 ‘종로에서 치도곤을 때리다’란 제목의 그림. 당대의 대학자였던 송익필도 아버지에 대한 판결에 항의하러 사법기관을 찾았다가 이처럼 볼기를 깐 채 곤장을 맞았을 것이다. (역사비평사 제공)
▲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중 ‘종로에서 치도곤을 때리다’란 제목의 그림. 당대의 대학자였던 송익필도 아버지에 대한 판결에 항의하러 사법기관을 찾았다가 이처럼 볼기를 깐 채 곤장을 맞았을 것이다. (역사비평사 제공)

(2) 소멸시효에 대한 법리 다툼

오랜 시간이 지나서 권리를 소멸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소멸시효이다. 《경국대전》은 일반적으로 5년 과한법을 두었지만, 1517년 중종 때 새로운 과한법을 규정하는 수교가 내려져 30년이 일반적인 소멸시효 기간이 되었다. 그러나 예외 항목이 있었으니, 노비와 관련된 문제는 60년의 과한을 적용했다. 송씨 집안에서는 사건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면서 안씨 집안의 소장을 받아준 것 자체가 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실상 안씨 집안이 몇 번에 걸쳐 냈던 소장은 이 ‘과한’ 문제로 퇴짜를 맞았으나, 결국 장예원은 소장을 접수하여 재판을 진행했다. 장예원은 무엇을 근거로 과한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를 접수하여 심리를 진행했던 것일까? 송관이 끌어들인 법리는 무엇일까?

이 책은 두 집안이 치열하게 다투는 법리 다툼의 이해를 돕고자 《경국대전》, 《대전속록》, 《대전후속록》 등의 법전에서 규정한 조문들, 여러 수교들을 조목조목 들여다본다. 그리고 송관의 법리 해석을 따져본다.

이 책은 안씨 집안과 송씨 집안의 소송을 통해 조선시대의 법과 그 해석, 사실관계를 둘러싼 공방과 치열한 법리 다툼을 살펴보는 것이 일차 목적이지만,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송익필이라는 유학자를 “인포데믹(infordemic)으로부터 조금이나마 구하는 효과”도 꾀했다.

송사가 벌어지기 몇 십 년 전 안씨 집안의 안당은 좌의정을 역임한 권신 가문이었다. 그러나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1521년에 안당의 아들 안처겸 등이 남곤을 비롯한 대신 제거 모의를 한다며 고변함으로써 기묘사화 이후 수많은 선비가 죽고 유배를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안당은 교수형에, 두 아들은 능지처참되어 가문이 몰락한다. 이때 고변한 송사련은 역모를 알려 국가를 구한 공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우리가 흔히 ‘신사무옥’이라 알고 있는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거의 모든 역사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백과사전 등에도 이른바 ‘신사무옥’이라는 항목으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저자는 1521년 신사년에 권신 제거 모의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당대에도 이는 사실로 받아들여져서 ‘안처겸 옥사’로 명명했음을 지적한다. 즉, ‘무옥’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송사련의 고변으로 몰락한 안씨 집안, 특히 안처겸의 아들 안로가 송씨 집안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여기며 그 앙갚음을 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면서 자신의 집안을 기묘사림으로 격상시켰음을 여러 자료를 검토하며 설명한다. 신사년 사건은 안가-송가 송사의 발단이라 할 만한 중요한 사건이므로, 안가 측이 주장하듯, 또 후대에 알려져 있듯, 정말 조작된 사건이고 무고인지에 대해 저자는 먼저 검토한다.

안가와 송가의 송사가 종결되고 3년 뒤인 1589년에 정여립의 모반으로 시작된 기축옥사는 1,000여 명의 동인이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대체로 많은 역사서가 이 기축옥사를 기획하고 막후 조정한 인물로 송익필을 지목한다. 저자가 송익필에 대한 또 하나의 인포데믹으로 지적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기축옥사의 위관이 송익필과 친한 정철이고, 또한 송익필이 서인들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기축옥사의 배후 조정자로 설정되곤 하는데, 저자는 당시 송익필이 소송에 패하여 노비 신분으로 떨어진 뒤 도망다니는 신세였고, 이후 유배를 당한 처지여서 기획이나 조작을 할 여력이 없었음을 말한다. 송익필이 역모 조작을 했다는 것은 150년이 지난 뒤 『동소만록』에서 얘기하는 것인데, 이 역시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말이 안 되는 것을 지적해간다.

안씨 집안과 송씨 집안의 소송은 1519년 기묘사화에서 1589년 기축옥사에 이르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안가노안」에 적힌 송관의 판결문은 견강부회의 법 적용이 많이 보인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 책은 소송판결문을 통해 당시의 법과 정치를 읽고, 법과 법리 적용의 타당성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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