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과거와 미래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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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과거와 미래의 대화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8.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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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0강>_ 김병준 서울대학교 교수의 「사마천 <사기>」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0강 김병준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병준 교수는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 인류 문명 통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프로젝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소개한다. 이를 위해 “『사기』 130편 전체를 통해 검토”하기는 어려운 만큼 “우선 『사기』 속에서도 사마천 본인의 목소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태사공자서」와 「백이열전」”을 중심으로 사마천의 사관을 살펴보는 데 이어 『사기』 완성 이후 『사기』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사기』를 정전으로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사기』의 정전으로서 가치가 “본기, 세가, 열전, 표, 서로 구성”되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사서의 체재를 확립”한 역사책이라는 일반적 평가를 넘어 “인간의 삶의 실제를 추적하면서 그 저류에 흐르는 ‘규범’ 혹은 방향을 찾고자” 하는 데 있었음을 지적한다. 

▲ 지난 7월 11일, 김병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7월 11일, 김병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0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머리말 : 정전으로서의 『사기』

『사기』는 기원전 2세기 말 전한 무제 시기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이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오제(五帝)부터 자신이 살고 있던 무제(武帝)까지의 시기를 다루었고, 공간적으로는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지역을 모두 포함했다. 또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사서의 체재를 확립한 사서이기도 하다. 본기, 세가, 열전, 표, 서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편년체와는 달리 인간의 다양한 역사를 매우 효과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체재였다. 그것은 동아시아 역사서의 중요한 전범이 되어 『삼국사기』라는 기전체의 역사서가 만들어졌다. 보통 『사기』가 동아시아 역사서의 ‘정전’이라고 하면 이 점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기』의 정전으로서의 가치가 역사서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것, 그뿐일까?

『사기』에 기록된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단순히 그 삶의 궤적만을 나열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 삶의 실제를 추적하면서 그 저류에 흐르는 ‘규범’ 혹은 방향을 찾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사기』는 단지 역사서 체재의 규범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세계의 이치를 탐구하는 인본주의적 규범을 제시한 ‘정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서 『사기』가 ‘정전’으로서 제시한 규범이 무엇인가라는 말은 곧 역사서 『사기』가 갖고 있는 ‘사관’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해도 좋을 것 같다. 이하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관, ‘역사란 무엇인가’ ‘왜 역사가 필요한가’에 대해 고민했던 부분을 찾아가보면서, 『사기』가 ‘정전’으로서 갖는 가치를 탐구해보겠다. 본고에서는 우선 『사기』 속에서도 사마천 본인의 목소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태사공자서」와 「백이열전」을 검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그다음, 『사기』가 완성된 이후 『사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즉 『사기』는 그동안 어떤 ‘정전’이 되었는지, 과연 사마천이 원하는 ‘정전’의 가치가 제대로 주목받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사기』를 정전으로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사마천의 목소리 : 「태사공자서」 「백이열전」

사마천이 『사기』를 저작한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사기』 연구자 사이에는 ‘천(天)과 인간과의 관계를 구명하고[究天人之際]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通古今之變] 스스로 독자적인 입론의 체계를 세우는 것[成一家之言]’이라는 구절이 가장 핵심적인 말로 꼽힌다. 이 구절은 『한서』 「사마천전」에 수록된 ‘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나온다. 다만 이 편지는 사형을 목전에 둔 친구 임안에게 자신이 겪은 비통한 심정을 쏟아내기 위해 매우 격한 어조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전달하려는 구체적인 메시지는 자신의 책에서 훨씬 차분하고 절제된 어조로 기록된 부분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1) 「태사공자서」

