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 담론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 담론이라는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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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 담론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 담론이라는 유령
  •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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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공산당이라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한다. 코로나는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을 배회한다. 아니 배회라는 말이 부적절한 표현이다. 코로나가 인류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코로나는 쉽게 퇴치되지 않을 것이며 인류는 당분간 코로나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보건기구들이 예언 효과를 유발하는 예측을 하는 실정이다. 논자가 ‘공산당-유령’ 논제를 끌고 온 것은 ‘코로나 시대’니 ‘포스트 코로나 시대’니 하는 담론이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듯 번지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업계에서 4차 산업 난리가 났었고, 이에 대응해 교육계에서도 ‘4차 산업 담론’이 대유행이었다. 심포지엄이든, 논문에서든, 교과목에서든 <4차 산업 시대의 ~~>. 담론의 과잉이 아니라 공해 수준의 도돌이표 노래 부르기가 계속되었다.

지금은 지루한 노래가 되어버린 그 ‘4차 산업이라는 유행가’가 상한가를 치던 그즈음의 현상이 다시금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다. 진실을 말하면, 한마디로 복사판이다. <코로나 시대의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4차 산업 담론과 코로나 담론의 유행 사이, 작년에 흥미로운 학술 사건들이 있었다. 철학계를 포함해 인문사회계에서 혐오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수도 없이 열렸다. 작년은 그야말로 혐오 담론의 시대였다. 그런데 하나 같이 ‘혐오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것, 혐오는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내가 아는 한 혐오의 긍정성에 대한 논의를 본 적이 없다. 가령 야만과 폭력에 대한 혐오, 당파적 이데올로그들에 대한 혐오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도 인문사회학계에서? 한국의 인문사회학계가 우리 시대의 당면 문제나 사회문화적, 경제적 환경의 변화가 인간 일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토록 뜨거운 이론적 민감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지금의 이 현상은 그 전통적 DNA의 자연스러운 표출인가? 독재 시대, 권위주의적 시대에 독일 지식인들은 시대 문제를 끌어안으면서 지금도 ‘살아 있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그 시대에 한국의 지식인들은 권력의 나팔수가 되거나 낭만적 행동주의를 대부분이 따랐다. 지배와 피지배의 억압관계가 감각적으로 파악되었던  권력의 시대가 가고,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권력 외적 사건이 ‘인문사회계 학자’ 앞에 자신의 복잡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드러낸다. 이제 비로소 엄숙한 이론적 대결할 만큼 한국의 인문사회계가 성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고,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기대와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아 지식인 사회가 ‘담론’에 빠진 것일까? 한국 인문사회계의 이론생산사적 측면에서 볼 때는 이것이든, 저것이든 나쁘지 않은 장면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요즘 TV 채널을 돌리면 뽕짝 타령하듯이 이 유행처럼 번지는 <코로나 시대의 ~> 담론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 ~> 담론에는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징,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주술’이 작동한다. 그것은 ‘가장 흔한 멜로디에, 여느 유행가에서나 듣던 뻔한 가사’의 형식을 취한다. 바로 ‘성찰’이다. ‘무조건, 무조건 성찰이야’라는 주술을 읊조리는 것 같다. 한때 유행했던, 지금도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고개를 쳐드는 ‘교육 만능론’마냥 ‘성찰 만능론’을 들고 다니는 학자들이 많다. 추상적 문제 인식 탓인지, 성찰이라는 개념의 모호한 선명성 혹은 의미의 다층성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놀라운 이유 때문인지…. 그런 학자적 성실성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우매한 나는 묻고 싶다. 아틀란티스가 사라진 이후에, 흑사병의 발병 이후에, 십자군 전쟁 이후, 프랑스 혁명 이후에, 노예가 사라지기 전후에, 1, 2차 대전 이후에, 냉전이 끝난 이후에, 지구온난화의 문제 발생 이후에, 메르스 사태 이후에…. 수천, 수만의 성찰 타령이 있었고 성찰이 있었다. 최고 구체성의 사유로서 성찰이 드물게 있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추상적 차원에 불과한 성찰도 학자라는 권위의 옷을 방어 삼아 반복됐다.

코로나 담론 과잉 사태에서 섬광처럼 머리를 가르는 생각은 이것이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니?’, ‘나도 성찰이라는 유행가 불러야 하나?’, ‘모두가 똑같은 노래를 불러야 하나?,’, ‘욕을 먹더라도 제발 그 노래는 틀지 마세요, DJ’라고 말해야 하나? 어찌 됐든 코로나 담론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지루한 노래지만 누군가는 불러야 할 노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듣고 싶지 않은 노래를 멀리할 권리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데 있지 않을까?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철학교수로 베를린 자유대에서 아도르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동서철학회 부회장, 현대유럽철학 편집위원,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대전인문예술포럼 부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사회철학, 사회이론, 문화예술철학, 고전교육 등이다. 저서로는 『부정과 유토피아』,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 『아도르노의 문화철학』,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 『역사철학, 21세기와 대화하다』(공저) 등이 있으며, 그 외 고전교육 및 예술 관련 책도 다수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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