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여성, 그리고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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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여성, 그리고 위로
  •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공연예술스쿨/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0.08.16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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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여러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는 2020년 여름시즌 뮤지컬계에서 유독 눈에 띄는 두 작품이 있다. 창작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극작 박해림, 작곡 황예슬, 연출 장우성, 음악감독·편곡 양주인,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코튼홀, 2020. 7. 4~8. 30, 이하 <전리농>)과 <마리퀴리>(극작 천세은, 작곡 최종윤, 연출 김태형, 음악감독 신은경,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2020. 7. 30~9. 27)가 그것이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초연 당시의 문제점들을 잘 다듬어 차근차근 레퍼토리로 성장했다. <전리농>은 201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플랫폼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재학생의 작품을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제작해,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소극장 별무리극장에서 쇼케이스 형태로 공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2017년 재연, 같은 해 중국 베세토연극제 공식 초청작, 2018년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공연으로 이어졌고, 2019년부터는 ㈜아이엠컬처가 공동제작으로 참여하고 장우성 연출, 양주인 음악감독이 합류하면서 적극적인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뮤지컬 넘버를 새롭게 추가하고 캐릭터 숫자를 줄이면서 작품을 보완하여 유료 관객 점유율 80%를 달성했다. 이번 시즌 공연은 2019년 버전에 대한 ‘앙코르 공연’으로서, 비영리 단체에서 개발한 작품을 민간 제작사가 제작함으로써 상업화하고 수익금의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환원하는 ‘인핸스먼트 계약(enhancement deals)’의 성공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마리퀴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로 제작사 라이브(주)가 주관하고 동국대학교 산학협력단이 협력하는 신진 스토리 작가 육성 지원사업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를 통해 시작되었다. 2017년 시즌2에서 쇼케이스 최종 진출작으로 확정되면서 1년간의 인큐베이팅 작업을 통해 개발되었다. 2018년에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공연에 선정되어 같은 해 12월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2020년 2월 재연(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을 마친 후 약 5개월 만에 이번 시즌 공연으로 돌아왔다. 초연 버전 <마리퀴리>에는 사실 꽤 많은 비판들이 있었다. 마리퀴리보다 남편 피에르의 비중이 더 높다는 점, 조연 안느의 역할이 미미한 점, 음악이 대본하고 잘 결합되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문제들로 지적되었다. 이 문제들은 재연 시 대폭 수정되어 마리퀴리와 피에르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고, 안느는 마리의 동향 친구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며, 음악은 대대적인 수정보완 작업을 통해 드라마와의 호흡을 유지했다. 이번 시즌 <마리퀴리>는 규모가 더욱 확장되어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옥주현이라는 뮤지컬 스타가 자발적인 출연을 결정했다는 점에서 일단 외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앞서 언급했듯 두 작품의 성과는 꼼꼼한 모니터와 지속적인 재정비를 통해 작품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린 결과물이다. 재정비의 과정에서 다소 모호했던 청춘과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하고 싶은 이야기’와 명확히 결합하고 장면화에 필요한 음악의 수를 늘려 드라마와 적절하게 배합했다. <전리농>의 경우를 보자. 이 작품은 어떤 것에도 미숙하고 나약한 고등학생 수현이가 15년간 남고를 떠도는 세 명의 고등학생 귀신들(승우, 다인, 지훈)을 만나면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작품은 청춘물 뮤지컬에 낯선 귀신들의 ‘성불’이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등장할 정도로 강력한 판타지가 극적 전제로 활용되는데, 만약 판타지가 단순한 차원에 그쳤다면 작품은 그저 유치한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전리농>은 귀신들을 등장시킨 이유를 명확히 함으로써, 극적 전제가 결말로 향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귀신들은 해체 위기에 놓인 구청 농구단 코치 종우의 ‘죽은 친구들’로서, 고등학생 시절 바다에 빠진 초등학생들을 구하다 사망했다.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변을 당한 종우는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리고 있으며, 죽은 친구들은 이런 종우를 위로하려고 오랫동안 이승을 떠돌았던 것이다. 종우와 친구들의 사연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가장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지만, 그들이 함께 농구하는 장면을 작품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여 <전리농>의 아이디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가장 가깝게는, 마치 원형적 장면처럼 세월호의 아이들이 겹쳐 보이는 그 장면에서 어떤 사회적 환경 때문에 허무하게 죽어간 아이들이 살아남은 자들과 해후하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 박해림은 일종의 영매 역할로 동급생들 사이에서 왕따 취급을 받는 수현을 활용함으로써, 학내 폭력과 따돌림이라는 십대들의 문제까지 명민하게 다루면서 판타지를 통해 침묵당하고 가려졌던 것들의 목소리를 복원시킨다.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마리퀴리>는 본격적인 ‘여성서사’의 모델을 보여준다. 작품은 라듐을 발견해 노벨상을 받은 마리퀴리의 전기적 사실과 라듐 시계공장에서 일하는 안느의 이야기를 결합시켜 여성연대를 이야기한다. 안느의 이야기 축은 라듐의 발광하는 성질 때문에 온갖 물건들에 무분별하게 활용되던 당시 상황을 참고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2018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케이트 모어의 라듐 걸스 내용처럼, 안느는 시계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집단적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는다. 노동자들의 죽음은 매독이 아니라 라듐의 방사능 중독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라듐의 명백한 위해성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마리를 위로한다. 한편 남편 피에르는 자신의 몸을 라듐의 위해성을 밝히기 위한 실험 도구로 활용하다가 마차를 피하지 못해 즉사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시종일관 마리의 조력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리퀴리>는 남편(남성)보다 안느(여성)의 역할을 확대하고, 마리가 프랑스에 이주한 ‘폴란드 여성 과학자’임을 초점화하여 그 타자성을 여성연대의 이유로 명확히 부각시킨다. 폴란드 여성인 안느의 위로가 무엇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다.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 뮤지컬-전설의리틀농구단

그런데 궁금해진다. <전리농>의 웃음과 눈물의 코드는 담백한 청춘물로서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한편, <마리퀴리>의 눈물은 간혹 감정과잉으로 흐르며 무대를 강한 파토스로 채운다. 뮤지컬 무대에서 낯설지 않은 정서다. <마리퀴리>의 최대 미덕이 국내 뮤지컬씬에서 부재했던 ‘여성의 연대를 통한 여성서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타자성으로 인해 배척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메데이아>를 쓴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부터 고민하던 주제다. ‘콜키스 여성’이 그리스인이 되지 못해 좌초했던 메데이아와 남성중심의 프랑스 과학계에서 고군분투하던 ‘폴란드 여성’ 마리퀴리 사이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마리퀴리>의 성공에 고무된 동시대 현장의 흐름과 그 사회적, 문화적 토대에 대해 더 큰 고민이 필요하다. 여성서사는 쏠림현상으로만 소비될 것이 아니다.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공연예술스쿨/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를,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를 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로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 창작뮤지컬에서 재현된 서울의 양상”, “여성국극의 혼종적 특징에 대한 연구”, “한국적인 것’의 구상과 재현의 방식”, “번역된 문화와 한국적 디코딩”, “‘근대적 지식인 되기’를 향한 욕망의 서사”, 『제국의 수도, 모더니티를 만나다』(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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