먼저 『사기』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권130 「태사공자서」에 담긴 사마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사기』 저술의 동기를 담은 「태사공자서」는 (1)태사(太史) 직분의 계승 (2)『춘추』의 계승 (3)이릉의 화의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의 이야기 흐름은 다음과 같다. (1-1)‘자서’는 사마천 선조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계보를 잘 들여다보면 단순한 혈연적 가계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자신의 선조가 주 선왕 시기부터 태사의 직분을 맡게 되었고 그 뒤 진(秦)에 거주하고 있던 계파로 이어져 결국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의 직분을 맡았다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1-2)그 뒤에 태사로서의 사마담이 어떤 학문적 배경과 주장을 했는지가 이어진다. 여기에 인용된 ‘육가요지’도 결국 태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마담이 제자백가의 많은 서적을 포함한 과거의 기록(史文)을 망라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할애되었다. (1-3)사마천의 탄생과 고문(古文) 교육이 기록된 부분도 후에 사문(史文)을 수집하고 정리할 수 있는 태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1-4)이어서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과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이어진다. 아버지 유언은 『사기』 저술의 유업을 이어라는 것이 기본 내용이지만, 구체적으로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나까지 내려온 태사의 직분을 이어라는 점이 강조된다.

그런데 5년 뒤 사마천은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격단의 자각을 하게 된다. 새로운 자각의 계기는 태사령의 직분으로서 참가하게 된 태초 개력(太初改曆)이었다. 태사령은 천관(天官)을 관장하는 관직이었다. “상고 이래 현재까지 일정한 주기로 천운(天運)이 변동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야”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의 28수의 움직임을 측정하고 천체 운행을 추산한 새 역법이 반포되었다. 이는 천하만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자 심지어 제신(諸神)도 그 원칙을 받아 이에 따르도록 한 것으로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이 작업을 직접 경험하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 번 반추하게 된다.

즉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모아 사서를 편찬하는 것을 임무로 생각했는데, 사서의 편집이 그보다 훨씬 거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正易傳, 繼春秋, 本詩書禮樂之際”[역전(易傳)을 바로 하고, 춘추(春秋)를 계승하며 시서예악(詩書禮樂)에 근본을 두는 자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연결점은 “역전을 바로잡는 것”이었을 것이다. 천관을 관장하는 태사령의 직분, 그리하여 태초 개력을 완성시킨 것이 “역전을 바로잡는[正] 것”과 동일하다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다음 순서는 “춘추를 계승한다[繼春秋]”이었다. 『춘추』야말로 사마천 스스로 편찬하려 했던 『사기』와 동일한 사서였기 때문이다. 「태사공자서」는 먼저 동중서의 말을 빌려 공자가 현실 비판과 함께 왕도(王道)의 현창, 법도의 제시를 위해 『춘추』를 지었다는 공양학적 춘추관을 피력한다. 『사기』도 『춘추』와 마찬가지로 이를 드러내는 데에 의미가 있음을 뜻한 것이다. 다만 공자가 그러한 목적을 위해 공허한 말을 하기보다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여 그 속에서 저절로 선악이 드러나도록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춘추』의 의미를 상세히 서술하면서 『춘추』 외에 육예의 나머지 역(易)과 시서예악(詩書禮樂)의 효용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한다는 점이다. 사마담이 말한 나머지 부분 즉 “본시서례악지제(本詩書禮樂之際)”를 다시 한 번 부연한 셈이다.

사마천은 육예를 正(정), 繼(계), 本(본), 協(협)이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그 계승의 의미를 표현했다. 기본적으로 계승[繼]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묵수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육예의 의미를 충분히 숙고한 뒤 비판적으로 이를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正, 本, 協이라는 동사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갖추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이릉의 화’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울결된 바를 말로 펼칠 수가 없어서 지난 과거의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 생각하였다고 적은 것은 『사기』 저술의 질적 전환의 부분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이릉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가슴 속에 그동안 자신이 배우고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총체적 회의와 시비가 전도된 현실에 대한 울분이 가득하지만 이를 그대로 말로 펼칠 수 없었던 심정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이 사마천이 육예의 경전에 나오는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한 결정적 이유였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대로라면 이런 일을 겪을 수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내적 울분을 그대로 감정적으로 토로한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재고찰을 시도한 것이다.

2) 「백이열전」

「태사공자서」에서 기술된 『사기』의 저술 동기는 열전의 첫 번째 「백이열전」에 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태사공자서」의 내용을 (1)흩어진 과거 기록의 수집과 기록이라는 태사의 직분을 잇고, (2)『춘추』와 육예의 정신을 계승하며, (3)전도된 시비로 말미암아 생긴 울결된 마음을 사서 편찬을 통해 풀어내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백이열전」은 이 세 가지를 묶어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백이열전」의 첫머리는 선양의 문제를 거론한다. 아무리 관련 서적이 적어도 육예에 의거해 신뢰할 만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그 당시의 보편이었다. 그렇다면 『시』 『서』에 기록된 요순우(堯舜禹)의 선양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사마천은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시』『서』에 의하면 천하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자격은 충분한지 점검하기 위해 수십 년간 점검했다는 것이지만, 그 결론을 받아들이기에는 그 전제가 되는 역사적 사실이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즉 요임금이 순이 아니라 허유에게 천하를 넘겨주겠다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 『서』의 논리는 신뢰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를 세가에 입전한 만큼이나 공자를 존경했다. 그런 공자가 육예를 정리했기 때문에 『시』 『서』 모두 기본적으로 신뢰할 만하지만 그가 제시한 사례가 극히 적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충분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지 않은 채 기존에 알려진 것만으로 섣부른 결론에 이르는 것에 대해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그것이 육예일지라도 말이다.

두 번째 단락은 백이와 숙제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여기서도 여전히 기존의 권위에 대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공자가 이들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다”라고 내린 평가를 두고, 그러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강력히 항의한다. 사마천은 잃어버린 시[軼詩] 한 편을 인용하면서, 이 시를 보면서도 어떻게 백이숙제가 원망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세 번째 단락도 동일한 질문이 이어지지만 그 강도는 훨씬 높아진다. “천도가 항상 선인(善人) 편에 있다”는 말은 누구나 믿고 싶지만, 과거의 사실을 들추어내기 시작하면 과연 이 말이 옳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백이숙제나 안연의 사례와 도척의 사례만 보아도 이 말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지만, 이렇게 분명한 사례 말고도 시야를 최근까지 확대해보면 이런 예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발생한 사실을 못 본 척하고 그저 “천도는 옳다”라고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네 번째 단락은 결론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락에서 제기한 의문에 대해 공자는 이미 나름의 규범을 제시한 바가 있다. 가령 자기가 뜻한 바에 따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면 알아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앞의 두 단락에서도 살펴본 대로 공자의 결론은 자의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아무리 공자가 한 말이지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까닭은 공자가 과거의 사실을 선택적으로 취사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결론은 그가 살폈던 과거의 사실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가 선택하지 않았던 자들은 잊혀졌다. 그렇게 잊혀진 자들을 역사의 기억 저편에서 불러들여 함께 살펴야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마천은 이 작업을 『사기』에서 하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사마천은 흩어진 과거의 사실을 수집하고 편찬하여 시비 판단의 올바른 전거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큰 뜻을 전달하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는 것,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무리 『춘추』와 육예가 현실 비판 및 왕도(王道)의 제시와 현창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어도 그것을 단순히 묵수해서는 안 되며, 잊혀진 기억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그것의 사실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것,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천도(天道)의 시비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백이열전」에서 짧지만 강렬하게 주장하였다.

2. 『사기』 이후의 평가

『사기』 속에 표현된 사마천의 목소리는 과거의 사실을 충실히 제시함으로써 육예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자신 나름의 사관을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성현과 경전이 규정한 도덕적 진실과 다른 인간 세상의 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과거의 사실을 최대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천은 역사와 도덕 나아가 역사와 육예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공자의 학문도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공자는 남아 있는 과거 기록[史記]을 근거로 『춘추』를 작성하면서 단순한 기록의 수집과 나열이 아니라 그 안에 자신의 뜻을 오롯이 담았다는 것이다. 사마천 자신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사서를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마천은 스스로 자신의 책이 널리 읽힐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폐절될까 걱정했다. 다행히 선제(宣帝) 때에 사마천의 외손인 평통후(平通侯) 양혼(楊惲)이 이를 알리면서 세상에 널리 퍼졌고, 왕망 때에 이르러 사마천의 후예를 찾아 그를 사통자(史通子)로 봉하면서 후한 시대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이 사회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사마천이 당당하게 경전과의 경계를 허물고 비판적 계승을 표방했지만, 왕망 시기를 지나 후한이 되면서 유학이 사회 전반을 장악함에 따라 이러한 사고는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되었다. 실제 사마천을 열전에 입전하고 그를 훌륭한 역사가로서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들이 반표와 그 아들 반고였지만, 역설적으로 사마천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된 것도 이들 때문이었다.

먼저 『한서』 「사마천전」의 ‘찬왈(贊曰)’과 『후한서』 「반표전」에 보이는 반표의 평가를 보자. 먼저 장점으로서 첫째, 사마천이 『좌씨』, 『국어』에서 자료를 뽑고 『세본』과 『전국책』의 내용을 잘라내는 등 많은 자료를 망라했다는 것, 둘째, 황제부터 무제까지의 통사를 기전체로 처리했다는 것, 셋째,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알기 쉽게 쓰여 너무 번잡하지도 않으면서 내용이 잘 갖추어진 훌륭한 사서라는 것을 들었다. 이어서 단점으로는 첫째, 많은 자료를 섭렵하는 것 자체를 중시하다 보니 그 논의가 옅어졌다는 것, 둘째, 황로 사상을 앞세우고 육경을 가벼이 여겼다는 것, 셋째, 재부 증식을 논하면서 인의를 가벼이 여기고 빈궁함을 부끄러이 여겼다는 것, 넷째, 유협에 대해 논하면서 절개를 가벼이 여기고 세속에서 좋아하였다는 점을 중시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만약 사마천이 오경(五經)의 내용에 의거하고 성인의 시비를 그대로 따랐다면 정말 훌륭한 사서가 되었을 텐데라는 말로 맺고 있다.

반고의 사마천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훌륭한 사관(史官)의 재주’를 갖고 ‘실록(實錄)’이라는 훌륭한 역사서를 찬술했다는 점을 칭찬한다. 그래서 사마천을 입전시켰을 뿐 아니라 반표와 반고는 그 『사기』라는 역사서의 체재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훌륭한 실록이 될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기술하고, 논리적이고 질박하며, 핵심만을 과장되지 않게 그리고 나쁜 것을 숨기지 않고 기록한[實錄] 훌륭한 역사가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경전을 따르지 않았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인색하리만큼 비난에 가까운 부정적 언설을 편다. 육경의 도보다 황로의 도를 앞세운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인이 반대한 유협과 간웅을 긍정하고, 성인이 반대한 세리(勢利)를 받들며 빈천(賤貧)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큰 폐단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반표와 반고의 비판 이후 『사기』의 지위는 이대로 고정되어버렸다. 이와는 반대로 반표와 반고의 저작인 『한서』가 가장 표준적인 정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기』가 갖는 최대의 문제점인 반경서(反經書)의 문제가 사라지면서도 『사기』가 갖는 장점인 기전체의 체재를 잘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더 이상 『사기』와 같이 역사의 시작부터 자신의 시대까지 모든 것을 기술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통사가 아닌 단대사로 기록된 『한서』가 주목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분위기는 경(經)과 사(史)가 분리되는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한서』 예문지 단계에서는 서적을 ‘육예략(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략(詩賦略)’ ‘병서략(兵書略)’ ‘술수략術數略)’ ‘방기략(方技略)’의 여섯 가지 부류로 나누고, 『사기』는 이 중 ‘육예략’ 중 『춘추』 아래에 분류되었다. 그 뒤 『수서』 경적지 단계에 들어와 전통적 서적 분류 방식인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나뉘면서 사부(史部)에 속하게 되었다. 경(經)과 사(史)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가 확립된 것이다. 이제 사(史)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할 뿐,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색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경서에 언급된 도덕적 윤리를 역사 속에서 확인하는 데에 그쳤을 뿐이다.

이런 경향은 송대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송 정초(鄭樵)의 『통지(通志)』가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는 통(通)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고의 『한서』보다 사마천의 『사기』를 칭찬했다. 명대의 고문사파(古文辭派)는 『사기』의 격정적인 문장을 『한서』의 정돈된 문체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사기』를 역사서라기보다 문학서로 읽었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북송의 구양수(歐陽修), 명(明)의 왕수인(王守仁)과 이지(李贄) 등이 육경을 역사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점도 눈에 뜨인다. “경과 역사가 어찌 두 가지 학문인가!” “오경도 단지 역사서일 뿐”라는 주장은 이제 역사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그 최종적 귀결로 청(淸)의 장학성(章學誠)에 이르러 “육경은 모두 역사다”라고 표현되었다.

명대 이후 『사기』에 대한 평가는 크게 호전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한반도에도 전달되어 조선 중후기 『사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육경의 내용과 역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도 권근(權近)이나 정약용, 유만주(兪晩柱)와 같은 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하지만 경과 사의 분립이 이루어져 있고 육경이 갖는 권위를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서 육경을 역사로 이해하자는 것도 결국 경의 가르침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을 잘 이해해야 역사를 잘 쓸 수 있다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기전체의 장점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주목했지만 『사기』가 다루는 내용이 너무 많아 관련 내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유지기의 평가 이래 기전체는 오히려 『한서』의 장점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또 근대에 들어와 루쉰(魯迅)이 『사기』를 “사가(史家)의 절창(絶唱), 무운(無韻)의 이소(離騷)”라고 평한 이래 『사기』의 뛰어난 문장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어졌지만, 사서로서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도리어 문학적 측면이 과도하게 강조되어서 『사기』의 내용을 문학적 허구로까지 보고 전기소설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기』에 대한 재평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마천이 『사기』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힘주어 강조한 점이 충분히 음미되지 못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맺음말 : 역사란 무엇인가

사마천이 「태사공자서」와 「백이열전」에서 강조한 것은 한마디로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제시하겠다”라는 것이다. 단지 흩어진 과거의 사실과 기록을 모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 아니며, 그렇다고 누군가가 제시한 규범과 표준에 따라 그것에 맞춰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사마천은 어느 순간 과거의 어떤 사가(史家)와도 다른 소명을 자각했다. 그것은 곧 육경 그중에서도 『춘추』의 계승이었다. 다만 공자와 육경이 이미 밝혀 제시한 도덕적 윤리나 왕도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마천이 보기에 충분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육경에서 빠진 기억, 또는 육경이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일어난 과거 인물의 삶 속에서 어느 특정한 도덕적 규범에 맞지 않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을 찾아서 이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선험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속에서 자연히 드러날 수 있다고 믿었다.

『사기』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 중에서도 인간에 집중했다. 그렇기에 육경 속에 등장하는 성인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천도와는 달리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 그것을 못마땅해 하며 하늘을 탓하는 자들, 치안과 안정을 위협하지만 역설적으로 백성들 고충을 해결해주는 자들, 귀신의 존재를 믿고 점복에 미래를 맡기는 자들 등은 성인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눈을 감는 한 더 이상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역사학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제시했다. 일단 기존 권위에 의해 정립된 집단 기억에 대해 회의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인에 의해 확립된 육경일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묵수하지 말고 회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회의할 수 있는 근거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경의 내용과 맞지 않아도, 또 얼핏 신뢰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여도 최대한 잊혀졌던 기억을 발굴해내어야 한다. 이러한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비로소 기존의 기억이 옳은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아 보이는 주변의 일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은 삶의 대부분을 이루지만 역사로 간주되지 않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일상 속에 인간의 본성이 더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넷째, 그러한 기억을 모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자는 것도 아니다. 의심스러운 것을 가려내고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하며 불확실한 것을 확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섯째, 가려진 사실을 단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에 따라 나열하는 연대기적 서술인 편년체가 아니라 군주, 제후, 개인을 본기와 세가, 열전에 배치하고 제도의 연혁을 서(書)에, 그리고 여러 사건의 공간과 시간을 연결해주는 표(表)로 구성한 기전체는 역사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거를 체험된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서 인과 관계로 맺어지는 서사 구조를 만들어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저술된 역사학은 공자가 육예를 통해 성취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인간이 따라야 할 준칙을 밝히는 데에 그 목표가 있어야 한다(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한서』 이후 경과 사의 분리 경향 속에서 경의 가르침에 종속되어왔지만, 사마천이 생각하기에 본래 역사의 역할과 의미는 경과 함께 인간과 세상을 밝히는 데에 있었다.

과거를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두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과거를 우상화해서도 안 되며, 늘 과거를 새롭게 기억하고 그 과거에 앞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미래를 묻고 생각하자는 것이 사마천이 우리에게 전하는 목소리이다.

“과거를 서술하여 미래를 생각하라!(述往事, 思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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